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추근의 석상)
제4회 뜨거운 피를 쏟다
1906년, 추근(秋瑾)은 귀국 후 상해(上海)에서 동맹회(同盟會) 몇 몇 유학생들과 함께 “중국공학(中國公學)”을 설립했다. 이 공학은 2월초 오송(吳淞)에서 개강했다.
상해 조가도(曺家渡)에서 추근은 오랜만에 의자매 오지영(吳芝瑛)을 만났다. 그들은 소흥주(紹興酒)를 마시면서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술기운이 조금 돌자 추근은 자리에서 일어나 칼을 들고 중국여성권리선언이라 불리는 <면여권가((勉女權歌)>를 읊었다.
남자와 여자 평등한 권리는 하늘이 내렸음에(男女平權天賦就)
어이 달갑게 누구에게 예속되겠는가(岂甘居牛後)?
단연 분발 정진해(愿奮然自發)
과거의 수치 씻으리(一洗從前羞恥垢)
여성동포들 뜨거운 열정으로(若安作同儔)
나라 찾기 노동에 뛰어 들기를(恢復江山勞素手)
낡은 습속 가장 수치스러워(舊習最堪羞)
여자는 마소 취급 당했노라(女子竟牛馬偶)
문명의 새 서광 보이니(曙光新放文明候)
홀로 가서 으뜸 차지하리(獨去占頭籌)
노예 근성 뿌리 뽑고(愿奴隸根除)
지식 배우고 능력 키워(智識學問歷練就)
어깨에 중임을 짊어지고(責任上肩頭)
국민의 여걸 기대 저버리지 말기를(國民女傑期無負)
3월초, 추근은 도성장(陶成章)의 지시에 따라 가흥(嘉興)에서 오흥현(吳興縣) 남심진(南潯鎭) 심계여학당(潯溪女學堂) 교사가 되어 일본어와 조리법, 보건지식을 가르쳤다. 심계여학당 교장 서자화(徐自華)는 추근보다 두 살 많은 여성이었다. 서로에게 탄복하던 두 여인은 금방 절친이 되었다. 후에 서자화와 그녀의 여동생 서온화(徐蘊華)는 모두 추근의 영향으로 동맹회에 가입했다.
추근은 학교에서 페미니즘를 선양하고 또 돈을 모아 오민(吳珉)이라는 민며느리를 구출한 것으로 인해 현지 향신(鄕紳)들의 눈에 났다. 그들은 헛소리로 지방의 규칙을 교란하고, 남장차림으로 체통이 말이 아니며, 일본 유학을 갔다 와서 언행이 과격하다고 추근을 질타했다. 당시 금화회당(金華會黨)과 연합해 무장봉기를 계획하던 추근은 학교 이사장의 질책을 받은 후 즉시 사직서를 제출하고 오민과 서온화를 데리고 상해로 갔다.
서자화도 학교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교장 직을 그만 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고향인 항주(杭州)에 돌아가 동맹회의 비밀 연락처로 원단가게를 차렸다.
추근은 상해에서 비밀 연락소인 ‘예진학사(銳進學社)’를 차리고 업무를 연계하고 소식을 전달했다. 손문(孫文) 선생이 상해에 모금하러 오자 추근은 자신의 활동경비도 부족한 상황에서 천방백계로 자금을 모아 손문 선생에게 전달했다.
추근은 몇 몇 광복회 성원들과 무장봉기를 준비하면서 사제폭탄 만드는 방법도 직접 배웠다. 그런데 제조과정에 폭탄이 폭발해 추근은 팔을 다치고 당국도 이를 알게 되어 추근은 하는 수 없어 비밀 연락소를 폐쇄하고 시골에 내려가 상처를 치료했다.
상처가 다 나은 후 추근은 서자화를 찾아 항주로 갔다. 서자화의 원단가게 입구가 번화가를 마주한 것을 본 추근은 서자화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나가는 여성이 적지 않으니 이 곳은 우리가 여성권리를 선전하기 좋은 곳이네요.”
그로부터 추근과 서자화는 매일 가게 앞에서 격정 높은 목소리로 연설했다. 그녀들은 집을 나서서 지식을 배우고 전족하지 말며 남녀평등을 쟁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서자화는 추근을 데리고 서호(西湖)을 구경했다. 추근은 소제(蘇堤)의 북쪽 끝에 위치한 ‘악왕묘(岳王廟)’에 들어가 악비(岳飛)를 참배했다. 사당에 모셔진 갑옷 차림의 악비 좌상과 강산을 찾자는 ‘환아하산(還我河山)’편액을 보니 광복회의 선서가 떠올라 추근의 가슴에는 뜨거운 피가 솟구쳤다.
두 여인은 또 악비의 무덤에도 제를 올렸다. 추근이 말했다.
