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30 08:53:30 출처:cri
편집:李仙玉

[손문 편-1] 혁명의 길에 오르다

(사진설명: 손문의 입상)

민주혁명의 선구자 손문

청(淸) 정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그는 영국으로 망명했으나 영국 주재 청 공사관에 체포되었다. 그런데 이 위급한 순간에 나타난 한 외국인으로 인해 상황이 역전되었으며 그는 일약 전 세계적으로 주목 받는 중국인 혁명가가 되었다.

그가 바로 근대 중국 민주혁명의 선구자이자 중화민국의 아버지이며 중국국민당의 창시자인 손문(孫文)이다. 군주 전제제도를 반대하고 공화제를 창도한 손문은 중국의 군주 전제제도를 끝장내고 아시아 최초의 공화제 국가인 중화민국을 세웠다.

손문이 후세에 남긴 유서 중 가장 유명한 말은 바로 그의 완강한 혁명적 의지를 보여주는 ‘혁명이 아직 성공하지 못했으니 동지들은 계속 노력해야 한다’이다.

민주혁명의 선구자 손문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보자.

제1회 의사 가운을 벗고 혁명의 길에 오르다

손문은 홍콩 서의(西醫)대학을 졸업하고 먼저 마카오 인제당(仁濟堂) 근처에 중서의(中西醫) 약국을 차리고 개인 진료를 하다가 후에는 광주(廣州)에서 동서(東西)약국을 차려 경영도 잘 하고 의사로서의 명성도 떨쳤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약국을 그만 두려고 했다. 그 날 저녁 식사를 하면서 손문은 진수분(陳粹芬)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한 사람이 진료실에서 이런 말을 했소. ‘정부는 국가대사를 민중들에게 하나도 알리지 않는다. 설령 국토를 다 팔아먹어도 우리는 모르고 심지어 우리를 팔아도 모른다’고 말이오. 참 맞는 말이오. 전에 호놀룰루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선생님에게 ‘무엇 때문에 중국의 황제는 천자(天子)이고 민중은 개미이냐’고 물은 적이 있소. 그랬더니 선생님께서는 ‘군주 전제제도를 시행하는 중국에서는 황제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셨소. 그 후 귀국하는 길에 입국심사대에서 재물을 빼앗고 백성을 유린하는 썩어 빠진 관리를 보았고 또 이런 전제(專制) 정치제도의 부패함을 보았소. 그 때 이런 제도는 반드시 타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 옛 사람들은 ‘최고의 의사는 나라를 고치고(上醫醫國) 중급 의사는 사람을 고치며(中醫醫人) 하급 의사는 병을 고친다(下醫醫病)’고 말하지 않았소. 나는 나라를 고치는 최고의 의사가 되고 싶소. 그러니 이 진료소를 계속 열 필요가 있겠소?”

진수분이 말했다.

“당신이 나라를 고치는 최고의 의사가 되는 것을 지지해요. 하지만 이 진료소도 계속 열어야 해요. 그래야 생계가 유지되고 신분을 엄호할 수 있죠.”

손문이 머리를 끄덕였다.

“당신 말에도 일리가 있소. 하지만 이제부터는 더 많은 시간을 혁명운동에 쓸 테니 진료를 볼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을 거요. 내일 저녁 몇 사람을 집에 불러 회의를 해야겠소. 내가 생각한 슬로건을 알려주어야겠소.”

“알았어요. 저는 야참을 준비할게요.”

손씨가문의 족보에서 진수분은 손문의 정실인 노모정(盧慕貞)의 다음 순서, 후처인 송경령(宋慶齡)의 앞 순서에 첩실로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중화민국 건국 전의 십여 년 동안 군주 전제제도를 타도하기 위해 손문과 함께 생사를 넘나든 손문의 혁명적 반려자이다. 싱가폴의 한 중국인은 손문기념관에 손문과 진수분의 기념사진을 기증하고 한 화교는 진수분의 단독사진을 기증했다. 그들은 후세 사람들이 중국의 전제제도 멸망과 공화제 국가 건국을 위해 기울인 진수분의 기여를 잊지 말기를 희망한 것이다.

당시의 말로 하면 진수분은 손문의 첩실이고 지금 말로 하면 진수분은 손문의 홍안지기(紅顔知己)라 할 수 있다.  복건(福建) 출신의 그녀는 홍콩에서 태어나 남양(南洋)에서 자랐다. 손문이 홍콩에서 의대를 다닐 때부터 손수분은 손문과 함께 십여 년 동안 반청(反淸) 운동에 뛰어들어 온갖 고생을 다 하고 많은 공을 세웠다. 하지만 손문이 남경(南京)에 가서 중화민국 임시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자 그는 스스로 손문의 곁을 떠나 홀로 남양으로 돌아갔다.

본론으로 돌아오면 이튿날 저녁 정요신(程耀宸)과 정규광(程奎光), 육호동(陸皓東) 등이 손문의 집으로 왔다.

