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5 08:19:28 출처:cri
편집:李仙玉

[송응성 편-1] 마음이 콩밭에 있는 秀才

과학의 거장 송응성

선비의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전반생을 과거시험을 보는 데 썼으나 여섯 차례의 진사(進士) 시험에서 모두 낙방했다. 그러자 그는 과감하게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후반생을 고대 중국 최초의 생산기술 백과전서인 <천공개물(天工開物)> 편찬에 바쳤다.

그가 바로 고대 중국의 유명한 과학자 명(明) 나라 송응성(宋應星)이다. 승응성이 특히 위대한 것은 생산기술을 중시하지 않던 당시에 여러 업계의 생산기술을 망라한 <천공개물>을 편찬해 중국의 문명사에 눈부신 한 폐지를 장식했다는 점이다.

세계 최초로 아연과 동의 합금이 황동(黃銅)이라는 점을 논술하고 세계 최초로 아연 제련법을 기록했으며, 중국 최초로 잡교(雜交) 기술에 의한 누에의 종 개량을 기록한 <천공개물>은 많은 나라에 전파되어 심원한 영향력을 미친다.

과학의 거장 송응성(宋應星)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보자.

제1회 마음이 콩밭에 있는 秀才

천지 간에 가득한 화염으로 대지가 몸서리쳤다. 갑자기 들이닥친 화재로 강서(江西) 회경성(懷慶城)의 명문가 송씨가문의 저택이 한 순간에 폐허가 되었다. 위기로 가득한 명(明) 왕조 후반에 발생한 이런 상징적 의미를 담은 화재에 오늘날 사람들은 갑자기 무너진 명 왕조를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 화재 후 송씨가문에서 민생을 관심하는 재자(才子)가 나서 후세에 길이 전해지는 거작을 쓸 줄은 몰랐을 것이다.

화재가 발생한 후 송씨가문은 몰락의 길에 들어섰다. 송국림(宋國霖)은 가문의 모든 희망을 네 아들에게 두었다. 그 중 3남 응성은 총명하기는 했지만 사서(四書)와 팔고문(八股文)에 마음을 두지 않고 누에를 키우는 방에서 여인들과 누에를 보고 술이나 식초의 양조 법, 철에 따라 씨를 뿌리고 기음을 매는 농사에만 관심을 가졌다.

어느 날, 송응성은 머슴 몇몇이 돼지 뼈를 불에 태우는 것을 보고 다가가 물었다.

“지금은 모내기 할 때가 아니냐? 돼지 뼈를 태워서 어디에 쓸려고 그러느냐?”

송응성의 물음에 아장(阿長)이 대답했다.

“내일 산 너머 제전(梯田) 논에 모내기를 가는데 물이 너무 찹니다. 그래서 볏모 뿌리에 재를 바르려고 합니다. 그래야 찬 물에서도 벼가 잘 자라게 됩니다.”

송응성은 크게 깨닫는 바가 있어서 말했다.

“뼈를 태운 재에 들어 있는 비료가 벼 줄기를 튼튼하게 하겠구나. 사람도 몸에 필요한 거 먹는데 곡식도 마찬가지겠다.”

아장이 웃으며 말했다.

“셋째 도련님,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읽어 하루 빨리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출세할 생각은 안 하시고 여기 와서 곡식이나 보시니 나리께서 아시면 또 혼내시겠습니다.”

송응성이 주변을 둘러보니 과연 부친이 먼 곳에 서서 자신을 노려보는 것이었다. 송응성은 재빨리 서재로 달려갔다. 하지만 송응성은 경서를 본 것이 아니라 장부를 꺼내서 펼쳐 놓고 먹을 갈아 머리를 숙이고 붓으로 뭔가를 적었다. 그 때 언제 서재에 들어왔는지 송국림이 송응성의 뒤에 서서 아들이 쓰는 글을 훔쳐보고 있었다. 뒷덜미에 닿는 뜨거운 숨결을 느낀 송응성이 머리를 돌려보니 부친이 화난 얼굴로 서 있었다. 송응성은 급히 장부를 덮고 일어서서 말했다.