“죽어서 서호 기슭, 악비의 무덤 옆에 묻힐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뒷이야기지만 서자화는 추근의 이 말을 기억했다가 추근이 희생된 후 오자영과 둘이서 생명의 위험도 무릅쓰고 추근의 유해를 서호 서령교(西泠橋) 옆에 묻었다.
<중국여보(中國女報)>를 차리기 위해 추근은 호남(湖南)의 시집으로 모금하러 갔다. 시아버지가 말했다.
“돈은 문제가 아니지만 네가 하는 일이 너무 위험하다. 집으로 돌아오너라! 아니면 애들을 데리고 자방(子芳)을 찾아 북경(北京)으로 가거라.”
시어머니도 곁들었다.
“그래도 애들을 데리고 북경으로 가는 게 좋겠다. 네가 언젠가는 일을 칠까 걱정스럽구나.”
추근은 단도를 끌러서 탁상 위에 던지며 말했다.
“저는 생사를 염두에 두지 않은지 오래 됩니다. 그리고 이 집에 누를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저 혼자 담당할 테니 3천원만 주세요. 그러면 당장 이 집을 나가 자방과도 이혼하고 왕씨 가문과도 관계를 끊겠습니다.”
추근의 말에 시부모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급히 은화 3천을 가져다 주었다. 떠나기에 앞서 추근은 다소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제가 하는 일로 인해 왕씨 가문이 연루될 까봐 관계를 끊으려고 해요. 이제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두 아이를 잘 부탁합니다!”
뒷이야기지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추근의 시부모는 모두 병사하고 추근이 희생된 후 왕자방도 지나친 슬픔 때문인지 공포 때문인지 30살의 젊은 나이로 바로 유명을 달리했다.
상해에 돌아온 추근은 서자화 자매가 가산을 팔아 신문을 간행하는데 쓰라고 1천의 은화를 기부하자 깊은 감동을 받으며 모든 에너지를 <중국여보>에 쏟았다. 그녀는 몸소 원고를 쓰고 몸소 편집하고 몸소 인쇄하고 신문간행까지 직접 나섰다. <발간사>에서 추근은 <중국여보>를‘광명을 향해 어두운 세상을 나오도록’여성들을 인도하는 불빛 ‘신등(神燈)’이라고 비유했다.
추근은 오지영에게 이런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여자들은 응당 학문을 배우고 자립해야지 모든 일에서 남자에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청년들이 걸핏하면 혁명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가정에서부터 혁명을 시작해야 합니다. 먼저 남녀평등부터 쟁취해야 합니다.”
유감스럽게 <중국여보>는 2기까지만 발행했다. 하지만 추근은 이런 행동을 통해 개인의 미약한 힘으로 중국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남녀평등을 위한 여론을 조성했다. 그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 그의 이런 정신은 어둠 속에서 훨훨 타오르는 횃불이 되어 자자손손 전해진다.
추근은 모친의 별세로 소흥(紹興)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른 후 소흥대통(大通) 사범학당의 교무장(敎務長)으로 초빙되었다. 그녀는 호남으로 모금하러 갈 때 안경(安慶)에 가서 일본 유학 때의 동문 서석린(徐錫麟)을 만나 안휘(安徽)와 절강(浙江)의 여러 곳에서 봉기를 일으키기로 약속했다. 이별에 앞서 추근은 서석린에게 시 한 수를 지어 주었다.
천금으로 칼을 사도 아깝지 아니하고(不惜千金買寶刀)
담비 가죽으로 술을 바꾸니 호쾌하도다(貂裘換酒也堪豪)
사람의 생명은 아주 소중하니(一腔熱血勤珍重)
피 흘려 위대한 일을 해야 헛되지 않으리(洒去犹能化碧濤)
서석린은 추근의 이 시를 읽으며 일본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에 떠올렸다. 그 때 그들 몇 몇 동문은 추근이 칼을 아주 좋아하는 것을 알고 돈을 모아 비싼 단도를 사서 선물했다. 큰 기쁨에 추근은 즉시 입었던 담비 외투를 전당 잡혀 술을 사며 경축했고 칼을 잡고 사진도 찍어 영원한 기념으로 남겼다. 귀국 후에도 추근은 언제나 그 단도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
상해에 돌아간 추근은 영원한 이별이 곧 도래할 것을 예감이라도 하듯 서자화의 여동생 서온화에게도 시를 지어 주었다.
그 뒤의 일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사전에 봉기 비밀이 폭로되는 바람에 서석린은 봉기를 앞당겨 안휘순무(安徽巡撫) 은명(恩銘)을 사살하고 자신도 체포되었다. 봉기가 실패하고 서석린은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되었다. 노신(魯迅)은 동경(東京)에서 그 기사를 보았고 추근은 소흥에서 이 일을 알았다. 추근은 슬픔을 참을 수 없어 문을 닫아 걸고 대성통곡했다. 하늘도 추근과 함께 울기라도 하듯 그날 소흥에는 폭우가 쏟아졌다.
