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9 10:03:04 출처:cri
편집:李仙玉

[추근 편-3] 혁명에 몸을 던지다

(사진설명: 추근의 석상)

제3회 혁명에 몸을 던지다

소슬한 서재에서 <추부> 읊는데(蕭齎謝女吟<秋賦>)

처마에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瀟瀟滴檐剩)

지기는 만나기 어려운데(知己難逢)

세월은 살같이 흘러(年光似瞬)

귀밑머리 많이 성기누나(雙飄零如許)

우수에 젖어 말도 못하고(愁情訴)

날은 저물었는데 갈 길은 멀어(算日暮途)

이 몸 홀로 서글프도다(此身獨苦)

이 쓸쓸한 세상에(世界凄凉)

외롭고 쓸쓸한 여인이 태어나(可憐生個凄凉女)

말하노라(曰)

돌아갈지어다(歸也)

어디로(歸何處)?

홀연 머리 돌리니(猛回頭)

조국은 여전히 잠만 자누나(祖國眠如故)

외적은 나라를 욕보이고(外侮侵陵)

나라 안은 썩어빠졌는데(內容腐敗)

바로 잡을 영웅이 없으니(沒個英雄作主)

하늘이여 눈이 멀었구나(天乎太)!

이렇게 아름다운 강산이(看如此江山)

오랑캐의 손에 든 것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忍歸胡虜)

콩을 쪼개고 오이 가르듯(豆剖瓜分)

모두 내 고향 땅을 나누노라(都爲吾故土).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눈물이 흩날렸다. 추근은 갑판에 서서 손을 흔들어 3년간 가까이 공부한 일본과 이별했다. 그리고 바다 서쪽에 있는 고국을 향해 저도 모르게 큰 목소리로 <여차강산(如此江山)>을 즉흥적으로 지어 읊었다.

추근은 이번에 몇 천 명의 중국 유학생들과 함께 귀국했다. 그들은 청 왕조와 결탁해 발표한 일본정부의 ‘단속규칙’에 항의하기 위해 단체귀국을 단행했던 것이다. 추근과 다른 중국 유학생들은 단체로 수업을 듣지 않는 것으로 중국 유학생들에 대한 ‘단속 규칙’폐지를 요구했다. 하지만 주 일본 중국 공사가 지지하지 않아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곧 ‘귀국운동’을 벌여 단체로 귀국할 것을 모든 중국 유학생들에게 호소했던 것이다.

여기서 ‘단속규칙’은 도대체 왜 생기고 어떤 내용들을 망라하는지 알아보자. 손문(孫文) 선생이 일본에서 동맹회(同盟會)를 설립하고 추근을 비롯한 일부 유학생들이 분분히 그 동맹회에 참가하면서 동맹회는 청 왕조를 반대하는 혁명세력으로 부상했다. 강한 혁명의 기운을 느낀 청 왕조 주 일본 공사는 점차 세차게 타오르는 이 혁명의 불길을 끄기 위해 중국 유학생들에게 압력을 가할 것을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 그리하여 일본 정부는 <국·사립학교가 청나라 유학생을 받아 들이는데 관한 규정>을 발표했다. 15개 조항으로 구성된 이 <규정>은 유학생들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했다. 예를 들어 제1조는 유학생들은 반드시 청나라 공사의 소개장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했으며 제9조는 유학생들이 학교를 떠나 임의로 건물을 임대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제10조는 다른 학교에서 퇴학당한 유학생은 받아 들이지 못한다고 규정했다.

추근은 이런 ‘단속규칙’에 항의하기 위해 단체 귀국을 호소하는 리더 중 한 명이었다. 다른 한 리더는 바로 <경세종(警世鐘)>으로 혁명의 길에 오르도록 추근을 인도한 진천화(陳天華)였다. 진천화는 당시 엄청난 압력으로 신경이 쇠약해져 긴 절명서(絶命書)를 남기고 바다에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후에 주은래(周恩來) 중국 초대 총리가 <큰 강에서 노래 멈추고 동쪽으로 향하니(大江歌罢掉頭東)>에서 쓴 ‘벽 마주한 십 년 벽을 부수고 날아 오르기를(面壁十年圖破壁) 꿈 이루지 못하고 바다에 몸 던져도 영웅이라(難酬蹈海亦英雄)’의 영웅이 바로 진천화이다.

당시 국비로 일본 유학 중이던 노신(魯迅)과 허수상(許壽裳) 등은 학업을 마치지 못했기에 귀국을 희망하지 않았다. 그러자 추근은 한 고향 출신의 정도 보지 않고 유학생관에서 있은 진천화 추도회에서 몸에 지닌 단도를 뽑아 들고 격분해서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주수인(周樹人, 노신은 주수인의 필명임)과 서수상에게 사형을 언도한다! 만청(滿淸)의 횡포에 항복하여 벗을 팔아 영달을 구하며 한인(漢人)을 억압하는 자들은 내 칼을 받으라!”

말을 마친 추근은 칼로 목을 베는 과장된 동작을 했다. 이런 상징적인 동작에 당시 성숙된 사상을 가지고 있던 노신은 추근을 유치하고 급진적이며 앞뒤를 가리지 않는 천진한 아이로 보았다. 그래서 노신은 추근의 언행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슬픈 미소만 띄웠다.

