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천공개물>의 일각)
제4회 不朽를 실천한 과학자
부패한 대명왕조(大明王朝)가 곧 망할 것이라고 느껴서인지 송응성(宋應星)은 정주부(汀州府) 추관(推官)에 이어 박주지주(亳州知州)로 승진했으나 3품 관직을 내려 놓고 고향에 돌아와 저서편찬에 몰두했다.
그 몇 년 동안 송응성은 거작인 <천공개물(天工開物)> 외에도 자연과학저서들인 <관상(觀象)>과 <악진(樂津)>, 시집 <사령시(思怜詩)>, 정론집 <야의(野議)>, 역사서 <춘추융적해(春秋戎狄解)>, 문학서 <미리전(美利箋)>, 잡문집들인 <잡색문(雜色文)>과 <원모(原耗)>를 망라해 8권의 책을 썼다. 그가 몇 년 동안 이렇게 많은 저서를 펴낸 것은 수십 년에 걸친 사상과 문학의 축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송응성은 집에서 얼마 전에 출간한 <천공개물>을 펼쳐놓고 자신이 정성으로 그린 그림과 그림에 붙인 설명을 보며 정교한 그림과 훌륭한 문자가 완벽하게 하나가 된데 스스로 만족하며 미소를 머금었다.
이 때 장남 사혜(士慧)가 달려 들어와 헐떡거리며 말했다.
“큰일 났습니다. 청(淸)의 군대가 남창(南昌)까지 쳐들어왔습니다. 대명(大明)이 완전히 망했나 봅니다.”
하지만 송응성은 벌써부터 이 날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중서(中書)가 어디에나 있고 도독(都督)이 거리마다 보이고 감기(監紀)가 소 털같이 많고 직방(職方)은 개나 돼지보다도 값이 없다. 하물며 남경(南京) 조정의 권력을 독점한 마사영(馬士英)이 안으로는 환관을 중용하고 밖으로는 장군과 결탁해 모두들 뇌물을 받기 위해 조정에 들고 돈을 벌기 위해 벼슬을 하니 이렇게 부패한 조정이 어찌 망하지 않겠느냐? 나는 벌써부터 그럴 줄 알았다. 아니면 왜 벌써부터 관직을 그만두었겠느냐? 다만 네 큰 백부님께서 광주지부(廣州知府)로 계실 때 이자성(李自成)이 북경(北京)에 입성하고 숭정(崇禎) 황제 폐하께서 목을 매셨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벼슬을 그만 두셨고 또 집에 돌아오신 후에도 맨날 속수무책으로 한숨만 쉬시니 걱정이구나. 내가 벼슬을 하지 않으면 홀가분하다고, 산중에 은둔할 수 있다고 여러 번 말씀 드렸는데도 네 백부님은 여전히 대명의 멸망을 슬퍼하고 대명이 망하면 자신도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고 하시니 말이다.”
사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국기(曺國祺) 현령께서 순국하셨다고 합니다.”
송응성은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뛰어 일어나며 물었다.
“조, 조현령이 어떻게 되었다고?”
“청 군이 성을 점령했으나 항복하지 않고 봉기군을 거느리고 끝까지 싸우시다가 전사하셨다고 합니다.”
“얼른 가서 백부님께 여쭤보거라. 우리 산중에 은둔할 텐데 함께 가시지 않겠냐고?”
아들이 달려 나갔다. 송응성은 안방에 들어가 아내에게 일렀다.
“청 군이 곧 여기까지 쳐들어올 거요. 우리 점심을 먹고 나서 떠납시다. 산중에는 초가집을 벌써 지어놓았으니 몸 둘 곳은 있소.”
송응성이 안방에서 나오자 사혜가 울면서 거실로 돌아왔다.
“백부님께서 독극물을 드시고 순국하셨습니다.”
아들의 말에 송응성은 놀라서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가 급히 달려나갔다. 큰 형님을 마지막으로라도 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명 왕조가 망했다.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었다. 송응성은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청 왕조의 벼슬은 하지 말라고 두 아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송응성은 산중에 은둔해 책을 쓰며 강희(康熙) 연간(1662년~1722년) 초반에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의 자손들도 모두 그의 유언에 따라 시골에서 농부로 살면서 청 왕조의 과거시험을 보지 않았고 청 왕조의 벼슬을 받지 않았다.
유명한 관리는 아니였지만 <천공개물>로 인해 오늘도 내외에 명성이 자자한 송응성, 조(曺) 현령의 말처럼 그는 과연 불후(不朽)를 실천한 것이다.
번역/편집: 이선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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