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해서의 무덤)
제4회 꿈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다
자신의 꿈이 하루 아침에 풍비박산되자 해서는 단연히 벼슬을 그만 두었다. 그리고 그는 사직서를 황제에게 올렸다. 이 사직서는 후에 아주 유명한 주소(奏疏)가 되었다. 이 주소에는 해서의 꿈이 담겨 있고 그 꿈을 향한 해서의 뜨거운 열정이 넘쳤으며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문무대신들에 대한 해서의 불만으로 끓어 넘쳤다. 또 조정이 위선적이고 이기적인 고위관리들로 꽉 찬데 대한 해서의 분노도 담겨 있었다.
신은 한 사람의 힘으로 이 세상의 도도한 물결을 막고 스스로를 본보기로 삼아 사람들이 모두 신과 함께 부패한 윤리를 바로잡고 순박한 풍속을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신이 부임지에서 한 일은 모두 백성을 위하고 조상의 법을 따른 것으로 어느 것 하나 잘못되지 않았으니 절대로 바꾸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신하들이 공무를 대충 보지 않도록 하시고 세상을 잘 다스리려는 폐하의 마음을 잘 헤아려 참답게 일하도록 편달하십시오. 무릇 일은 참답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작금의 이 폐단을 뿌리 뽑을 수 있습니다. 하나라도 거짓이 있으면 참다운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정말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으면 더욱 절대 안 됩니다!
여러 공(公)들이 내가 잘못했다고 여기면 그들은 필히 아둔한 신하들일 것입니다. <시경(詩經)>에 아녀자의 말을 듣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금 조정의 여러 공들은 모두 아녀자입니다! 폐하께서는 그들의 말을 절대 들으시면 아니 됩니다! 그렇다면 천하의 행운이고 아둔한 소신의 행운일 것입니다!
여러 대신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관모를 벗은 해서는 배를 타고 고향인 해남(海南)으로 돌아갔다. 그는 고향집 마당에 곡식을 심고 정원에는 나무를 심었다. 그의 거실에는 ‘충효(忠孝)’라는 두 글자가 씌어진 편액이 걸려 있고 서가에는 책이 가득했다. 해서는 만나는 사람마다 도학(道學)을 설파하며 명예관과 생사관에서 어떻게 벗어날지를 역설했고 관리가 오면 민생의 질고를 논하고 해법을 찾았다.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그의 마음은 여전했고 초탈한 그의 성품도 여전했다.
융경(隆慶) 6년(1572년), 융경제가 갑자기 붕어하고 10살의 태자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명신종(明神宗), 만력(萬曆)황제였다. 고공을 거꾸러뜨리고 수보대신(首輔大臣)이 된 장거정(張居正)이 조정의 힘으로 혁신을 다짐했다.
자신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해서는 밤에 낮을 이어 북경(北京)의 어지를 기다렸다. 하지만 장거정은 해서가 품행은 고상하나 일을 함에 융통성이 없어 명예만 누릴 수 있고 관직을 맡기는 적합하지 않다고 인정해 황제에게 해서를 천거하지 않았다.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와도 해서의 마음은 여전히 조정에 가 있었고 그는 여전히 조정의 부름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그 기다림이 16년이나 지속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만력(萬曆) 10년(1582년), 장거정이 유명을 달리하고 만력제가 친정(親政)을 시작했다. 만력 13년(1585년) 정월 만력제는 해서를 남경(南京) 도찰원(都察院) 첨도어사(僉都御使)로 임명하고 3월에는 남경 리부(吏部) 우시랑(右侍郞)으로 승진시켰다.
그 때 해서는 72살의 고령이었지만 성품은 여전히 강직했고 일을 추진함에도 여전히 불도저처럼 강하게 내밀었다. 한 서민이 자신을 협박했다고 오성병마사(五城兵馬司)를 고소하자 해서는 즉시 백성들에게 알리는 글을 써서 곳곳에 붙였다. 해서는 백성들에게 오성병마사의 피해를 입은 자가 있으면 누구든지 고소하라고, 법을 지키지 않는 나쁜 백성도 되지 말고 누구나 임의로 짓밟는 약한 백성도 되지 말라고, 억울함이 있는데도 고소하지 않으면 그 억울함은 끝이 없다고 썼다. 고지서가 나붙는 순간 해서는 온 남경의 관리들에게 모두 밉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서는 또 황제에게 소를 올려 조정의 관리들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태조의 규정을 회복해 탐관들에게 박피실초(剝皮實草)의 극형을 내릴 것을 제안했다. 해서는 그러지 않으면 조정의 부패 풍기를 바로 잡을 수 없다고 말했다. 명 나라 때 형벌 중 하나인 박피실초는 죄인의 인피를 벗겨 그 속에 짚을 넣은 다음 효시하는 극형이다. 하지만 만력제도 조정에 나가지 않는 황제였다. 결과 조정은 해서를 명분상으로는 승진이지만 사실상 좌천시켜 해서는 직위는 높지만 실권이 전혀 없는 남경 도찰원(都察院) 우도어사(右都御使)가 되었다.
관직은 있지만 할 일이 없어질때면 해서는 번마다 벼슬을 그만 두었고 그 때마다 황제는 또 새로운 벼슬을 내렸다. 황제는 대명(大明)의 신검(神劍) 해서를 내세우면 체면치레를 하고 풍속을 다스리며 퇴폐한 기풍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믿었다. 황제는 비록 어릿광대에 불과하지만 이렇게 고상한 품행을 갖춘 청렴한 관리 해서가 자신의 시대를 살았다는 사실은 청사에 오르고 만고에 길이 전해질 것이며 그에 따라 자신도 해서와 영광을 같이 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만력 15년(1587년) 10월 14일, 오랫동안 우울하던 해서가 병석에 누웠다. 그는 의사의 진단도 거부하고 유언도 한 글자 남기지 않았으며 사후의 일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직간(直諫)의 제1인, 강직한 성품의 신하, 청렴한 관리의 대표인 해서는 그런 방법으로 고독과 슬픔과 절망에 빠진 자신의 마음을 대변했던 것이다.
번역/편집: 이선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