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0-10-15 18:00:53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10월 15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10월 세 번 째 목요일의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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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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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5일은 국제 맹인의 날입니다. 1984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에서 세계맹인연맹 창립대회가 소집되었습니다. 이 대회는 해마다 10월 15일을 ‘국제 맹인의 날’로 확정했습니다. 이때부터 맹인은 국제적으로 처음 통일된 조직과 자기의 명절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앞서 맹인의 날은 고정된 날자가 없었습니다. 일부 유럽 국가의 맹인들은 늘 겨울철에 문예행사를 개최했으며 이 행사의 기념일을 ‘흰 지팡의 축제’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 축제는 맹인 축제의 최초의 형태였습니다.

1989년 9월 18일, 중국 장애인연합회는 통지문을 내려 보내고 각 지역에서 해마다 국제 맹인의 날에 성과 시 맹인 협회에서 현지의 상황에 따라 경축행사를 진행하고 맹인의 생활을 활약시키며 정부와 사회의 관심을 구현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세계보건기구의 집계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맹인은 4천만 내지 450만 명이 되며 시력이 낮은 사람은 맹인의 3배로 약 1억 4천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중국은 지난 세기 80년대에 시력 장애 상황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이 조사 결과에 따르면 중국의 시력 장애인은 약 1300만 명 되며 이 가운데서 맹인이 550만명, 시력이 낮은 사람이 약 750만명 됩니다. 중국에는 해마다 맹인이 약 45만 명이 출현한다고 하는데요, 다시 말하면 1분당 출현하는 맹인이 1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맹인들의 맹증(盲症)을 예방하고 치료하며 맹인의 복지를 높이고 맹인이 전적으로 평등하게 사회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세계맹인조직의 취지로 되고 있습니다.

 

2. 지명과 연변

계속하여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이런 제목으로 지명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옛날 연해주의 이주민이 정착했던 길림성 연변 도문의 지명 이야기입니다.

마패, 전마의 비석

이주초기 그들은 강 동쪽에서 온 집이라는 의미의 강동집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두만강 동쪽의 남부 연해주에서 건너왔기 때문이다. 마을사람들은 그곳을 강 동쪽이라고 말했지만 조부는 그냥 ‘아래 간도’라고 불렀다고 한다.

기실 조부는 ‘아래 간도’가 아닌 조선반도의 함경도 태생이었다. 그러나 맞은쪽의 연변 지역으로 오는데 그처럼 길고 굴곡적인 여정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최형록(1943년 출생) 씨가 전하는 가족사는 그가 말아 피우는 엽초의 독한 연기처럼 가슴에 찡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조부가 일가족을 거느리고 그곳 ‘아래 간도’를 떠날 때는 20세기 초였다. 그때 고모는 열여섯 살로 이제 막 피어나는 화려한 꽃처럼 미모가 절정이었다고 한다. 그게 오히려 조부의 큰 근심거리로 되었다. 그래서 조부는 딸을 시집을 보내는 셈치고‘아래 간도’의 조선인 마을에 떠맡기고 오게 되었다고 한다.

“마우재들이 곱게 생긴 여자들을 보면 마구잡이로 빼앗는다고 소문이 났던 거지요.”

마우재는 ‘毛子(mao―zhi)’라는 중국말을 음역한 것으로 구소련 군인들을 이르는 말이다. 그 요상한 이름 때문에 고모는 결국 그들 가족과 인연이 끊어진 강 저쪽의 사람으로 된 것이다. 그들 가족은 나중에 두만강 기슭의 마패(馬牌)에 이삿짐을 풀어놓았지만 가슴 아픈 그 기억을 도무지 지울 수 없었다.

지명지(地名志)의 기록에 따르면 마패촌은 광서(光緖) 7년인 1881

년 강 대안의 수구포(水口浦) 조선인들이 건너와서 개척한 마을이다. 마패촌은 이름 그대로 마패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라고 하지만 지명 유래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옛날 두만강 대안에는 총각 장수와 처녀 장수가 있었다고 한다. 언제인가 그들은 오랑캐와 싸우면서 이 고장까지 오게 되었다. 그때 총각 장수가 타던 전마(戰馬)가 그만 전투에서 지쳐 죽었다고 한다. 두 장수는 사선을 함께 드나들던 전마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겨 이곳에 전마를 묻고 비석을 세웠다. 훗날 비석 비(碑)자가 간판 패(牌)자로 전음(轉音) 되어 마패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마패는 예전에 관원이 지방으로 공무를 나갈 때 역마(役馬)를 동원하는데 쓰던 둥근 패쪽이었다는 설이 있다. 실제 지금의 마패촌 3대(隊, 촌민소조)의 남쪽에는 이 설을 뒷받침할 유적‘24개 돌’이 있다. 이 유적은 이름 그대로 24개의 돌을 이르는데 옛날 발해국에만 있었던 독특한 건축양식이라고 한다.

