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추근의 석상)
競雄의 女협객 추근
그녀는 봉건예법을 무시하고 남녀평등을 창도하며 <중국여보>를 창간해 페미니즘을 제창했다. 그녀는 번개처럼 중국 여성의 머리 위에 펼쳐진 어두운 하늘을 갈랐으며 밤하늘에 울린 천둥처럼 천 년을 잠자던 중국 여성들을 깨웠다.
31살의 꽃 나이에 뜨거운 피를 중국 땅에 뿌린 그녀는 중국의 민주혁명을 위해 몸 바친 최초의 여성이다. 그녀가 바로 경웅(競雄)의 여 협객이자 근대 중국의 여성 영웅인 추근(秋瑾)이다.
추근은 8개국 연합군이 북경성을 유린하는 것을 보고 구국사업에 뛰어 들었으며 청(淸)의 봉건왕조를 전복하기 위한 봉기가 실패하자 체포되어 희생되었다.
경웅의 여 협객 추근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보자.
제1회 밝은 빛을 따르다
1900년 봄, 예와 다름 없이 제철을 따라 불어온 봄바람에 북경성(北京城)의 버드나무가 푸르게 단장했다. 아직 이른 봄인 북경성에 초연이 가득하고 도처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자희(慈禧) 태후는 벌써 시골 아낙네로 분장하고 광서(光緖)황제를 핍박해 함께 서안부(西安府)로 도주했다. 부패한 청의 군대는 아무런 전투력도 없었고 의화단(義和團)만이 부적을 믿고 맨 몸으로 총과 대포를 가진 8개국 연합군과 몸싸움을 벌였다. 40년 전의 비극이 재연된 북경성에서는 전각이 폐허가 되고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당시 추근의 남편 왕자방(王子芳)은 호부(戶部)에서 벼슬했다. 왕자방은 모친의 질환을 핑계로 조정에 말미를 내고 가족을 데리고 고향인 호남(湖南)으로 떠났다. 마차에 앉아 피 흘리며 신음하는 백성을 본 추근의 마음은 분노로 터질 듯 했다.
왕자방이 말했다.
“조정이 이홍장(李鴻章) 나리를 대표로 파견해 8개국 연합군과 강화를 논의하고 있소. 곧 상황이 좋아질 거요.”
“강화요? 아무리 논의해도 주권을 상실하고 국위가 실추되는 강화조약밖에 더 있겠어요? 배상금을 주고 땅을 할양하고 그런 것 외 다른 게 뭐가 있겠어요?”
추근의 말에 왕자방은 할 말을 잃었다. 추근이 탄식조로 말을 이었다.
“아버님께서는 왜 하필 그렇게 많은 돈으로 당신의 벼슬을 사신 거예요? 이런 썩어빠진 조정에서 은자 1만 량(兩, 1량=50g)을 탐관오리에게 주고 아무 일거리도 없는 한직 벼슬을 바꿔서 무슨 의미가 있어요?”
왕자방이 변명했다.
“호부주사(戶部主事)는 아주 중요한 관직이오. 한직이라니? 그리고 2년간 경성에서 벼슬을 했기에 조정이 나를 강소(江蘇) 후보도(候補道)로 파견하지 않았소?”
추근은 남편이 전근을 말하자 더는 이런 무료한 화제를 계속하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고 과거사를 떠올리며 깊은 사색에 빠졌다.
조정의 관리 임명은 주마간산 식이다. 그리하여 자자손손 관리를 해온 우리 추(秋)씨 가문도 잡풀처럼 이리 저리 떠돌며 천하를 집으로 삼았다. 우리는 절강(浙江) 산음(山陰) 출신인데 조부께서 복건(福建)에서 벼슬을 하시는 바람에 나는 복건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몇 년간 살았다. 그 후에 부친께서 호남(湖南)의 벼슬을 받으시는 바람에 나는 또 호남에서 몇 년간 살았다. 다행히 어머님께서 선비 가문의 재녀(才女)시라 나는 어릴 때부터 어머님의 가르침으로 책도 많이 읽고 시도 썼다. 지금 나는 시도 적지 않게 쓰고 이름도 다소 날렸다. 하지만 쓸모가 하나도 없다. 하나 남은 좋은 점이라면 이런 능력 덕분에 왕씨 가문에 시집을 온 것이라고나 할까.
자방의 조부님께서는 유명한 증국번(曾國藩) 나리의 의형제로 원래는 두부를 앗아 팔다가 후에 ‘상군(湘軍)’에서 장부를 관리하셨다. 상군이 태평천국(太平天國)을 평정한 후 왕씨 가문은 큰 돈을 벌어 몇 천 무(畝, 1무=666㎡)에 달하는 농경지를 샀다. 그리고 시아버님 대에 이르러 왕씨 가문은 전당포와 전장(錢庄), 찻집, 음식점을 가진 큰 부자가 되었다. 시아버님께서는 내가 재녀이고 외모도 단정하다는 말을 들으시고 증국번 나리의 손자를 보내 나의 친정 아버님께 나를 며느리로 맞이하겠다고 청혼하셨다고 한다. 당시 친정 아버님께서는 상향현(湘鄕縣) 리금국(厘金局)의 관직에 있으셨다. 혼인을 맺음에 서로 지위가 맞는 가문인지가 중요하고 결혼은 부모의 명령이나 중매쟁이의 말을 따른다. 그 때 친정 아버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
“왕씨 가문은 쌍봉현(雙峰縣)의 갑부이자 증국번 나리의 친척이기도 하다. 거기다가 자방은 풍채도 좋고 잘 생겼고 악려서원(岳䕻書院)에서 학문을 배웠다. 또 너보다 네 살이나 어리다. 그러니 이 혼인을 마다할 리 없다.”