“아버님, 오셨습니까? 어서 앉으세요.”

그러면서 송응성은 부친을 부축해서 의자로 모셨다.

의자에 앉아서도 한참 숨을 고르던 송국림이 입을 열었다.

“너는 그 따위를 적어서 뭘 하겠다는 거냐? 볏모에 뼈를 태운 재를 바르는 것이 너하고 무슨 관계냐? 후에 농사라도 짓겠다는 거냐? 너는 내가 화나서 죽는 꼴을 보아야 성이 차겠느냐?”

송응성이 머리를 숙이고 대답했다.

“사람이 어떻게 책만 읽겠어요 바람도 좀 쏘여야죠. 이런 기법을 적어두면 언젠가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우리 집이 그런 기술을 쓸 정도로 몰락하지는 않았다.”

“<제민요술(齊民要術)>을 쓴 북조(北朝) 때 고양태수(高陽太守) 가사협(賈思勰)은 평생 하루라도 농부가 된 적이 있어요? 그는 태수라는 벼슬을 하면서도 그런 책을 썼잖아요? 그가 평소에 농업기술을 중시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그런 책을 쓸 수 있었겠어요? 그는 벼슬이 태수에 이르렀지만 관직으로는 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제민요술>이 있었기에 천 년 후 우리는 가사협이라는 사람을 알고 있잖아요. 벼슬하는 사람들이 모두 농부를 위해 책을 쓰는 마음을 가지는 건 좋은 일입니다. 제가 후에 과거시험에 급제한 후에도 책을 쓸 수 있잖아요. 그게 뭐가 잘못됐어요?”

“하지만 지금 너는 아직 과거시험에 급제하지 못하지 않았느냐? 네가 벼슬을 한 후에는 무슨 책을 쓰든 네 마음대로 하거라. 너의 증조부께서는 관직이 공부상서(工部尙書)와 병부상서(兵部尙書)까지 이르셨고 돌아가신 후에는 조정이 태자소보(太子少保)와 예부상서(禮部尙書) 직도 내렸다. 이는 얼마나 대단한 가문의 영광이냐! 너의 조부께서는 너처럼 삼남이셨는데 스무 살 때 수재(秀才)에 급제하시자 네 조모와 나를 두고 세상을 뜨셨지 뭐냐. 너의 조모께서는 숙부의 도움으로 온갖 고생을 다 하시며 나를 키우셨다. 그런데 나는 수재가 된 후 더는 급제하지 못하고 계속 제자리 걸음을 했으니 부끄럽구나! 이제 너희들이 이 아비를 위해 가문을 빛낼 때가 아니냐?”

“당신께서도 못하신 일을 아들보고 해내라시네. 아버님께서는 설마 과거시험이 문장만 보는 것이 아니라 운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모르시는 건 아니겠지?”

송응성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입으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올 가을 큰 형님하고 함께 향시(鄕試) 보러 가니 운이 좋으면 두 거인(擧人)이 되어 아버님의 소원을 풀어 드리고 가문을 빛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제서야 송국림은 얼굴에 희색을 띄우며 말했다.

“너하고 너의 큰 형은 한 어머니 소생이니 올 가을 너희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면 9월 너희들 모친의 회갑 때 크게 잔치를 베풀겠다! 하지만 운이 따라야 한다는 그런 말은 하지 말거라. 너희들이 주옥 같이 화려한 문장만 쓴다면 두 거인은 떼 놓은 당상이니라.”

부친의 그 말에 송응성은 또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형식만 추구하는 팔고문장(八股文章)이 어찌 주옥 같이 화려할 수 있겠어? 팔고문은 근본 그렇게 쓸 수 없는데.”

하지만 입으로는 여전히 이렇게 대답했다.

“네. 반드시 화려한 문장을 써서 아버님께 실망을 끼쳐드리지 않겠습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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