최형록 씨의 말에 따르면 24개의 돌은 예전에 깨지거나 들쭉날쭉하지 않고 모양새가 엇비슷했다.

“강 건너 쪽에서 갖고 온 돌이라고 하던데요. 이 고장에는 없는 재질이니까요.”

그때 24개 돌은 한 줄에 8개씩 저마다 약 1m의 거리를 두고 세 줄로 질서정연하게 배열되고 있었다. 이런 돌은 마구 찢긴 종잇장처럼 한때 심하게 훼손되었다. 일부는 누군가 집을 짓는 석재로 사용했고 지어 아낙네들의 빨래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나마 몇 개 남지 않은 돌들마저 제자리에 있지 않았다. 돌이 있던 자리는 배추나 파를 심는 밭이 되었다.

지난 세기 80년대 말 비로소 원래의 돌들을 원래의 자리에 모아서 가까스로 원상을 흉내 내고 있었다.

“제사를 지내는 장소라고 들었는데요, 정말 그렇습니까?” 최형록 씨는 마을 노인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하면서 이렇게 반문한다.

마을의 토박이인 그 역시 마을에 구전되는 이 해석에는 그리 미덥지 않다는 기색이었다.

사실 이런 유적은 마패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여러 지역에서 무려 십여 개나 발견되고 있다. ‘24개 돌’ 유적은 사찰이나 곡물창고라는 다양한 설이 난무하지만 모두 교통로에 위치하며 또 유적의 모양이나 사용한 재료 등으로 미뤄 역참이라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정말 역참이라면 발해국의 관원들이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날 법 한다. 그렇게 생긴 지명이 그때 강 건너 수구포에 전해졌다가 간민(墾民)들을 따라 다시 제자리에 돌아왔을 수 있다. 장수와 전마의 이야기는 훗날 민간에서 마패라는 지명을 두고 생겨난 전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전설에 등장하는 전마는 분명 이 고장에 다시 나타나고 있었다. 오랑캐와 싸우던 장수의 이야기가 두만강 기슭에 영화처럼 재현되었던 것이다.

1920년 홍범도(洪範圖) 장군 등이 인솔한 독립군이 일본군의 대대병력을 대파한 봉오동전투는 바로 이 마패촌에 도화선을 묻고 있다. 봉오동전투는 청산리전투와 더불어 우리민족의 독립사에서 가장 빛나는 전과이다.

봉오동전투는 발생 사흘 전 즉 1920년 6월4일에 있었던 삼툰자 전투에서 비롯된다.

삼툰자는 우리말로는 세 동네라는 의미로 오늘의 마패촌 7대이다. 19세기 중반, 함경북도 삼봉일대에서 월강한 김 씨, 박 씨, 최 씨 성의 세 일가가 이곳의 첫 개척자였다고 한다. 그 후 한 가구 두 가구 차츰 늘어나면서 나중에 상촌, 중촌, 하촌 등 세 동네를 이뤘던 것이다.

삼툰자는 강이 흐르는 협곡 사이에 위치한다. 따라서 우리말로 또 ‘사이 벌’이라고 불리며 중국말로 옮기면서 또 ‘간평(間坪)’이라고 불린다. 사이 벌은 함경도 사투리로 와전되면서 또 ‘새불’이라고 불리기도 했단다.

바로 4일 새벽 독립군 소부대가 국내 진공작전으로 삼툰자에서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 강양동으로 가서 일본군 순찰소대를 습격했던 것이다. 이때 일본군 2개 중대가 이를 보복하려고 독립군 추격에 나선다. 그들은 나중에 삼툰자에 이르렀으나 독립군을 발견하지 못하자 애꿎은 민간인을 무차별 살육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독립군은 삼툰자 부근의 범진령 산기슭에 매복하고 있다가 돌아가는 일본군을 섬멸한다.

이에 일본군이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월강 추격대대를 편성하고 두만강을 건너 봉오동으로 진격하며 이로써 세상에 이름을 날린 봉오동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이때 매복전이 벌어졌던 범진령은 두만강 기슭에서 회막골(도문)에 이르는 고개이다. 마패에서 회막골에 이르는 골짜기는 도합 네 개 있는데 범진령은 제일 북쪽의 골짜기를 타고 있다.

범진령이라는 이 이름이 파다히 알려진 건 단지 독립군의 매복전 때문이 아니다. 범진령에는 또 전설 아닌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다.

예전에 마패에는 명포수로 알려진 김 씨 성의 포수가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김포수는 산에 올랐다가 바위 아래에서 먹잇감을 놓고 희롱하는 범을 발견했다. 김포수가 총을 쏘아 범을 잡고 난 뒤 보니 그 먹잇감은 놀랍게도 혼절한 웬 처녀였다. 처녀는 한참 후에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알아보니 처녀는 강 맞은쪽 함경북도의 어느 산골에서 살고 있었다. 그날 새벽에 밖에 소변을 보러 나왔다가 그만 범에게 물려왔다고 했다. 그때 범은 이처럼 강 건너 멀리까지 사냥을 다녔던 것이다.

