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3 08:50:24 출처:cri
편집:李仙玉

[척계광 편-2] 척가군의 건립

(사진서령: 척계광 기념관의 일각)

제2회 척가군의 건립

가정(嘉靖) 35년(1556년), 명(明) 조정은 군대 사무를 강화하기 위해 절강(浙江)의 녕파(寧波)와 소흥(紹興), 대주(臺州) 세 지역의 군무를 관장하는 참장(參將)을 신설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권력이 막강하고 수입이 좋은 이 관직이 뇌물도 주지 않고 아무런 관계도 찾지 않은 척계광(戚繼光)에게 떨어졌다. 호박이 넝쿨째 떨어진 셈이었다. 하지만 호박이 이유 없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척계광의 상사인 절강 총병(總兵) 호종헌(胡宗憲)이 그를 이 관직에 천거했던 것이다.

척계광은 절강에 온 후 현지를 돌아보고 깊은 사색을 거쳐 여러 가지 합리적인 제언을 써서 직속상사인 총병 호종헌에서 올렸다. 그것을 본 호종헌은 척계광이 보는 눈이 있다고 여겨 그의 경력을 찾아봤다. 호종현은 척계광이 21살에 거인(擧人)에 합격되고 몽골 엄답칸(俺答汗)에 맞선 경술지변(庚戌之變) 때 <비엄답책(備俺答策)>을 썼는데 그 견해가 널리 전해졌으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호종헌은 척계광이 이상과 포부가 있고 군사적 재능도 갖추었으며 장군가문의 자손이기도 해서 28살의 그를 세 지역의 군사업무를 관장하는 참장으로 천거했던 것이다.

척계광이 참장으로 부임해서 1개월도 안 된 가정 35년(1556년) 9월, 왜구가 용산소(龍山所)를 거쳐 항주(杭州)로 쳐들어왔다. 척계광은 왜구 수량의 10배에 달하는 관군을 거느리고 맞섰다. 그런데 심리적으로 왜구를 두려워하는 관군은 왜구와 맞서 싸우기도 전에 갈팡질팡하며 도주했다. 상황이 급박한 것을 본 척계광은 자신의 장기를 보였다. 그는 바위에 올라서서 연속 세 대의 화살을 날려 왜구의 세 두령을 명중했다. 눈깜짝할 사이에 자신들의 두령 셋이나 죽는 것을 본 왜구들은 놀라서 공격을 멈추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도주하던 관군은 그제서야 머리를 돌려 척계광의 지휘에 따라 왜구를 추격했다. 관군은 힘든 전투를 거쳐 끝내 왜구를 물리쳤다.

그 해 10월, 패전을 달가워하지 않은 왜구가 다시 쳐들어와 또 용산소에서 척계광의 군대와 혈전을 벌였다. 이번에 관군은 반나절이나 힘들게 싸워서야 겨우 왜구를 물리쳤다.

두 번의 전투를 거쳐 척계광은 이런 군대를 거느리고 왜구를 평정한다는 것은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고 철의 군대를 훈련시킬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어디서 군사를 충원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왜냐하면 당시 ‘월나라 삼천 용사가 오나라를 멸망시킨(三千越甲呑吳)’ 전설은 흘러간 과거의 영광이었고 이곳은 이제 더는 과거 구천(句踐)의 월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문인이 많이 나는 절강은 유명한 강남 재자(才子)의 고향이다. ‘설마 나라를 지키는 믿음직한 군대가 될 용맹한 무사를 찾을 수 없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며 머리를 앓던 척계광은 우연한 기회에 의오(義烏)인들의 용맹스러움과 담략을 보고 의오에서 신병을 모집하기로 결정했다.

오늘날 의오는 세계적으로 규모가 가장 큰 소상품 도매시장이고 의오인들은 타고난 상인이다. 하지만 4백년 전 척계광은 의오에서 몇 만 명의 광부들이 4개월간 패싸움을 하는 것을 보았다. 당시 의오에는 광산이 많아서 농부들이 광부로 전환했고 소득도 많아졌다. 그러자 의오 인근의 영강(永康)인들도 단체로 의오에 밀려들어 광산을 개발했다. 의오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영강인들이 광산업에 종사하지 못하게 했다. 몇 천 명의 영강인들이 의오로 밀려오자 의오의 광부두령은 즉시 영강인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모아 무기를 들고 나섰다. 의오인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람마다 곡괭이, 삽, 쇠몽둥이, 식칼, 비수 등 온갖 무기를 들고 두 눈에 살기를 띠고 소리를 지르며 전혀 두려운 기색이 없이 영강인들의 무리에 쳐들어가 무기를 휘두르며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였다. 그 기세에 천지도 어두워지고 일월도 빛을 잃었다.

