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조설근의 석상)
문학의 泰斗 조설근
‘나도 한 때는 옥당전(玉堂殿)과 금마문(金馬門)을 드나들었고, 또 한 때는 질그릇에 음식을 담고 밧줄로 침대를 만들었도다. 사람들 몰락한 명문가에 낙담한다 나를 비웃지만 이 세상의 야박함을 다 본 이 내 마음은 모르리라!’ 온갖 인생고초를 다 겪고 자신의 희로애락을 보여주는 이 인생 소감의 주인공이 바로 청(淸) 나라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화가인 조설근(曹雪芹)이다.
‘종잇장에는 온통 황당한 말이요 그 속엔 서글픈 눈물이 어려 있노라. 다들 지은이를 바보라 말하지만 그 속의 참 맛 그 누가 알리오?’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보여주는 고전 소설 <홍루몽(紅樓夢)>은 중국문명의 눈부신 보물이 되어 길이길이 전해진다.
조설근은 중국 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이자 중국 장편소설 창작의 제1인이다. 그의 거작 <홍루몽>은 중국 백화문 장편소설의 최고봉이자 중국의 봉건사회를 투철하게 설명한 백과전서이기도 하다.
문학의 태두(泰斗) 조설근(曹雪芹)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보자.
제1회 거인의 예감은 적중하고 세도가는 몰락하다
조설근이 과거시험에 급제했다. 조씨 가문의 남녀노소가 환락에 젖었다. 이는 조씨가문이 흥할 조짐이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하지만 조설근은 우울하기만 했다.
“썩은 공생(貢生)에 불과한데 이게 어디 기뻐할 일인가? 어쩌면 이 거인(擧人) 때문에 내 인생이 망할지도 모르겠다.”
조설근은 정원을 서성거리며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푸른 열매가 가득 달린 늙은 홰나무를 보니 강녕직조서(江寧織造署) 정원에 있던 무성한 멀구슬나무가 생각났다. 그의 사색은 머나먼 강녕으로 날아갔다…
조모(祖母)께서는 우리 조씨 가문이 강녕직조서 관아에 산지 60년이 넘었다고, 내가 제4대라고 말씀하셨다. 증조모(曾祖母)께서는 강희(康熙) 황제의 유모셨는데 강희제는 조모를 황실의 어른으로 대하였다. 또 어릴 때부터 강희제의 배독(陪讀)이 되어 황제와 함께 자란 조부(祖父)께서는 폐하의 소꿉친구 격이시다. 그리하여 보위에 오른 강희제는 강희 2년(1663년)에 증조부를 금릉(金陵)에 보내어 강녕직조(江寧織造)을 맡게 했다. 강녕직조는 황제를 대신해 직조업을 감독하고 황실에 원단을 제공하는 관직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조씨 가문은 3대에 걸쳐 60여년 동안 관직도 높고 수익도 좋은 이 벼슬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강희제가 재위 동안 돌봐주어 우리 가문은 순풍에 돛 단배가 되고 부귀가 하늘에 닿았던 것이다.
나의 큰 고모님께서 평군왕(平郡王)의 왕비(王妃)가 되면서 우리 가문은 황실의 친척이기도 한 세도가가 되었다. 강희제는 강남 순시 때 네 번이나 우리 집에서 기거했다. 황제는 서원(西園)에 가득 핀 원추리 꽃을 보고 어머니처럼 자신을 보살펴준 증조모의 은혜를 떠올리며 어필로 ‘선서당(萱瑞堂)’이라는 글을 써주었다. 그 편액은 지금도 우리 집의 거실에 걸려 성은의 망극함을 보여준다.
우리 가문은 비록 팔기(八旗)에 속하는 황실 내무부(內務府) 포의(布衣)이기는 하지만 한인(漢人)이기에 한군정백기(漢軍正白旗)이다. 강녕직조와 같은 좋은 벼슬을 우리 조씨 가문에 내린 강희제의 은혜는 참으로 하늘보다 높고 땅보다 두텁다. 나는 어릴 때부터 우리 가문은 위무제(魏武帝) 조조(曹操)의 후손이라고, 선인의 절세의 무공과 문학적 재능, 늠름한 풍채를 더 잘 이어가야 한다고 하던 어른들의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 놀음을 탐하기는 해도 가문의 정원을 벗어난 적이 없고 핍박으로 매일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읽었다.
