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0-10-27 16:54:10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0년 10월 22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10월 네 번 째 목요일의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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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월

MC:

10월 22일은 양력으로 1년 가운데 295일째 되는 날입니다. 올해가 끝 아직 70일 남았습니다.

1935년의 이날 중공중앙 정치국은 섬서성과 감숙성 소베트구의 오기진(吳起鎭)에서 확대회의를 소집하고 중국공농홍군 1방면군의 장정이 승리적으로 결속되었다고 선고했습니다.

2006년 10월 22일, 홍군의 장정 승리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대회가 열렸습니다. 호금도 주석은 회의에서 연설하고 홍군의 장정은 감동적인 전쟁의 역사적 시편을 엮었으며 위대한 장정 정신을 주조했다고 지적했습니다.

1978년 10월 22일부터 29일까지 등소평이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공화국이 창립된 후 중국 지도자는 이번에 처음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이번 성공적인 방문은 중국과 일본 양국 친선관계를 새로운 단계로 추진했으며 또 국외 선진적인 기술설비와 관리방법을 중국에 영입하여 현대화 건설의 발걸음을 빨렸으며 중국에 새로운 국면을 열어놓았습니다.

10월 22일은 또 세계 전통의약의 날입니다.

1991년 12월 22일, 42개 나라와 지역의 대표들은 베이징에서 소집된 국제전통의약대회에서 대회가 개막된 이날을 매년 세계전통의약의 날로 하기로 일치하게 합의하고 이 내용을 '베이징선언'에 기입했습니다.

10월 22일은 국제 말더듬이의 날이기도 합니다.

말더듬이에 대한 중시를 강화하기 위해 1997년 국제말더듬이협회 등 4개 기구는 해마다 10월 22일을 '국제 말더듬이의 날'로 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10월 네 번 째 주의 또 다른 명절 풍속을 말씀드린다면, 10월 20일은 세계 통계의 날과 세계 요리사의 날이기도 합니다.

2. 지명과 연변

계속하여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이런 제목으로 지명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옛날 호랑이가 국경을 드나들었던 두만강 기슭 마을의 지명 이야기입니다.

 

                      백년부락 호랑이의 마지막 전설

  그 지주는 진짜 재수에 옴이 붙었던 것 같다. 원한을 품은 농군들에게 물매를 맞은 후 골짜기에 버려졌지만 그길로 숨이 끊어진 게 아니었다. 그런데 상처의 아픔을 참다못해 움찔하다가 그만 농군들의 눈에 띄었고 다시 몽둥이찜질을 당했던 것이다.

  “정말 기차게 운이 없는 놈이었던가 보지요.” 기씨 성의 농부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한심하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나중에 지주가 주검으로 묻힌 골짜기는 ‘재수골’이라고 불렸다. 지주의 이름이 하필이면 재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참으로 지주가 땅 밑에서 억장이 터진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일이다.

  기씨는 어릴 때 이 고장으로 이사를 왔다. 그때 동네노인들은 한데 모여 앉으면 늘 마을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담배연기와 함께 구수하게 말아 올렸다. 8.15 광복 전에 있었다는 재수골의 기담奇談은 그렇게 마을에 전설처럼 구전되고 있었다.

  재수골은 백룡촌(白龍村) 4대(隊)의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예전에 사람이 살던 부락이 있었고 종소리가 울리던 학교가 있었다. 만주국시기 학교는 벌에 내려왔으며 ‘공립백룡평학교(公立白龍坪學校)’로 거듭났다. 백룡평학교는 벌써 몇 십 년 전에 폐교되었고 지금은 그 자리에 게이트 볼 구장이 들어서있다.

  따져보면 재수골의 부락은 골짜기 밖으로 자리를 뜬지 어언 반세기가 지났다. 그러나 지주의 악명은 지명으로 남아 유령처럼 그냥 골짜기를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마을에는 악착한 지주보다 훨씬 큰 우환거리가 있었다. 간민들이 천입하던 19세기에 이웃한 마패의 번진령과 마찬가지로 호환(虎患)이 아주 심했던 것이다. 마을 부근의 산속에 호랑이의 소굴이 있었는데, 호랑이는 늘 야음을 타서 강 건너 개마고원의 마천령까지 소일하듯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 호랑이 역시 지주처럼 시초의 마을이름에 포악한 원형을 드러낸다. 지명지(地名志)는 19세기 중반 두만강 기슭에 생겨난 이 지명이 ‘포서평(布瑞坪)’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포서평’은 우리말이며 포고를 내어 호랑이를 쫓았던 벌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거 참, 쥐를 잡는 벌인 줄 알았는데…” 일행 중 누군가 농담 삼아 좌중에 하는 이야기이다.

