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해서의 석상)
直諫의 제1인 해서
지배자의 무지와 관리의 횡령, 백성의 고난을 보며 그는 죽음을 불사하고 직간(直諫)한다. 직간의 결과가 죽음임을 안 그는 직간에 앞서 자신이 죽으면 쓸 관을 마련하기도 했다.
관을 메고 황제에게 직간을 한 이 기인(奇人)이 바로 해서(海瑞)이다. 그는 청렴한 관리의 대표인 북송(北宋)의 포증(包拯)과 이름을 나란히 하는 명(明) 왕조의 청렴하고 결백한 인물이자 강직한 성품의 대변인이다.
권선징악을 실천한 그는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위한 푸른 하늘이 되어 사람들로부터 해청천(海靑天), 남포공(南包公)이라 불렸다. 자신의 순결을 지키는 사대부 정신을 대표한 그는 유가의 대표적인 군자(君子)의 이미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직간(直諫)의 제1인 해서(海瑞)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보자.
제1회 서찰로 위선자를 골탕 먹이다
도어사(都御使) 언무경(鄢懋卿)은 위풍당당하게 절강(浙江)의 여러 현으로 순시를 떠났다. 도어사는 관리들의 실적을 평가하거나 관리를 탄핵하고 황제에게 제언을 하는 도찰원(都察院)의 수장(首長)이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인 언무경은 겉치레를 좋아하면서도 청렴한 관리인 척 위장했다. 그는 지방으로 갈 때마다 출발하기 전에 그 현의 현령(縣令)에게 고지서를 보낸다. 고지서는 대략 ‘본 도어사가 곧 시찰을 가니 규정에 따라 검소하게 접대하고 민폐를 끼치지 말라’는 내용으로 씌어진다. 하지만 현령들은 그 고지서의 진실한 의도가 ‘본 도어사가 곧 가니 준비를 잘 해서 잘 먹고 잘 놀 준비를 하라’는 것으로 알아 들었다. 그리하여 도어사가 가는 곳마다 그를 접대하느라 요란을 떨고 들어가는 접대비가 최소 백은(白銀) 1천냥(兩, 1냥=50g)에 달했다.
그 번에도 도어사는 순안현(淳安縣)으로 갈 준비를 하면서 사야(師爺)에게 고지서를 발송하라고 했다. 여기서 잠깐 설명을 곁들이면, 중국역사에서 사야는 최초에는 일상 업무에 개입하지 않는 막료(幕僚)와 유사했다. 그 위 명나라 때에 이르러서 사야는 관직이 없이 지방관리를 도와 그의 일상 업무를 협조하는, 오늘날의 개인비서와 유사한 직업이 되었다.
도어사 언무경의 말에 그의 사야가 말했다.
“언 나리, 순안현은 가지 않는 게 좋을 듯 합니다. 그곳은 너무 가난합니다.”
언무경이 사야를 나무랐다.
“아무리 가난해도 나 한 사람을 먹여 살리지 못하겠느냐?”
“문제는 그곳의 현령이 너무 가난합니다. 한 번은 그가 모친의 생신잔치를 차리면서 의례적으로 고기 2근(斤, 1근=0.5kg)을 사서 정육점 주인이 ‘생각밖에 해(海) 나리에게 고기를 두 근이나 팔다니’라고 감탄했다고 들었습니다.”
도어사가 놀라며 물었다.
“그럼 그는 평소에 뭘 먹느냐?”
“그는 현 관아의 후원에 심었던 꽃을 다 파버리고 하인을 시켜 그 자리에 채소를 가꾸게 해서 온 집안이 먹는다고 합니다. 평소에 베옷을 입고 채소를 먹지요.”
“그렇게 이상한 사람이 있다구? 말해보아라. 그 현령은 어떤 인물이냐?”