손문이 먼저 말했다.

“‘달로(韃虜)를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하며 합중(合衆) 정부를 세우자’는 슬로건을 생각했네. 이렇게 되면 우리의 행동 목표가 더 명확하게 되네.”

“좋은 슬로건이군. 우리가 만주인 황제를 몰아내자는 슬로건을 내걸면 반드시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네.”

손문의 말에 정요신이 먼저 말했다. 손문이 설명을 덧붙였다.

“과거 주원장(朱元璋)은 호로(胡虜)를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하자고 호소해서 사람들의 호응을 이끌어 냈으며 궁극적으로 원(元)을 멸망시키고 한인(漢人) 정권을 세우지 않았는가. 하지만 우리는 다르지. 우리는 황제가 없는 나라를 세울 것이니 말이네. 우리는 미국처럼 민중이 자신의 대통령을 선거하는 나라를 건국해야 하네.”

손문의 설명에 정규광이 말했다.

“만약 중국을 미국과 같은 나라로 만들 수 있다면 너무 좋은 일이네.”

“그럼. 정말 그렇게 된다면 우리 광동인들도 더는 바다 건너 남양이나 미국으로 가지 않고도 살길을 찾을 수 있겠네.”

육호동이 정규광의 말을 받았다. 그러자 정요신이 대꾸했다.

“바로 그 말이지. 손문 형, 형의 큰 형이 호놀룰루에서 돈을 벌지 않았더라면 형의 부모가 어찌 형을 의대에 보내서 의학석사로 키울 수 있었겠소? 만약 우리가 중국을 미국처럼 만들 수 있다면 이 목숨을 바친다 해도 그건 가치 있는 일이네.”

육호동이 화두를 바꾸었다.

“지금 정부에서는 이홍장(李鴻章)이 대권을 장악하고 있네. 이홍장은 한인이고 또 주원장과도 같은 고향이네. 그들은 다 안휘(安徽) 출신이지. 우리가 만약 그의 지지를 받을 수 있으면 피를 흘리지 않고도 중국을 개조할 수 있을 것이네.”

손문이 육호동의 말을 받았다.

“역시 안목이 있군. 나도 전부터 이 일을 생각했네. 우리 먼저 이홍장 대인(大人)에게 서신을 보내보세. 서신은 내가 쓰겠네. 이 대인이 우리 의견을 받아들이면 중국을 개조하는 일은 쉽게 될 것이네.”

정요신이 말을 이었다.

“손문 형이 쓴 <농공(農功)>은 정관응(鄭觀應)이 편찬한 ‘성세위언(盛世危言)’에 수록되었지. 이번에 이홍장에게 보내는 서신도 필히 후세에 길이 전해질 거네.”

때는 마침 설 밑이라 손문은 광동 향산(香山) 취정촌(翠亭村)의 본가로 돌아가 방문을 닫아 걸고 열 엿새 동안에 <이홍장에게 보내는 서신(上李鴻章書)>을 썼다. 만 자가 넘는 장문의 서신에서 손문은 양무파(洋務派)에 속하는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에게 서구 나라들이 강성한 근본적인 원인은 선박과 화포가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재능을 다 하고 땅이 최대의 이익을 내며 물건이 최대가치로 사용되고 화물이 원활하게 유통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중국을 제도적으로 개량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반드시 서구의 열강들을 초월할 수 있다고 설파했다.

손문은 실천가였다. 그는 문장의 마지막에 자신이 프랑스에 가서 양잠의 새로운 방법을 고찰할 수 있도록 후원해 주기를 이홍장에게 희망했다. 그는 중국의 가난한 지역에서 양잠업의 발전을 통해 탈빈곤을 실현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아아, 이 세계에서 최초로 누에를 키워 비단실을 뽑은 실크의 나라가 서구로부터 양잠의 새로운 방법을 배워야 하다니, 이런 정치제도를 바꾸지 않고 되겠는가?

손문과 육호동은 격정에 넘쳐 이홍장을 찾아 북상했다. 그 해는 1894년,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조선에서 ‘동학당’ 봉기가 일어나고 청 정부가 조선의 청에 따라 군사를 풀어 봉기를 진압했으며 일본이 그 기회에 조선 왕궁을 점령하고 괴뢰정권을 세운 후 청의 관군을 조선에서 몰아냈다. 중∙일 전쟁이 곧 발발할 상황이라 이홍장은 노대(蘆臺)에서 군사 훈련을 감독하느라 다른 일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는 손문과 만나지 않고 간단하게 한 마디로 대답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 봅시다.”

이홍장이 자신의 서신을 보지도 않자 손문은 우울한 기분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그는 더는 정부의 개량에 기대를 걸지 않고 폭력적 혁명으로 만청(滿淸)의 군주 전제제도를 전복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의사 가운을 벗어 던지고 호놀룰루에 가서 흥중회(興中會)를 설립한 후 모금을 통해 무기를 구매하고 무장봉기를 준비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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