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30 09:11:13 출처:cri
편집:李仙玉

[손문 편-3] 석방되어 세상에 알려지다

(사진설명: 손문의 동상)

제3회 체포 후 석방으로 세상에 알려지다

호놀룰루에서 출생한 손문(孫文)은 미국 대륙으로 가기 전에 먼저 호놀룰루로 갔다. 손문의 아내와 자식들을 이미 손미(孫眉)를 찾아 호놀룰루에 이르렀다. 호놀룰루에서 가족과 상봉한 손문은 며칠 후 미국 대륙에 가서 반청(反淸) 혁명을 선전할 준비를 했다.

때는 4월, 산과 바다가 하나가 된 호놀룰루는 온통 푸름으로 가득했다. 노란 백사장과 푸른 야자수, 만개한 온갖 꽃의 열대 경치는 유난히 아름다웠다. 꽃 향기 진동하는 호놀룰루의 거리를 걷던 손문은 갑자기 마주 오는 관광마차에 자신의 은사인 제임스 캔틀라인 내외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흥분한 손문은 풀쩍 뛰어 마차에 올랐다. 캔틀라인은 짧은 머리에 수염을 기르고 양복을 입은 손문을 알아보지 못했다. 손문은 어리둥절한 캔틀라인을 바라보며 기쁜 어조로 외쳤다.

“선생님, 저는 손문입니다!”

캔틀라인 내외는 영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와이를 경유하면서 관광차 잠깐 호놀룰루에 올랐다가 손문을 만났던 것이다. 과거 손문이 홍콩에서 서의(西醫) 대학을 다닐 때 캔틀라인은 영어를 가르쳤다. 손문은 호놀룰루에서 5년간 학교를 다니며 쌓은 언어실력으로 수석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한 캔틀라인의 우수한 제자였다.

손문은 자신의 상황을 은사에게 설명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번 망명기회를 빌어 서구의 여러 나라들을 돌며 중국의 반청혁명을 위한 각 나라 화교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려고 합니다! 그 첫 번째 나라가 바로 화교가 가장 많은 미국대륙이고 그 후 영국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 때 은사님을 찾아뵙겠습니다!”

캔틀라인이 반가운 어조로 대답했다.

“영국에서 자네를 기다리겠네!”

손문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반청 혁명을 선전했으나 그를 지지하는 화교가 많지 않았다. 그들은 손문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선전효과가 좋지 않자 손문은 미국에서 3개월만 머문 후 배를 타고 영국으로 갔다. 손문은 영국에서 은사인 캔틀라인과 만나 그의 자택에서 멀지 않은 여관에 거처를 정했다.

첫 주에 손문은 대영박물관을 견학하고 섭정공원을 돌아보고 상점과 거리를 거닐었다. 손문은 법치사회 정경과 유구한 영국문화가 영국인들의 일상에 스며든 것을 보며 그것을 감상하고 그것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때부터 청 정부의 밀정이 몰래 그를 미행해 영국 런던까지 왔다는 것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손문은 청 정부가 거금을 현상금으로 내 건 지명수배자의 신분으로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때 청 정부 영사관에 가서 반청혁명의 이치를 선전했다. 당시 영사관 직원들은 감히 손문을 체포하지는 못하고 사람을 파견해 그를 미행했던 것이다. 영국에 이른 손문은 또 다시 청 정부의 공사관에 갔다가 체포되었다. 공사관 관원은 청 정부의 지시에 따라 7천 파운드로 선박을 임대해서 손문을 비밀리에 귀국시키려고 준비했다.

궁지에 몰린 손문은 공사관의 현지 직원인 칼의 도움을 받았다. 칼이 손문의 편지를 캔틀라인의 집에 전달했던 것이다. 손문의 편지를 받은 캔틀라인은 즉시 탐정을 파견해 청 정부 주 영국 공사관을 감시하는 한편 사건의 경위를 자세하게 적어서 영국외교부와 경찰에 보냈다. 그리고 또 사건을 <타임즈> 신문에도 흘렸으나 아쉽게도 <타임즈>는 제때에 이 특종기사를 싣지 않았다. 신고를 받은 런던 경시청은 선박회사를 조사해 청 정부 공사관이 7천 파운드로 2천 톤 급의 선박을 임대해 손문을 중국으로 이송할 준비를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신고내용이 확인되자 경찰측은 이 사건을 수리했다.

이와 동시에 서신을 받은 영국 외교부도 영국 총리에게 상황을 보고했고 총리는 이 사건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이 때 <지구보> 기자가 캔틀라인을 인터뷰하고 나서 ‘혁명가, 런던에서 유인·체포되다’라는 제목으로 손문의 런던 납치기를 대서특필했다. <지구보> 석간지가 출간되자 전 영국이 들썩했다. 손문의 운명은 영국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손문에 관한 기사는 영국 전체가 주목하는 특대 뉴스가 되었다.

런던의 여러 신문사 기자들이 분분히 캔틀라인의 집이나 여관으로 취재를 가기도 하고 일부는 청 정부 공사관에 가서 손문 석방을 요구하기도 했다.

한 기자는 런던역 미란테 여관에 몸을 숨긴, 손문의 체포를 기획한 청 정부 공사관 관원 매카트니 홀리데이를 찾아내서 그의 입을 통해 손문이 확실히 공사관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길거리의 신문사 광고판에는 즉시 커다란 글자로 중국인 혁명가가 난을 당했다는 소식이 올랐다. 런던 전 도시에 파문이 일었다. 많은 사람들이 청의 공사관 문 앞에 가서 시위하며 ‘중국인 혁명가를 석방하라!’고 외쳤다.

캔틀라인은 또 고등법원에 인권보호명령을 신청했고 법원은 이 청구를 총리에게 전달했다. 외교차장이 총리의 명의로 강경한 언사로 구성된, 손문의 석방을 요구하는 각서를 작성해서 청 정부 공사관에 보냈다.

청 정부 공사관은 영국정부의 압력에 손문을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손문과 은사 캔틀라인은 집에 돌아오자 시도 때도 없이 찾아 오는 기자들을 만나야 했다. 언론의 엄청난 역할을 느낀 손문은 언론자유에 충심으로 되는 감탄을 표시하고 전제제도 타도와 공화제 구축에 대한 자신감을 더욱 다졌다. 또한 이로 인해 그는 중국의 문명과 진보를 추진하는 혁명운동에 더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세계 여러 나라들이 손문에 관한 영국 신문의 기사와 논설을 게재했고 중국의 <만국공보(萬國公報)>와 <시무보(時務報)>도 손문의 기사를 실었다. ‘손문’은 하루 아침에 청 정부의 폭정과 맞서 싸우는 영웅의 본보기와 사회여론의 중심, 대중이 주목하는 대상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캔틀라인의 경제적 후원으로 손문의 <런던 납치기>가 출간되어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로 인해 ‘손문’은 온 세상에 명성을 떨쳤고 중국의 반청운동은 세계 여론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유럽에서 2년간 머무는 동안 손문은 주로 런던의 대영도서관에서 지냈다. 주된 업무가 반청혁명 선전이었던 그는 책을 읽으며 중국의 전도를 사고했던 것이다.

그의 삼민주의(三民主義) 사상도 바로 이 때 형성되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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