그 후 처녀는 김포수의 집을 드나들면서 ‘큰집’으로 삼았다. 그들은 지난 세기 60년대 중반까지 왕래를 하다가 중국에서 극좌운동인‘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내왕이 끊겼다고 한다.

현지에서 전하는 이 이야기는 판본이 여럿 되지만 모두 범이 소굴 범진령에 물고 온 함경도의 처녀를 마패 마을의 포수가 구했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범진령은 이토록 범이 진(陳)을 치고 있기로 소문이 높다는 의미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범이 출몰하고 있는 산이라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범도 맥이 진하게 넘는 고개라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어쨌거나 범진령은 또 노래까지 생겨나 더구나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지난 세기 70년대 삼툰자에는 여느 농촌마을처럼 하향 지식청년들이 진주(進駐)하고 있었다. 하향 지식청년은 지난 세기 50년대부터 70년대 말까지 중국에서 자원 혹은 부득불 도시에서 농촌에 내려가 농민으로 된 청년들을 말한다. 그들은 대부분 초중이나 고중 교육밖에 받지 못했는데 약 150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그때 삼툰자의 하향 지식청년들은 노래 “여량 수레 령(嶺) 넘어가네.”를 노상 입에 달고 다녔다고 한다. 이 노래는 1964년 연변예술학교 학생들이 여량 수레를 몰고 범진령 고개를 넘으면서 만든 작품이다. 듣기에 따라 곡조가 흥겨울지 몰라도 거기에는 시골에 잡초처럼 묻힌 꽃다운 청춘들의 모습이 아련하게 비껴있다.

“범진령 십리 고개 청줄 마대 박아 싣고

여량 수레 줄을 지어 흥겹게 령 넘어가네.

…”

잠깐, 여량 수레라고 하니 누군가 이상하게 여길지 모르겠다. “국어사전”의 해석에 따른다면 여량은 수레나 말이 다닐 수 있는 나무다리 ‘여량(輿梁)’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변에서는 이와는 달리 여유 식량이라는 의미의 ‘여량(餘糧)’을 뜻한다. 중국말 그대로 옮겨 놓았기 때문에 얼토당토않은 결과가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범진령 역시 중국말로 지명을 옮겨 적으면서 난데없는 번진령(翻進嶺)으로 둔갑하였다. 졸지에 뭔가 뒤집히면서 들어가는 이상한 고개로 된 것이다. 이처럼 더는 시초의 범의 고개가 아니어서 그럴지 모른다. 범진령의 고개에는 범의 포효소리가 다시 들리지 않고 있었다.

범진령의 “범이 처녀를 물고 왔던 이야기”도 마패의 ‘전마의 비석’처럼 언제인가는 한낱 전설로 전해지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한다.*

 

네, 연변의 지명과 이 지명에 깃든 이야기이었습니다. 노래 한곡 듣고 다음 코너로 이어가겠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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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이달에는 지명과 관련한 퀴즈를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연변 용정의 명동마을은 학교로 유명세를 탔던 마을인데요, 이 ‘명동마을’은 무슨 뜻으로 지어진 이름일까요.

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명동마을’은‘ 무슨 뜻으로 지어진 이름일까요.

네, 지난 주에 길림성 연길시의 박철원 청취자가 이 퀴즈의 정답과 함께 아래와 같은 글을 보내왔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룡정의 명동학교는 민족의식 교양으로 인재를 양성하는데 취지를 두었기에 그 후 많은 반일투사와 민족지사들이 나타난 유서 깊은 곳이다.

<서시비>가 맞아주는 윤동주 생가마을에 새로 복원된 명동학교에는 전시물이 잘 차려져 있다.

룡정시문화관에서 사업했던 리광평선생은 옛날 명동마을과 명동학교를 세우며 구워냈던 <명동 (明东)> 두 글자가 새겨져있는 기와를 발굴,소장하고 있다. 그가 <명동기와>에 깃든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명동학교와 윤동주를 우리에게 잘 소개했다.

지금 명동촌은 명동학교와 윤동주생가로 유람객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고 있다.”

네, 10월의 이번 퀴즈풀이에 참여한 이들로는 박철원 청취자를 비롯하여 김봉숙 리해숙 조태산 허애자 리선자, 김봉선 김연옥 김희숙 박순자 박계옥 박인순 김순옥 리영자 이선자 리련옥 리종길 최화원 박경만 박종근 황순금 박상국 박범두 전영균 등 24명의 애청자입니다.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

: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프로편성에 진행에 박은옥(),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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