“해서라고 하는 그 현령은 광동(廣東) 경주부(琼州府) 경산현(琼山縣) 사람인데 거인(擧人)에 급제하자 폐하께 <평려책(平黎策)>을 올려 여족인들이 사는 편벽한 마을까지 길을 내고 현성(縣城)을 두어 여족인들을 관리할 것을 제언했습니다. 그러면 여족인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어 더는 난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사야의 말에 도어사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견식은 있구나. 그런데 지금 폐하께서 조정에 안 나오시고 관리들이 일을 하지 않는데 누가 그의 말을 듣겠느냐?”
“그럼요, 당연히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없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일을 열심히 하려는 이 사람에게 해필가(海筆架)라는 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해필가? 해서의 붓 받침대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해서는 복건(福建) 남평현(南平縣) 대리교유(代理敎諭)로 부임한 적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어사가 남평으로 학궁(學宮) 시찰을 갔습니다. 학궁을 담당하는 관리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어사에게 절하며 자기 소개를 하는데 해서만은 똑바로 서서 두 손을 모아 읍례(揖禮)만 했다고 합니다. 양쪽의 두 관리는 꿇어 앉고 가운데 해서만 서 있는 모양이 붓 받침대와 유사하다고 해서 해필가라는 별명이 붙었지요.”
“그 어사는 도학관(督學官)이지? 해서의 직속 상사인데 절을 하지 않은 해서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더냐?”
“왜 화를 내지 않았겠습니까? 도학관은 대로해서 교유의 신분으로 예의도 모르고 점잖지도 않다고 해서를 질책했습니다. 그런데 해서가 ‘대명(大明)의 법에 의하면 나는 타인의 모범인 학관(學官)이기에 절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리께서는 천지군친사(天地君親師)를 모르십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해서의 말에 일리가 있는 바람에 도학 나리는 화는 났지만 그를 어찌할 방도는 찾지 못했지요.”
유가 제사(祭祀)의 대상인 ‘천지군친사’에서 천지(天地)는 하늘과 땅으로 대표되는 신을 말하고 군(君)은 임금으로 대표되는 사직을 말하며 친(親)은 가장을 말하고 사(師)는 사도를 말한다. 이 ‘천지군친사’에서 ‘천지’는 경배의 대상이고 ‘군’은 충성의 대상이며 ‘친’은 사랑의 대상이고 ‘사’는 존경의 대상이다. 다시 말하면 하늘과 땅, 임금과 부모, 스승을 모셔야 한다는 전통문화의 한 가지 내용이다.
사야의 설명을 들은 도어사가 냉소했다.
“흥, 이런 사람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도학은 잘 몰라도 나는 잘 안다. 고지서를 보내거라! 해서가 나를 어떻게 접대하는지 보아야겠다.”
사야가 고지서를 발송하니 얼마 후 해서의 답신이 도착했다. 답신에는 ‘나리의 고지서를 받고 우리 현을 시찰하러 오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지서에는 나리께서 워낙 검소하셔서 요란한 영접을 싫어하시며 겉치레에 신경을 쓰지 말고 돈을 낭비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나리께서 시찰을 다녀오신 현성에서는 나리께서 이르는 곳마다 한 번에 백은 3,4백냥의 주연을 베풀었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고지서의 내용과 소문이 서로 다른데 현의 관리들이 나리의 뜻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까 아니면 그들이 나리의 고지서를 무시한 것입니까?’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해서의 서찰을 본 언무경은 할말을 잃었다. 그는 순안현 시찰은 물론이고 순안현 산하의 엄주(嚴州)에도 가지 않고 길을 에돌아 경성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화가 나고 생각할수록 억울해서 몰래 순감어사(巡監御史) 원순(袁淳)에게 ‘핑계를 대서 해서의 죄를 물으라’고 당부했다. 언무경의 작간으로 원래 가흥통판(嘉興通判)으로 승진하기로 예정되었던 해서는 오히려 흥국주판관(興國州判官)으로 좌천되었으며 그 후 이부상서(吏部尙書) 육광조(陸光祖)가 문관(文官) 선거를 주장해서야 해서는 호부(戶部)의 운남사주사(雲南司主事)로 승진했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