그렇게 돼서 나는 19살에 자방과 결혼했다. 결혼 후에야 알았지만 부족함이 없는 집안에서 삼남으로 자란 자방은 좌절을 겪어 본적이 없고 아무런 경력도 없었으며 유치하기 그지 없었다. 그와 대화를 하면 늘 어처구니 없을 때가 많다. 그는 너무 어린애 같다. 하지만 그는 나를 아주 사랑해서 뭐든지 내 말을 따른다. 이 한 가지로 스스로를 위안할 수밖에 없다. 왕씨 가문의 전장이 상담(湘潭)에 있어서 우리는 평소 상담에 살고 가끔 쌍봉현 하엽향(荷葉鄕) 신충(神冲)의 본가로 간다. 제일 처음 신충에 갔을 때 시아버님께서 큰 잔치를 베푸셨는데 나는 <기인우(杞人忧)>을 읊어 좌중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유연의 전란은 언제나 끝날 것인가(幽燕烽火畿時收)
중외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들었네(聞道中洋戰未休)
별 방도 없어 나라 걱정에 속만 태우네(漆室空懷忧國恨)
머리 수건을 투구로 바꿀 수 없어(難將巾幗易兜䥐)
결혼 이듬해에 아들 원덕(沅德)이 태어났다. 그리고 시아버님께서는 거금을 들여 벼슬을 사서 자방에게 주려고 하셨다. 조정은 참으로 너무 가엽다. 대외로는 온갖 모욕을 다 받으며 주권 상실과 국위 실추의 조약을 체결해 배상금을 내느라 국고가 텅텅 비고 대내로는 그 텅 빈 국고를 채우기 위해 벼슬을 파는 황당무계한 방법을 생각했으니 말이다. 시아버님도 이해가 된다! 과거(科擧)시험은 원래 운이 따르는 일이니 시험을 보기보다 돈으로 벼슬을 사는 편이 훨씬 쉬웠으니 말이다. 아들에게 관직도 마련해주고 국고를 채우는 데도 도움이 되니 왜 그런 일을 마다하겠는가?
바로 이 때 무술변법(戊戌變法)이 실패하고 무술육군자(戊戌六君子)의 피가 경성을 물들였다. 나는 아픈 가슴을 안고 <상남신보(湘南新報)>와 <상보(湘報)>를 읽으며 변법 실패의 사연을 알아보았다. 또 북경 공부(工部) 도로국(道路局)에서 벼슬하는 큰 오빠 예장(譽章)에게 서신을 보내 북경의 실제 상황을 알려달라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천화(陳天華)의 <삼가 호남인들에게 알리는 글 (謹告湖南人書)>을 읽다가 누가 나에게 지혜를 불어 넣기라도 한 듯 나는 나라의 전도와 운명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진천화는 자신은 ‘유신파(維新派)들의 군주입헌(君主立憲)을 반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만(滿)족의 정부를 부수고 민족의 독립과 공화제(共和制)를 실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에 한(漢)족인이 그렇게 많은데 왜 열강들의 유린을 당하며, 왜 인구가 그렇게 적은 만족인의 지배를 받는가’라고 질문한 후 그것은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변혁하면 죽는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라고 그 답을 제시했다. 진천화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중국이 멸망에로 나가는 근본적인 원인이며 사람마다 현실에 만족하고 압력을 참고 견디는 사상이 중국인들의 의지를 갉아먹었다’고 말했다.
나를 가장 흥분하게 한 말은 바로 ‘과거 프랑스가 영국에 참패해서 전 국민이 영국의 신하가 되었는데 한 여성이 분발하였기에 프랑스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는 구절이다. 나는 후에야 그 프랑스 여성이 바로 잔 다르크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참으로 위대하다!
나는 진천화의 견해에 전적으로 찬성한다. 이제부터는 청 왕조 전복을 위한 혁명에 미력하게나마 내 힘을 보태야겠다. 후에 시아버님께서는 과연 자방을 위해 호부주사라는 벼슬을 사셨다. 그래서 나는 자방과 함께 북경에 왔는데 국치를 경험하고 8개국 연합군이 북경을 유린하는 현장을 직접 보게 되었던 것이다. 확실히 썩어빠지고 무능한 이 만청(滿淸) 정부를 뒤집고 민주헌정제(民主憲政制)를 수립해야 한다…
여기까지 생각한 추근은 격동을 참을 수 없어 마차에 앉아 <감분(感憤)>을 읊었다.
끝없이 넓은 중원 나라의 몰락을 한탄하고(莽莽神州嘆陸沉)
시국 구할 방도 없이 살아 있음에 부끄러워라(救時無計愧偸生)
모래 뭉쳐 진에 망한 초나라 구하고(抟沙有愿興亡楚)
박랑사에서 철퇴로 진의 폭군 때리리(博浪舞椎擊暴秦)
나라 잃은 후에 미천하다 알지 말고(國破方知人種賤)
힘들고 가난해도 뜻은 하늘같이 높아라(義高不碍客囊貧)
혁명동지들에 보답할 길 없어(經營恨未酬同志)
검 잡고 슬픈 노래 부르며 우노라(把劍悲歌涕淚橫)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