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7 08:15:58 출처:cri
편집:李仙玉

[임측서 편-1] 이름에 깃든 사연

(사진설명: 임측서의 화상)

마약금지의 영웅 임측서

아편을 폐기한 ‘호문소연(虎門銷煙)’ 쾌거는 임측서(林則徐)의 이름과 하나가 되어 우환으로 점철되었던 청(淸) 나라 후반의 백 년 역사에서 눈부신 빛을 뿌린다. ‘국가를 위해서라면 생사도 걸텐데 어찌 화와 복을 피해 다니겠는가’라고 한 임측서의 말은 그의 정신적 풍모를 가장 잘 대변한다.

청(淸) 나라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사상가이며 서예가, 시인인 임측서는 마약금지의 영웅일 뿐만 아니라 뛰어난 공을 세운 수리 전문가이기도 하다. 물을 다스린 그의 발자취는 중국의 2대 주요 하천인 장강(長江)과 황하(黃河)에 찍혀 있으며 심지어 신강(新疆)에도 그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마약금지의 영웅 임측서를 기리기 위해 국제연맹은 마약폐기를 위한 ‘호문소연’이 시작된 6월 3일을 ‘국제 금연의 날’로 정하고 유엔은 ‘호문소연’이 끝난 6월 26일을 ‘국제 마약 금지의 날’로 정했으며 국제천문학연합회는 7145번 소행성을 ‘임측서 별’로 명명했다.

마약금지의 영웅 임측서(林則徐)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보자.

제1회 이름에 깃든 사연

잉어가 끝내 용문(龍門)을 뛰어넘었다! 가경(嘉慶) 16년(1811년), 임측서는 전시(殿試)에서 제이갑(第二甲) 4등으로 진사(進士)에 급제해 한림원(翰林院) 서길사(庶吉士)가 되었다. 이에 평생 사숙 훈장으로 지낸 수재(秀才) 부친 임빈일(林賓日)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임씨 부자는 불을 밝히고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임빈일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네 살 때 나는 너를 서당으로 데리고 가서 무릎 위에 앉히고 글을 가르쳤다. 총명한 너는 그로부터 10년 후에 과거에 급제해 수재(秀才)가 되었지. 그 때 너는 아직 어려 내 어깨에 올라 앉아 과거시험장에 입장했어. 그래서 시험관이 ‘아들이 부친을 말로 삼도다(子將父作馬)’라고 했더니 네가 즉시 낭랑한 목소리로 ‘부친은 아들이 용이 되기를 바라네(父望子成龍)’라고 대답했다. 너의 대답에 시험관은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지. 너는 14 살에 수재가 되고 19 살에 거인(擧人)에 합격되었다. 그래서 나는 네가 워낙 총명하니 회시(會試)에도 첫 번에 합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연속 두 번이나 회시에서 낙방해서 내 마음이 얼마나 서늘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우리 아들이 학문이 두터워 세 번째 회시에서 제4등으로 급제하다니, 까딱하면 탐화랑(探花郞)이 될 뻔했구나. 아무튼 너는 이제 27살, 젊으니 참 잘 했다. 참으로 용하다.”

임측서는 부친이 자신이 공부하고 과거시험을 본 전 과정을 손금 보듯 환하게 기억하는 것을 보고 겸연쩍어 말머리를 돌려 그 동안 궁금했던 문제를 물었다.

“아버님, 모두들 제가 아버님 소생이 아니라 임씨 가문에 입양되었기 때문에 임측서라 부른다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임빈일이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너의 이름을 지을 때 사연이 있었단다. 이제 너에게 알려줄 때가 된 것 같구나.”

임측서의 부친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너는 건륭(乾隆) 57년(1792년) 7월 26일에 태어났다. 그 날 원래는 햇빛이 쨍쨍하고 날씨가 엄청 더웠다. 그런데 정오가 지나자 갑자기 먹구름이 일더니 온 세상이 밤처럼 어두워지지 않겠느냐. 당시 나는 시가지에 계원(桂園)을 사러 가고 네 모친의 복통이 시작되어 산파도 집에 와있었다. 곧 비가 내릴 차비라 나는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외딴 곳에 홀로 있는 우리 집이 저 앞에 보일 무렵 콩알 같은 빗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지더구나. 그런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팔인교를 둘러싸고 우리 집 처마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내가 급히 달려가 보니 2품 화령(花翎)을 단 관리가 우리 집 처마 아래서 비를 피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급히 절을 하는데 그 분이 내 손을 잡아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 그 때 마침 집안에서 갓난아기의 높은 울음소리가 울려 나왔지 뭐야. 그러자 그 분께서 웃으시면서 나에게 ‘부친이 되신 걸 축하 합니다! 울음소리를 들으니 분명 사내아이입니다!’ 라고 하셨다. 조정의 고위 관리가 너의 출생을 축하해주고 내가 부친이 되었다는 생각에 그 때 나는 너무 감동되어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분이 누군지 아느냐? 그분이 바로 당시 복건순무(福建巡撫) 서사증(徐嗣曾) 나리셨다. 그 분은 재해상황을 돌아보고 관아로 돌아가시던 중에 비가 내려 우리 집에서 비를 피하신 거였지. 나는 서 나리가 당시 명성도 좋고 또 너와 인연이 있다고 생각해서 너의 이름을 임측서라 짓고 자(字)를 원무(元撫)라 달았다. 네 형이 요절했기에 네가 비록 차남이지만 장남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너도 알지 않느냐. 나는 네가 자라서 서 나리처럼 순무가 되어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보살피는 좋은 관리가 되기를 희망했는데 이제 보니 나의 기대가 실현될 수 있겠다.”