무장의 가문에서 태어나 생사를 다투는 격렬한 전투를 많이 겪은 척계광도 의오인들의 그 사나운 기세와 용맹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급히 호종헌을 찾아갔다.

“제가 신병을 모집해서 훈련시키게 해주십시오. 의오인 신병 4천명만 있으면 왜구를 깡그리 소탕할 수 있습니다.”

호종헌은 척계광의 청구를 들어주었다. 하루 빨리 왜구 평정을 희망한 그는 척계광의 안목을 믿었다.

척계광은 심사숙고를 거쳐 신병모집의 엄격한 요구를 정했다.

‘성안에 사는 자, 싸움에서 진 자, 관아의 말을 듣지 않는 자, 마흔이 넘은 자, 벼슬을 했던 자, 말이 많은 자, 담이 작은 자, 피부가 하얀 자, 성격이 과격한 자는 모집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병 모집 조건은 이렇게 정했다.

‘젊고, 건강하고, 몸집이 크고, 근육이 탄탄하고, 손과 발이 길고, 눈빛이 강하고, 충직∙성실하고, 법을 따르고, 관아를 경외하는 자를 모집한다.’

척계광은 이 기준에 따라 의오 남성 4천 명을 모집한 후 그들을 엄격하게 훈련시켰다. 이렇게 고생도 두려워하지 않고 힘들어도 힘들다 하지 않으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명령을 따르며 용감하게 싸우는 군대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 군대가 바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척가군(戚家軍)이다. 척가군은 빠른 시일 안에 왜구를 휩쓸어 버리는 예리한 검, 왜구들이 듣기만 해도 벌벌 떠는 결사대가 되었다.

자질 높고 용감한 병사가 있으니 이제는 왜구를 상대한 전법이 있어야 했다. 척계광은 왜구들의 조직방법과 무기, 범행 전술을 자세하게 연구하고 실제 전투경험을 접목하며 또 연해지역에 소택지와 갯벌이 많은 특징에 근거해 원앙진법(鴛鴦陣法)을 고안해냈다.

이 진법에서는 좌우로 대칭되게 위치한 병사들이 두 명씩 쌍을 이룬다고 해서 이름이 원앙진법이다. 척계광은 왜구들이 작전에서 아무리 싸움을 잘하고 용감한 병사라 해도 개인 한 사람의 힘으로는 승리를 거두지 못하며 여러 가지 무기를 가진 다른 왜구들의 협동작전이 있어야 작전의 성공을 거두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에 대항하는 원앙진법을 창조했다.

원앙진법의 진형(陳形)은 11명의 병사로 구성된다. 제일 앞에 대장 1명이 서고 그 뒤에 긴 방패를 든 병사 1명과 둥근 등나무 방패를 든 병사 1명이 선다. 긴 방패로는 왜구의 화살과 긴 창을 막고 둥근 등나무 방패로는 뒤에 선 병사를 보호한다. 등나무 방패를 든 병사는 한 손에 방패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표창(標槍)이나 요도(腰刀)를 들고 근거리에서 왜구와 싸운다. 세 번째 줄에는 역시 2명이 서는데 끝이 뾰족한 3m 길이의 대나무 병기를 들고 적을 무찌르며 앞쪽에 선 방패수의 전진과 뒤에 선 장창수의 공격을 엄호한다. 네 번째 줄에는 양쪽에 장창을 든 병사 각각 2명씩 서며 제일 뒤에는 단도(短刀)를 든 병사가 선다. 원앙진법은 또 원활한 진영의 변화로 왜구의 우회공격에 대응했다,

원앙진법의 훈련을 통해 척가군은 완강하고 유연하며 협동 작전하는 전투집단이 되었다. 척가군은 병력을 집중해 왜구를 공격하는 전략을 취했다. 척가군은 그 후의 전투에서 백전백승의 기록으로 전무후무의 군사적 기적을 창조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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