귀국선의 갑판에 선 추근은 비릿한 바닷바람이 눈물로 범벅이 된 자신의 얼굴을 마음대로 스쳐가게 내버려두었다. 이제 더는 일본으로 공부하러 가지 못하고, 이제 일본과는 영별이라는 생각을 하니 그녀의 머리 속에는 지난 과거가 영화의 장면처럼 줄지어 펼쳐졌다…

일본 동경(東京)의 청 왕조 유학생회관에 도착한 나는 먼저 입주 등록부터 했다. 나는 추규진(秋閨瑾)이라는 원명도, 남편이 있음을 보여주는 이름 왕추근(王秋瑾)도 쓰지 않고 그날부터 그냥 추근이라고 불렀으며 선경(璇卿)이라는 자(字)도 여자도 남자 못지 않다는 의미의 경웅(競雄)으로 바꾸었다. 그날부터 나는 독립적인 여자, 남자에 못지 않는 여자가 되었다.

나는 절강(浙江) 출신이고 남편은 호남(湖南) 출신이기에 나는 늘 두 성의 동향회(同鄕會) 행사에 참가했다. 일본에 와서 지식도 배우고 혁명도 선전해야 하는 나에게 있어서 사회활동은 아주 중요했다. 그래서 나는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매 주 마다 가지는 두 성 동향회의 정례회의에도 모두 참가했다. 연설은 아주 중요한 학습이자 중요한 활동이었다. 다행히 나는 날 때부터 말솜씨가 좋아서 이 장점을 잘 활용했다. 혁명을 선전하고 민중을 각성시키는 중요한 수단인 연설은 유학생들의 중시도 많이 받았다. 나는 호소력이 강한 연설로 많은 유학생들의 추대를 받아 금방 학생 리더가 되었다.

광복회(光復會)의 도성장(陶成章)은 광복회의 활동은 모두 비밀 활동이기에 여자가 참가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해 원래는 나를 광복회에 참가시키지 않았다. 내가 남장을 하고 검무를 추자 도성장은 이렇게 탄식했다.

참으로 남성 못지 않는 여성이구나!

그 후 도성장과 광복회의 다른 성원인 서석린(徐錫麟)의 천거로 나는 여름 방학 귀국 때 상해(上海)에서 광복회 가입 선서를 했다.

한족의 세상을 광복하고 산천을 다시 찾으며 나라 위해 몸을 바치고 공을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는 배에서 갑오해전(甲午海戰)이 벌어졌던 해역을 지나며 지난해 8월 황해(黃海)에서 일본의 연합 함대가 여순구(旅順口)에서 도주하는 러시아 함대를 격퇴하고 조선과 동북 3성의 철도 경영권을 탈취한 일을 기억에 떠올렸다. 참으로 나라의 수치이다! 그 때 나는 배에서 <황해의 배에서 일본 지인의 요구에 의해 시를 쓰고 일러 전쟁지도를 보다(黃海舟中日人索句幷見日俄戰爭地圖)>를 썼다.

머나먼 만리 길 구름 타고 갔다 또 오고(萬里乘雲去復來)

홀로 동해 넘나들며 봄 우레와 함께 하노라(只身東海挾春雷)

조국의 지도가 타국 땅 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忍看圖畵移顔色)

어이 금수강산 포화에 재가 되게 할 수 있으랴(肯使江山付劫灰)

탁주도 나라 위한 슬픈 눈물 거두지 못하노라(濁酒不銷憂國淚)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모두에 의지해야 하거늘(救時應仗出郡才)

십 만의 장사 목숨 바쳐 피 흘리더라도(抨將十萬頭)

뒤집어진 세상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해야 하리(須把乾坤力挽回)

후에 손문 선생이 일본에 와서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를 설립했다. 9월 4일 오전 나와 다른 여학생 넷은 동맹회 성원 송교인(宋敎仁)을 따라 황흥(黃興)의 집에 가서 손 선생을 만나 그의 가르침을 들었다. 중국에 반드시 새로운 정치체계를 형성할 것이라 믿은 손 선생의 말은 아주 고무적이었다. 그날 오후 나는 동맹회 성원 풍자유(馮自由)를 따라 동맹회 가입을 선서했다.

동맹인, 절강 산음(山陰) 추경웅은 만인(滿人)을 몰아내고 중화를 광복하며 민국을 건립하고 지권(地權)을 평준화하며 충성과 신용을 지키고 이 마음을 시종 지킬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달갑게 그 벌을 받기로 맹세한다.

엿새 후 나는 절강 분회 회장과 평의부(評議部) 평의원(評議員)으로 천거되었다

여기까지 추억한 추근은 또 이렇게 생각했다.

“이번에 귀국하면 혁명에 헌신해야 하는데 혁명에는 수시로 생명의 위험이 따른다. 반드시 자방과 이혼하고 왕씨 가문과 관계를 단절해야겠다. 그래야 자방과 두 아이가 연루되지 않을 것이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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