임측서는 놀라서 입을 하~ 벌리고 부친의 긴 설명을 들었다. 자신의 이름에 이렇게 깊은 사연이 있고 부모의 이렇게 큰 기대가 깃들어 있을 줄이야. 그는 부친에게 이렇게 약속했다.

“아버님,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제 벼슬길에 올랐으니 반드시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서 나리와 같은 좋은 관리가 되겠습니다.”

과연 임측서는 경성에서 벼슬을 하는 7년 동안 한림원에 안주하지 않고 나라대사와 민생에 관한 여러 가지 자료를 열심히 읽고 대책을 연구했다. 그는 특히 수리건설과 농업생산과의 관계를 아주 중시했다. 그는 <북직수리서(北直水利書)>라는 소를 황제에게 올렸다. 임측서는 소에서 직예성(直隸省)의 수질이 벼농사에 적합해 물이 있는 곳이면 밭을 논으로 개조할 수 있다고 제언했다. 그는 농업은 천하의 근본이고 벼는 농업의 근본이라고 하면서 화북의 수리시설을 잘 건설해 벼를 심으면 수로를 통해 남쪽의 쌀을 북쪽으로 수송하는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한 수운적폐도 해결할 수 있다고 제출했다.

가경 25년(1820년), 임측서는 강남도(江南道) 감찰어사(監察御史)로 부임해 강남 각지를 시찰했다. 그는 시찰을 떠날 때마다 첫째, 영접을 나오지 말고, 둘째, 환영잔치를 차리지 말며, 셋째, 뇌물을 주지 말라는 세 가지 요구를 제출했다. 어느 날, 임측서가 팽호(澎湖)에 이르러 금방 짐을 풀었는데 한 화농(花農)이 화분 하나를 가지고 와서 말했다.

“이 화분은 품종이 귀한 장미입니다. 나리께서 큰 화분에 옮겨 심으시면 꽃을 더 잘 피울 것입니다.”

그 말에 임측서는 발로 화분을 차서 엎질렀다. 그러자 화분의 흙 속에서 빨간 봉투가 튕겨 나왔다. 봉투 속에는 무게가 반 근(斤, 1근=0.5kg)이 됨직한 황금 쥐 한 마리가 들어 있었고 봉투에는 “임 나리께서 부디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장보(張保) 올립니다”라는 글자가 씌어져 있었다.

임측서는 대로했다.

“이 황금 쥐는 몰수해서 국고에 바치고 장보는 곤장을 쳐서 내쳐라.”

임측서의 서슬에 화농으로 분장한 지방 관리 장보는 급히 줄행랑을 놓았다.

하남(河南)의 남안하(南岸河) 언제가 붕괴되었다. 거기다 무능한 하남순무 기선(琦善)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온 벌판에 아사자가 가득 널렸다. 임측서는 즉시 하남의 재해상황을 보고하고 기선의 무능을 질책하는 소를 썼다. 그러는데 임측서의 아내가 일깨웠다.

“기선은 만인(滿人)이고 폐하와 아주 가까운 사이니 그를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디에 만인이 없고 어디에 귀족이 없겠소? 한 지역을 관리하는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봉록만 받고 일을 하지 않으며 백성들의 생사를 돌보지 않는다면 오히려 경성으로 돌아가 한가한 귀족이 되는 게 더 바람직하오. 그러면 그 중요한 자리를 일을 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게 말이오. 나는 감찰어사요. 폐하께서 반드시 진실을 아시도록 해야 하오. 안 그러면 나도 봉록만 받고 일은 안 하는 그런 꼴이 될 터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임측서는 절강(浙江) 항가호도(杭嘉湖道)로 좌천되었다. 그는 현지의 실태를 알아보고 수리시설 건설을 제언했으나 방해세력이 많아서 일을 추진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실질적인 일을 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몇 번이나 급한 마음에 크게 화를 냈으나 그 결과 일이 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동료들의 기분을 잡치고 심지어 그들의 멸시까지 당했다.

이 때 가경제가 붕어했다. 임측서는 국상(國喪) 기간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여겨 부친이 질환에 걸렸다는 이유로 벼슬을 그만 두고 부모를 봉양하고자 집으로 향했다. 귀향 길에 번민에 빠지고 기분이 울적한 그는 끊임 없이 자신을 반성했다.

“이렇게 급한 성격을 가지고 어떻게 큰 일을 하겠는가? 먼저 나 자신의 개생적 약점을 극복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그래야 세상을 구하고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임측서가 집에 돌아오니 부친의 질환은 벌써 다 나았다. 그는 재계하고 염불하면서 심신을 수양했다. 그는 또 몸소 ‘제노(制怒)’라는 두 글자를 목패에 새겨 탁상에 놓고 화를 내지 말라고 시시로 자신을 경계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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