‘화 속에 복이 깃들어 있고(禍兮福所倚) 복 안에 화가 숨어 있다(福兮禍所伏)’는 말처럼 화복은 서로 바뀌는 법이다. 강희제가 붕어하자 보호자를 잃은 우리 조씨 가문은 불운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강희제가 강남 순시 때 네 번이나 우리 집에 기거한 것으로 인해 돈을 물 쓰듯 한 우리 가문은 벌써 돈이 바닥이 났다고 한다. 거기다가 돈을 헤프게 쓰는 데 습관이 된 가문의 젊은이들이 어려운 사정에서도 여전히 겉치레에 찌들어 계속 돈을 물 쓰듯 했다. 그러니 어느 가문인들 그 많은 돈을 댈 수 있고 언제까지 빚을 내어 쓸 수 있겠는가?
또 강희제 붕어 후 보위에 오른 옹정(雍正) 황제가 첫 번째로 한 일은 빚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 진정한 목적은 빚 조사를 구실로 텅 빈 국고를 채우고 정적(政敵)을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옹정제의 가장 큰 정적은 바로 그의 친 형제들이었다. 소주직조(蘇州織造)로 있던 외삼촌 이후(李煦)는 빚 건으로 가산을 몰수당했음은 물론이고 소주의 미녀 다섯을 사서 여덟 째 왕에게 선물했다는 것이 밝혀져 하마터면 처형 당할 뻔했다. 우리 조씨 가문도 빚 건과 다른 사소한 일로 가산을 몰수당했는데 어느 왕이 우리 집에 보관해 둔 6자 높이에 도금한 사자 두 마리가 발견되는 바람에 우리 가문은 역모를 꾀하는 간사한 자의 무리가 되어 버렸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우리 집은 겉모양만 화려하고 속은 텅텅 비어서 사실 가산이 얼마 없었다. 옹정제는 우리 집에서 몰수한 가산이 백은(白銀) 몇 백 냥(兩, 1냥=50g), 동전(銅錢) 몇 천 개, 백은 1천 냥에 해당하는 전당표 백 여장뿐이라는 것을 알고는 흥도 깨지고 우리를 불쌍하게도 여기어 북경(北京)의 우리 저택은 몰수하지 않고 우리가 계속 사용하게 했다.
아아, 가산을 몰수당하고 노비를 내보내던 정경이 가장 공포스러운 나의 어릴 때 기억이다.
북경에 돌아온 후 우리의 생활은 예전처럼 호화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런 대로 편하게 살아갈 수는 있었다. 거기다가 누가 뭐라고 해도 조씨 가문은 평군왕의 사돈이기에 옹정제도 체면을 좀 봐주어 조씨가문의 씨를 말리지는 않았다.
옹정제가 갑자기 붕어한 후 화석(和碩) 보(寶) 친왕이 보위에 올라 건륭(乾隆) 황제가 되고 우리 집의 큰 누님께서 후궁의 귀인(貴人)이 되셨다. 오늘 내가 또 거인에 합격되었으니 겉으로는 우리 조씨 가문이 다시 흥성일로를 달릴 듯 보이지만 나는 어쩐지 오히려 곧 큰 불행이 닥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조설근이 정원에서 홰나무를 바라보며 강녕직조 관아 정원에 있던 원추리 나무를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평군왕부의 한 집사가 헐레벌떡 달려와 외쳤다.
“도련님, 큰일 났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예감이 바로 현실로 다가왔다는 생각에 조설근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조설근은 ‘육춘동운(六寸同運)’의 이치를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 가문의 친척들은 한 덩굴에 달린 열매처럼 어느 한 집에 일이 있으면 그에 따라 다른 집들도 모두 함께 그 영광을 누리거나 함께 그 피해를 봐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결과에는 예외가 없었다.
조설근이 담담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말하거라.”
“누군가 역모를 꾀해서 가을철 사냥을 나가신 폐하를 시해하려다가 잡혔는데 우리 전하께서 그에 연루되셔서 이미 관아에 자백하셨습니다.”
당시 조설근의 큰 고모부 장눌이소(丈訥爾蘇)는 세상을 떠나고 그의 사촌 형인 복팽(福彭)이 그 뒤를 이어 평군왕이 되었다. 평군왕 복팽은 건륭제를 시해하려던 홍석(弘晳)의 절친이었고 그 홍석은 강희제에 의해 폐위된 태자 윤잉(胤礽)의 장남이었다.
누각이 한 순간에 와르르~무너졌다. 평군왕부는 뿌리 뽑혔고 조씨 가문도 그에 연루되어 완전히 몰락했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