2024-09-18 13:00:44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성-108] 남양: 東漢 제왕의 도시

(사진설명: 아름다운 남양)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마지막 백여덟 번째는 동한(東漢) 제왕의 도시 남양(南陽)이다. 남양의 원인유적지에서 인류문명의 근원을 탐구하고, 내향현(內鄕縣) 관아에서 과거의 위용을 느껴보고,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사기(社旗) 산섬회관(山陝會館)에서 정교한 석각과 목각에 감탄하노라면 역사 속으로 들어가 인류문명과 위대한 만남을 가지는 듯 하다.

하남(河南) 성의 서남쪽 남양 분지의 중심에 위치한 남양은 동쪽으로 동백산(桐柏山)을 이웃하고 북쪽으로 복우산(伏牛山)에 기대며 남쪽으로 한수(漢水) 강을 마주한 중국문명발상지 중 하나이다.

북쪽으로 낙양(洛陽) 일대와 연결되고 남쪽으로 오늘의 호북(湖北) 지역을 말하는 형주(荊州)와 양양(襄陽) 일대와 통하며 서쪽으로 한중(漢中) 지역으로 통하고 동쪽으로 강회(江淮) 일대와 연결되는 남양은 예로부터 군사 요충지였다.

(사진설명: 전통과 모던이 함께 하는 남양)

옛적에 완(宛)이라 불린 남양은 서주(西周) 때 중백국(中伯國)의 땅이었고 2800여년 전의 서주 선공(宣工)시기에 처음으로 성을 축조했다. 남양은 전국(戰國) 시기에 초(楚) 나라의 읍이었고 서한(西漢) 때에 중국 3대 관개구역 중 하나가 되었다.

25년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남양에서 거사를 일으키고 동한(東漢)을 건국하면서 남양은 ‘제왕의 도시’가 되었다. 서한과 동한 때 규모가 크고 경제가 발달한 남양은 당시 낙양(洛陽), 장안(長安), 성도(成都), 임치(臨淄)와 함께 중국 5대 도시였다.

남양고성은 세월의 변천과 전쟁의 파괴로 점차 폐허가 되어 현재는 남양성 해자의 두 구간이 남양시 동북부에 유적지로 남아 있다. 유적지에서는 한나라 때의 도자기 조각과 벽돌 등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사진설명: 남양의 고건물 화신묘)

현재까지 보존된 남양 호성하(護城河) 유적지는 남양의 동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40m 너비의 저지로 남아 있다. 사서 기록에 의하면 한나라 때 완성(苑城)은 외성(外城)인 군성(郡城)과 내성(內城)인 소성(小城)으로 구성되었으며 군성의 서남쪽에 위치한 소성은 군성과 서로 연결되었다.

2100여년 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이 고성유적은 관광지인 동시에 한나라 도시의 형성과 발전, 당시의 사회와 경제상황 연구에서도 중요한 참고적 가치를 가진다.

명(明) 나라 때 남양은 명 왕조 개국황제 주원장(朱元璋)의 23번째 아들인 당왕(唐王) 주질(朱桎)의 봉지였다. 9대에 걸쳐 11명의 당왕이 200여년 동안 남양을 관리했다.

(사진설명: 내향관아의 일각)

청(淸) 나라 군대가 남하한 후 당시의 당왕 주율건(朱聿鍵)은 남양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주해 복주(福州)에서 남명(南明)의 군주가 되어 연호를 융무(隆武)라고 했다.

청나라 때 남양은 당시 청의 국도인 북경(北京)에서 중국의 서남쪽으로 통하는 역도(驛道)의 요충지여서 상가가 운집하고 상공업이 아주 번창해 인근에서 유명한 무역센터와 화물집산지로 부상했다.

내외에서 고대 중국 현급 관아의 ‘살아 있는 표본’이라 불리는 내향현아(內鄕縣衙)는 700여년의 세월 속에서도 여전히 고대 중국 현 관아의 규제를 그대로 유지한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무후사의 일각)

명나라 때 건설된 내향현아는 현재까지 117칸의 방을 보존해 ‘용의 머리가 북경에 있다면 용의 꼬리는 내향에 있다’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중국에서 지금까지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현 관아건물인 내향현아는 고대 중국 봉건왕조의 하부 조직의 운행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남양에서는 명인이 많이 났다. 춘추(春秋) 시기의 정치가 범려(范蠡)와 혼천의(渾天儀)를 발명한 동한(東漢) 시기 과학의 거장 장형(張衡), 중의약 저서 <상한론(傷寒論)>을 쓴 동한(東漢) 시기 의학의 성인 장중경(張仲景), <출사표(出師表)>로 사서에 길이 이름을 남긴 삼국(三國) 시기의 군사가 제갈량(諸葛亮) 등이 모두 남양에서 태어났다.

