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30 09:00:19 출처:cri
편집:李仙玉

[손문 편-2] 봉기실패로 해외로 망명하다

(사진설명: 손문의 좌상)

제2회 봉기가 실패해 해외로 망명하다

갑오해전(甲午海戰)에서 청(淸) 정부는 완패했다. 여순(旅順)과 위해(威海)가 점령되고 북경(北京)과 천진(天津)이 위태로웠다. 전 국민이 분노하고 원망이 들끓었으며 청 정부가 흔들렸다. 송요여(宋耀如)는 호놀룰루에 있는 절친 손문(孫文)에서 서신을 보내 반청(反淸)의 좋은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빨리 귀국하라고 권고했다. 당시 손문은 호놀룰루에서 현지의 화교 20여명을 동원해 호놀룰루 흥중회(興中會)를 설립했으며 큰 형님인 손미(孫眉)의 대폭적인 후원도 받아냈다. 손미는 자금을 많이 기부했으며 또 다른 화교들도 동원해 혁명에 기부금을 내게 했다.

1895년 1월, 손문은 홍콩으로 돌아와 그 해 3월 홍콩 흥중회를 설립했다. 양소운(楊衢雲)과 사찬태(謝纘泰), 정사량(鄭士良), 육호동(陸皓東), 진소백(陳少白) 등 49명이 홍콩 흥중회 회원이 되었다. 흥중회의 정관에는 “중국과 외국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세상에 도움이 되고자 하며 중국을 위해 진력(盡力)하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회원이 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는 호주에서 태어난 사찬태, 호놀룰루에서 태어난 손문과 일부 회원들이 국제관행에 따라 모두 외국 국적의 중국인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손문은 ‘화교는 중국혁명의 어머니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중국의 민주혁명은 확실히 해외 중국인들로부터 시작되고 해외 중국인들의 큰 지지를 받았다.

광동은 흥중회 회원들의 고향이다. 개항시간이 길고 대중들의 사상이 상대적으로 개방되었으며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반항심리를 가진 광주(廣州)는 지리적으로 경성과 멀리 떨어진 장점도 가지고 있었다. 손문이 제1차 무장봉기 장소를 광주로 정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봉기가 성공하면 즉시 광동(廣東)과 광서(廣西)의 독립을 선언하고 이 곳에 근거지를 세워 청 정부와 맞서며 그 후 점차 전과를 확대해 만청(滿淸)을 타도하고 독립한 성들을 연합해 미국과 같은 연방정부를 설립하려 했던 것이다.

광주봉기 준비회의에서 손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청 정권을 타도하고 민국(民國)을 세우기 위해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반드시 성공의 그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국기는 나라를 상징합니다. 봉기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만청의 황룡기를 대신할 우리의 국기가 있어야 합니다.”

손문은 국기 설계 건을 그림을 잘 그리는 육호동에게 맡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육호동은 국기의 초안을 그렸다. 남색 바탕의 장방형 깃발 중앙에 밝은 태양이 눈부신 빛을 뿌리는 그림이었다. 손문이 만족해서 머리를 끄덕였다.

“청천백일(靑天白日), 광명이 자유와 평등을 비춘다는 의미의 깃발이 웅장하면서 아름답네.”흥중회 간부들은 육호동이 창작한 국기를 일치하게 채택하고 ‘양색기(兩色旗)’혹은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라 불렀다.

흥중회 성원들은 광주봉기의 세부적인 행동을 자세하게 논의한 후 봉기군을 세 갈래로 나누어 순덕(順德)과 향산(香山), 북강(北江)에서 출발해 광주에 모여 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10월 10일, 흥중회 주요 간부들이 홍콩 흥중회에서 봉기 성공 후의 대총통(大總統)인 ‘총판(總辦)’을 선거했다. 진소백은 손문이 둘도 없는 대총통이라고 인정했지만 사찬태가 반대했다. 사찬태가 전혀 체면을 보지 않고 말했다.

“성격이 무모한 손문은 개인의 명예를 위해 모험도 불사할 것입니다. 그는 이 세상에 그가 할 수 없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대포(大砲)입니다.”

'대포'란 큰 소리 치고 허풍을 떠는 사람을 뜻하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말이다. 반대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찬태 등의 반대가 있었지만 선거결과 손문이 대총통 인선으로 당선되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난 후 양소운이 갑자기 자신이 대통총이 되겠다고 요구했다. 사람들이 나무를 심기도 전에 열매부터 따려고 다투는 바람에 손문은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홍콩출신인 양소운이 흥중회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거금을 기부한 두 부자도 모두 양소운의 지지자이며 양소운이 봉기대원 모집과 무기구매 등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는 것을 감안해 손문은 양소운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이는 손문의 첫 번째 양위(讓位)이다. 뒷이야기지만 중화민국(中華民國) 건국 후 임시대통총이 된 손문은 몇 개월 후 또 한 번 대통령 자리를 원세개(袁世凱)에게 양보했다.

10월 26일, 봉기의 일자가 가까워지는데 홍콩에 있던 양소운이 홍콩의 ‘화물이 도착할 수 없다’는 전문을 보내왔다. 정예무기를 모두 이른바 총통 호위대에 남긴 양소운이 다른 대원들의 불만을 자아내 그의 지휘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자 홍콩에서 양소운의 활동이 탄로나서 순경이 광주총독(廣州總督)에게 전문을 보냈다. 그리고 흥중회의 또 다른 성원인 주기(朱淇)의 형님이 주기가 봉기를 위해 쓴 격문(檄文)과 민심을 안정시키는 고지서 초고를 보고 연루될 까봐 신고해버렸다. 결과 청 정부는 광주성에서 대규모 수색을 시작했다.

육호동은 더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는 것을 막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광주성에 들어가 회원명부를 소각하고 체포되었다. 그 후 육호동은 흥중회 성원 명단을 제공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다른 두 명의 성원인 구사(邱四), 주귀전(朱貴全)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리고 정규광은 고문을 받아 숨지고 정요신은 옥중에서 병사했다. 흥중회의 이 다섯 명은 중국의 공화 혁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최초의 열사들이다. 손문은 후에 자서전에서 육호동은 ‘유사이래 중국의 공화혁명을 위해 희생된 첫 사람’이라고 말했다.

손문은 사흘 후에야 진수분(陳粹芬)과 함께 홍콩으로 갔고 고향의 아내와 자식들에게 마카오로 피신하라고 알렸다. 청 정부가 현상금을 내걸고 손문 등 일곱 명을 지명수배하는 바람에 손문과 진수분은 또 일본으로 갔다. 그 후 손문은 홀몸으로 미국을 거쳐 영국으로 갔으며 진수분은 일본에 남았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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