각지에서 봉기 실패의 소식이 연이어 전해지고 광복회의 많은 두령들도 희생되었다. 추근의 눈앞에는 희생된 동지들의 익숙하고도 다정한 얼굴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그는 깊이 자책하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다 내 잘못이야.”
이런 봉기들은 모두 추근의 동원과 설득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항주 여사범학당의 동문인 호종추(胡踵秋)가 특별히 상해에서 추근을 찾아왔다.
“상해 조차지로 가서 잠시 몸을 피하자.”
호종추의 권고를 거절하고 집에 돌아온 추근은 자신이 보관했던 1천 여부에 달하는 광복군 비밀서류와 봉기에 관한 자료 전부를 소각하고 나서 침실에서 서온화에게 절명서를 남겼다. 그는 서온화에게 “희생의 책임은 모두 나에게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은 사실 추근이 스스로에게 한 말이다. 그녀는 위험을 피할 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사람들을 각성시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작심했던 것이다.
누군가의 밀고로 관아는 4백 명 군사를 풀어 추근을 추적했다. 추근은 대통사범학당에서 체포되었고 체포되자 곧 사형되었다.
관아가 하루 이틀 새에 추근을 참수하게 된 데는 이런 사연이 깃들어 있다. 소흥지부(紹興知府) 귀복(貴福)이 누가 또 혁명당이냐고 묻자 추근은 이렇게 대답했다.
“바로 당신이다. 개강식 때 당신이 나에게 ‘경쟁천연(竟爭天演), 웅관지구(雄冠地球)’라는 대련을 써주었는데 그 첫 두 글자를 딴 경웅(竟雄)이 바로 나의 자(字)이다. 이건 당신이 나를 높이 평가했다는 말이 아니냐? 이 대련은 지금도 학당에 걸려 있다. 이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추근의 말에 귀복은 간담이 서늘했다. 추근의 자백 내용을 상부에 보고하면 조정의 관리인 자신도 끝장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는 하루 빨리 추근을 사형에 처하기로 작심했던 것이다. 귀복은 절강순무에게 연속 세 번에 걸쳐 전보를 쳐서 추근의 거처에서 장총과 구식 총 등을 색출했으며 추근은 틀림 없는 혁명당이라고 보고했다.
절강순무는 즉시 추근을 사형하라는 답신을 보냈다. 순무의 승인을 받은 귀복은 산음현령(山陰縣令) 이송악(李宗岳)에게 추근을 취조해 반드시 자백을 받아내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추근을 존경하고 추근에 탄복한 이송악은 추근과 두 시간 동안 대화하고 나서 추근이 ‘가을바람 가을비에 더욱 슬프다(秋風秋雨愁更煞人)’는 절명사(絶命詞)만 적었다고 보고했다. 이송악은 자백도 안 하고 증거물도 없으면 추근을 죽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추근은 참수당했다. 이종악은 추근의 생명을 구하지 못했음은 물론이고 심지어 그의 참형을 감독해야 하는 바람에 깊은 가책을 느껴 석 달 새에 세 번이나 스스로 목숨을 끓으려 시도했으며 결국 목을 매어 자결했다. 절강의 민중들은 후에 이종악의 위패를 추근 열사 사당에 공양했다.
귀복은 추근의 자백서를 위조하고 이튿날, 즉 1907년 7월 15일 소흥성의 고헌정(古軒亭)에서 추근의 사형을 집행했다. 31살의 추근은 뜨거운 피를 중국 땅에 뿌렸다. 그녀의 하얀 적삼은 빨간 피로 물들었고 그녀의 고귀한 영혼은 하늘에 걸린 무지개로 변했다. 노신의 소설 <약(藥)>에 나오는 혁명가 하유(夏瑜)의 원형이 바로 추근이다. 소설에서 회자수(刽子手)는 열사의 피를 가져다 팔고 무지몽매한 사람들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 피를 바른 빵을 사간다. 무감각하고 어리석은 민중들을 향한 노신의 납함(吶喊)은 얼마나 침통하고 얼마나 절망적인가!
추근은 중국여성을 위해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는 중국 여성들이 남성의 노예가 되지 않고 ‘문명한 세상에 살고 문명한 공기를 마시기를’ 희망했다. 일본여성 시게코는 후에 추근 전기(傳記)에서 추근을 ‘질풍 속의 이슬’이라고 말했다.
추근은 중국 여성 머리 위의 어두운 밤 하늘을 가른 번개이며 중국 여성 머리 위의 어두운 밤하늘에 울린 천둥으로 천 년 동안 잠자던 중국 여성들을 깨웠다.
추근은 중국 여성의 현대 문명사를 창조한 첫 사람이기에 손색이 없다.
번역/편집: 이선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