제갈량은 세상을 평정하는 일에 동참하기 전에 남양에서 농사를 지었다. 1500여년 전에 남양성 서쪽의 와룡강(臥龍崗)에는 제갈량을 기리는 사당 무후사(武侯祠)가 세워졌고 많은 비석이 남아 있는 무후사는 현재 남양식 박물관으로 사용된다.

(사진설명: 한화관의 한화상석)

무후사와 나란히 하는 한화관(漢畵館)은 많은 한나라 화상석각을 집중적으로 전시한다. 1937년에 신축하여 1958년에 개축한 한화관에는 현재 2천3백여 점의 석상이 전시되어 있다.

한화관에는 또 한화석상이 발굴된 한나라 때 무덤이 원상태로 전시되어 있다. 한화석상의 내용은 아주 풍부해서 한나라 때의 천문과학과 문화예술, 사회경제 등 여러 분야의 상황을 형상적으로 보여준다.

한화석상에는 가희와 차량, 사격, 사냥 등 호화로운 생활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가 하면 서왕모(西王母), 복희(伏羲), 용봉(龍鳳) 등 전설 속의 인물과 짐승이 등장하기도 한다.

(사진설명: 장중경 사당의 일각)

과학의 거장 장형(張衡)의 무덤은 남양에서 25km 거리에 위치해 있다. 장형이 노년에 상서(尙書)를 담임했다고 해서 상서분(尙書墳)이라고도 부르는 장형의 무덤은 봉분 높이가 8m, 둘레는 79m이다.

봉분의 주변에는 벽돌로 통로를 만들고 푸른 소나무를 심었으며 사이사이에 꽃나무도 심어 화사하다. 무덤 앞에는 ‘한정상서장공평자묘(漢征尙書張公平子墓)’라는 글자가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다.

장형 무덤의 바로 옆에는 ‘평자독서대(平子讀書臺)’가 있는데 이 곳은 장형이 어릴 때 밤낮으로 책을 읽으며 학문에 열중하고 연구에 종사하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사진설명: 공중에서 본 산섬회관)

중국 각지의 산섬회관(山陝會館) 중 유일하게 청(淸) 나라 자희(慈禧) 태후의 어필을 받은 민간상회 건물인 남양 사기(社旗) 산섬회관은 ‘중국 제일의 회관’이라 불린다.

청나라 때인 1856년에 공사를 시작해서 6명의 청나라 황제를 거치며 137년만에 완공한 사기산섬회관은 가림 담벽과 현감루(懸鑒樓), 석조 패방(牌坊), 대배전(大拜殿), 춘추루(春秋樓) 등 중심 건물을 거느리며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특히 지금까지 보존된 130여칸의 방마다 전부 청색과 백색이 어우러진 대리석을 깔고 정교한 석각과 목각, 화려한 채색의 도자기로 장식을 한 회관은 궁전과 같은 웅장함과 상업회관으로서의 호화로움, 정원과 같은 우아함을 두루 갖춘 청나라 때의 가장 대표적인 민간 건축물이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복우산)

유구한 역사와 풍부한 문화를 보유한 남양은 자연경치 또한 수려하기 그지 없다. 남양의 두 줄기 산과 두 갈래 물은 남방과 북방 자연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남양을 아름답게 장식한다.

천태만상의 경관을 이루는 8백리 복우산(伏牛山)에는 기암괴석이 즐비하고 회하(淮河)의 발원지인 빼어난 경치의 동백산(桐柏山) 정상에 올라서면 산은 산대로 아름답고 물은 물대로 수려하다.

21세기 중국 4대 공정 중 하나인 남수북조(南水北調) 중간 선로가 남양의 단강구(丹江口) 댐에서 시작되어 남양은 더욱 이름을 날린다. 남양에는 그 외에도 기린호(麒麟湖)와 압하(鴨河) 댐을 비롯해 자연과 가까이 할 수 있는 물의 명소가 적지 않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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