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송응성의 <천공개물>)
제2회 굽은 길을 걸은 擧人
송(宋)씨 가문의 하늘에 행운의 별이 뜨고 송씨 문중에 경사가 났다! 남창(南昌) 향시(鄕試)에 참석한 강서(江西)의 만 여명 수재 중 봉신(奉新)에서 딱 두 명이 거인(擧人)에 급제했는데 그들이 바로 송씨 가문의 두 형제인 송응성과 큰 형 송대성(宋大星)이었다! 거기다가 송응성은 제3등으로 급제하고 송대성도 제6등이었다. ‘봉신이송(奉新二宋)’은 봉신은 물론이고 강서에도 이름을 떨쳤다.
온 가문에 경사가 났다. 송국림은 큰 잔치를 차리고 두 아들을 격려했다.
“너희들이 더 잘 해서 내년 봄 경성의 회시(會試)에서는 장원으로 급제하거라!”
친척과 벗들도 입을 모았다.
“봉신이송이 두각을 나타냈으니 단숨에 둘 다 진사에도 급제할 것이오! 이제 송씨가문이 다시 흥성해지겠구려. 누가 아나? 두 형제가 후에 증조부를 초과해 관직이 1품에 이르는 내각대신(內閣大臣)이 될지? 그렇게 되면 봉신이송은 이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자자손손 전해지겠소!”
손님들이 흩어진 후 두 형제는 안방으로 들어가 모친에게 인사를 올렸다. 모친도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너희들이 있어서 이 어미의 얼굴에 빛이 나는구나! 너희들과 같은 아들이 있는데 내가 왜 고명부인(誥命夫人)이 되지 못하겠느냐? 아들들아, 너희 어미 살아 생전에 꼭 진사에 급제하거라! 이 어미가 너희들 덕에 1품 부인이 되고 싶구나.”
가족과 친지들의 고무와 격려에 송씨 가문의 두 형제는 판단력이 흐려져서 과거시험의 잔혹함을 가맣게 잊고 그날 밤으로 책을 챙겨 경성으로 출발했다.
그 해 송응성은 29살이었다.
경성으로 가는 길에서 송대성은 여전히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밤에도 객사에서 촛불을 밝히고 책을 읽었다. 하지만 송응성은 책을 보기는 고사하고 농부를 만나면 농사일을 묻고 광부를 만나면 광산의 일을, 장인을 만나면 공법을 물었다. 어쩌면 송응성은 과거시험이 운이 따르는 일임을 다시 상기했거나 아니면 아직도 마음 속에 책을 펴낼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송씨 형제는 경성에 이르러 3회에 걸쳐 과거시험을 보았다. 둘 다 느낌은 좋았으나 결과 모두 낙방되었다. 과거에 급제한 선비들이 득의양양해서 모자에 꽃을 꽂고 경림연(琼林宴)에 가는 것을 보는 두 형제의 기분은 쓸쓸하고 마음도 허전했다. 경림연은 황제가 과거시험에 급제한 진사들을 위해 베푸는 잔치이고 회시는 벼슬길에 오르는 마지막 관문이었는데 여기서 낙방했으니 송씨 두 형제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갈 체면을 잃은 두 형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으로 가서 좋은 스승을 찾아 더 배우고 3년 후에 다시 상경해 과거시험을 보기로 작심했다.
구강부(九江府) 여산(廬山)에 위치한 백록동서원은 당(唐) 나라 때부터 송(宋), 명(明), 청(淸)에 이르기 까지 학도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학문을 연구하는 유명한 사립 교육기관이었으며 송씨 형제가 찾아갈 당시는 유명한 학자 서일경(舒日敬)이 서원에 있었다. 명나라 만력(萬曆) 20년의 회시에서 진사가 된 그는 벼슬을 하지 않고 교육자가 된 것이었다. 송씨 두 형제는 그의 문하에 들어가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를 계속했다.
여산은 경치가 아주 아름답다. 하지만 송응성은 백록동에서 공부하는 동안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한 것이 아니라 늘 인근의 농가를 찾아가 벼의 병충해를 방지하는 8가지 방법을 배웠다.
어느 해 봄, 송응성은 잠농들이 품종이 서로 다른 번데기를 함께 두어 교배시키는 것을 보고 신기해서 물었다.
“이렇게 하면 어떤 좋은 점이 있습니까?”
한 잠농이 대답했다.
“검둥이와 누렁이를 교배시키면 얼룩 개를 낳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잡교 방법으로 좋은 누에를 얻을 수 있습니다.”
송응성은 자신이 보고 듣고 배운 것을 모두 기록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벼슬길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것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평생 꿈은 민생에 관한 책을 펴내는 것이었지만 그 꿈은 과거시험에 급제해 벼슬을 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했다.
당시의 선비들은 일도 할 줄 모르고 오곡도 분별하지 못했다. 그들이 사상을 묶어두고 상상을 말살하는 팔고문외에 아는 것이란 오로지 금기서화(琴棋書畵)와 같은 것뿐이었다. 그런데 송응성은 그들과 달리 농부와 장인과 상인과 병사의 생계를 관심했다.
송씨 형제는 여섯 번이나 경성에서 회시를 보았으나 모두 낙방되었다. 경성의 회시는 3년에 한 번이니 그들은 회시 준비를 하고 회시를 보는 데 거의 이십 년을 바친 것이다. 송씨 두 형제의 귀밑머리에 서리가 내리고 부친은 벌써 세상을 떴으며 77세의 노모도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송응성이 형에게 말했다.
“어머님께서도 노쇠하시고 저도 이제 마흔 다섯 살입니다. 우리 계속 과거시험을 보아야겠습니까?”
반백이 넘은 송대성은 말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두 형제는 회시를 통해 벼슬길에 오르려는 생각을 단념하고 집에 돌아가 노모를 봉양하며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 하기로 결정했다.
경성을 떠나기에 앞서 송응성은 갑자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한 가지 일을 했다. 그는 여섯 번 회시에서 쓴 자신의 모든 문장을 공개했다. 감개무량하고 흥분된 송응성은 조정과 황제가 자신의 견해를 볼 수 있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그는 문장에서 경제악화를 막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부담을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농업생산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천명했다. 문제를 투철하게 보고 분명한 견해를 제출한 송응성의 문장은 회시에 급제한 진사들의 진부한 견해에 비해 훨씬 훌륭했다. 하지만 조정은 사회적 책임감을 가진 선비 송응성을 보고도 못 본 체 했다.
숭정(崇禎) 4년(1631년), 예부(禮部)의 전형을 거쳐 거인 송응성은 절강(浙江) 동향(銅鄕) 현령(縣令)으로 부임했고 숭정 8년(1635년)에는 강서(江西) 분의현(分宜縣) 현학교유(縣學敎諭)가 되어 수재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분의현에서 4년간 관아의 일을 보는 동안 송응성은 적지 않은 저서를 쓰고 <천공개물(天工開物)>의 편찬을 시작했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