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손문의 동상)
제4회 민주사회의 기반을 마련하다
유럽을 떠나 일본으로 온 손문(孫文)은 강유위(康有爲)와의 협력을 시도했으나 혁명목표가 서로 다른 관계로 성공하지 못했으며 이홍장(李鴻章)의 독립을 설득했으나 가치관의 상이함으로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능력자는 기회를 만나기 마련이다. 손문은 1905년 호남(湖南) 출신의 중국 유학생 황흥(黃興)을 만났다. 두 사람은 만나자 의기투합해 첫 만남에서 두 시간 넘게 교류했다. 같은 목표와 같은 관념을 가진 두 사람은 모두 전국의 반청운동을 지도할 새로운 큰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여겼다.
1905년 7월 30일 오후, 도쿄의 중국인 혁명가 70여명이 모임을 가졌다. 당시 청 정부의 행정구역은 18개 성(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모임에는 감숙(甘肅) 성을 제외한 전국 17개 성이 모두 대표를 파견했다. 바로 이 모임에서 ‘달로(韃虜) 제거와 중화 회복, 민국 창립, 지권(地權) 평준’을 취지로 한 전국적인 혁명조직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를 결성했다.
손문은 이렇게 말했다.
“혁명당의 취지는 만족 정부 타도에만 몰입하지 말고 전제 군주제의 폐지와 공화창조를 동행해야 할 것입니다.”
모두의 열띤 토론이 끝난 후 손문이 격동된 심정으로 대표들과 악수를 하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쿵~하는 굉음이 울려왔다. 천둥이 우는 듯, 큰 파도인 듯한 굉음에 대지가 부르르 떨고 사람들이 흠칫했다. 모두가 놀라서 멍하니 있는데 누군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홀 뒤의 바닥이 내려앉았습니다.”
그 말에 손문이 즉시 대꾸했다.
“이는 만청 정부가 전복될 조짐이니 우리 모두 기뻐할 일입니다!”
그러자 모두가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올렸다.
8월 11일, 청 나라 유학생 회관에서 하얀 양복차림의 손문은 1,300여명의 중국인 유학생을 상대로 <중국은 공화국을 세워야 한다>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의기양양한 손문은 네 시간 동안 도도하게 웅변을 토했다.
유학생들의 혁명 격정이 화산처럼 폭발했다. 8월 20일, 중국동맹회가 결성되었다. 후에 손문은 <건국방략(建國方略)>에서 “이로부터 혁명의 폭풍은 일사천리로 발전했고 그 빠른 속도는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했다”고 적었다.
손문은 회원들에 의해 총리(總理)로 선출되었다.
1905년, 손문은 동맹회 기관지인 <민보(民報)> 창간호에 <발간사(發刊詞)>를 싣고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처음으로 공개했다. 하지만 그는 발간사에서는 삼민주의 정수를 해석하지 않고 그로부터 1년 후에야 <삼민주의와 중국민족의 전도>라는 연설에서 자신의 건국사상을 체계적으로 천명했다.
동맹회 결성부터 1910년까지 사이에 손문은 10회에 걸친 봉기를 지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럼에도 손문은 시종 변함이 없는 혁명이상으로 여전히 불요불굴의 정신으로 봉기를 계획하고 실천했다. 그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봉기가 실패할 때마다 그 봉기의 거대한 영향력을 보았고 봉기가 번마다 장족의 발전을 이룬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의 이런 완강한 정신은 지금도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하지만 동맹회에 내분이 일어나 손문은 비분을 느꼈다. 동맹회 성원들인 장태염(章太炎)과 도성장(陶成章)이 공개적으로 손문과 정면 충돌을 일으키면서 손문이 일본인들의 뇌물을 받고 기부금을 횡령했으며 HSBC 은행에 20만의 거금을 저축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또 손문의 형님인 손미(孫眉)가 손씨 가문을 데리고 홍콩에 정착해 건물을 짓고 농장을 샀는데 그 자금이 바로 손문이 제공한 것이라고 말했다.
손문은 마음이 너무 아팠다. 손미는 원래 호놀룰루에서 목장을 경영하는 현지 화교들 중 갑부였다. 하지만 동생의 혁명운동을 위해 그는 모든 저축을 흥중회에 기부했으며 후에는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흥중회를 후원했다. 마지막에 대출을 상환하지 못해 결국 부동산이 경매에 들어가고 가산이 전부 처분되었다. 그리고 당시 손문이 지명수배자가 되는 바람에 손문의 모친과 아내, 아이들이 모두 호놀룰루로 손미를 찾아갔다. 파산한 손미는 그들을 데리고 홍콩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홍콩에서 그들은 누추한 방에 기거하고 손미는 자신이 일하는 농장에 초가집을 지어놓고 그 곳에 살았다. 미국 국적자인 중국인 손미는 중국의 공화혁명을 위해 가산을 다 턴 것이었다. 다만 후에 홍콩에 이주한 그는 귀국 교포로 신분이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니 장태염 등의 날조에 전제 군주제의 타도와 공화건설의 이상을 위해 형제와 가문 전체가 큰 대가를 치른 손문의 가슴이 어찌 아프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때로부터 백 년이 넘어 흘렀다. 해외의 중국인들은 중국의 공화혁명을 위한 손미의 대공무사한 기여를 잊지 않았다. 후에 화교와 중국인들은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호놀룰루에 손미의 동상을 세웠다.
1911년 4월, 광주(廣州) 봉기가 또 실패했다. 하지만 반 년 후 무창(武昌) 봉기가 성공했다. 무창봉기는 손문과 무관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이는 아주 유치한 견해이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떡을 먹는데 열 한 번째 떡을 먹은 후에 배가 불렀다고 해서 그 전에 먹은 열 개의 떡이 아무런 공로도 세우지 못했다고 말 할 수 있겠는가? 또 손문이 십여 년에 걸쳐 불굴의 투쟁을 벌이지 않고 실패한 그 열 한 번의 봉기가 없었더라면 무창봉기가 일어났겠는가? 중국에서 무창봉기 하나로 수천 년간 이어져 내려온 전제 군주제를 전복하고 공화로 나아갈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바로 중화민국 건국에 앞서 중국의 혁명파들이 미국에 있는 손문을 임시 대통총으로 중국에 불러 들인 이유이리라. 중국 봉건 전제 군주제를 끝장내고 중화민국을 건국한 손문의 위대한 업적은 천추만대 길이 전해지며 일월과 함께 영원히 빛을 뿌린다!
1925년 손문은 59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그가 후세 사람들에게 남긴 <총리유서>에서 가장 유명한 말은 바로 ‘혁명이 아직 성공하지 못했으니 동지들은 계속 노력해야 한다’는 구절이다.
오늘날 흘러간 백 년을 돌아보면 위인의 이 말은 여전히 참으로 심오하다!
번역/편집: 이선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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