  하긴 우리말로 포서평이라니 자칫 쥐를 잡는 벌이라는 의미의 ‘포서평(捕鼠坪)’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포서평은 기실 백수의 왕 호랑이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을 지명에 감추려는 허장성세라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또 고서 “용왕경(龍王經)”의 대목을 인용하고 옛 지명의‘포서(布瑞)’는 기실 바닷가에 살던 용 포뢰(蒲牢)의 오기라고 주장한다. 포뢰의 울음소리는 꼭 마치 종소리와 같아서 호랑이를 쫓을 수 있을 줄로 여겼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호랑이는 포뢰는 아니더라도 용의 일종인 백룡을 무서워했다는 속설이 있다. 마침 이 백룡은 바로 두만강 대안의 함지산에서 살고 있었으며 그래서 마을 이름을 백룡촌으로 개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함지산은 말 그대로 함지처럼 생겼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함지산에 구름이 끼면 이 고장은 십상팔구 날씨가 흐리며 비가 내린다고 한다. 구름을 타고 다니며 비바람의 조화를 부리는 용이 살고 있기 때문이란다.

  “산꼭대기에 큰 늪이 있습니다. 사흘갈이가 됩니다.” 기씨와 함께 한담을 나누던 다른 농부가 이렇게 참견했다.

  사흘갈이는 소가 사흘 낮 동안 갈 수 있는 논과 밭의 크기를 이르는 말이다.

  후문이지만 마을에는 함지산에 다녀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예전에 백룡평학교는 야유회를 갈 때면 늘 함지산을 1번지로 선택했다고 한다. 그때는 국경 통행증을 소지하지 않아도 두만강 양안을 이웃 동네 나들이를 하듯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던 것이다.

  전하는데 의하면 이 함지산의 늪에는 워낙 용 두 마리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백룡과 청룡이었다. 백룡은 흰색처럼 마음이 순수하고 비단결처럼 고왔으며 청룡은 푸르죽죽한 청색처럼 성질이 괴팍했다. 나중에 백룡은 청룡의 밉광스런 성깔을 견디지 못해 강 건너 이곳으로 피신했다. 청룡이 미쳐 날뛰며 백룡을 찾게 되자 마을사람들은 백룡을 옛 우물에 숨겼다. 그때부터 백룡은 마음씨 좋고 물 좋은 이 고장에 눌러앉게 되었다고 한다.

  혹여 청룡을 두려워 피하던 겁쟁이인 때문이 아닐까… 백룡을 방패로 삼은 지명도 호환을 막기에는 부족했던 것 같다. 지난 세기 50년대 백룡촌에는 전설이 아니라면 정말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생겨났다.

  한 여름의 어느 날 어슬녘이었다. 엄마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고 어린 애기는 구들에 앉아서 혼자 놀음을 즐기고 있었다.

  MC자기 집안에 웬 차가운 바람이 휙- 하니 일어났다. 엄마가 얼결에 머리를 들어보니 애기는 간데 온데 없고 창호지를 바른 사립문만 찌걱거리고 있었다. 마당으로 벌떡 뛰쳐나가자 저쪽으로 아이를 입에 물고 가는 호랑이가 대뜸 시선에 잡혔다.

  엄마는 허둥지둥 달려가며 갈린 목소리로 냅다 부르짖었다.

  “호랑이야! 사람 살리오!”

  금세 사립문들이 벌컥벌컥 열리는 소리가 부산하게 들렸다. 누군가 벽에 세워두었던 화승총을 들고 뛰어나왔다. 그는 호랑이가 달아나는 쪽을 향해 제잡담 방아쇠를 당겼다. 쾅! 하고 요란스런 소리는 조용한 밤공기를 마구 뒤흔들었다. 느닷없는 총소리에 놀란 호랑이는 애기를 땅에 떨어뜨리더니 꼬리 빳빳이 어둠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엄마는 엎어질 듯 달려가서 애기를 가슴에 꼭 품어 안았다. 다행이 애기는 크게 다친 데 없이 무사했다.

  훗날 호랑이는 늘 동네어구까지 와서 어슬렁거렸다. 입에 들어온 먹이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게 호랑이의 근성이라고 한다. 그래서 애기 집에서는 나중에 마을을 떠나 멀리 이사를 갔다.

  훗날 이 애기는 어른으로 성장한 후 일부러 마을에 찾아와서 화승총을 쏘았던 사람에게 인사를 올렸다고 한다.

  그때 알려진 바에 따르면 ‘애기’는 연변 북부의 돈화(敦化)에 이사하여 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애기는 그야말로 호랑이가 말을 모르고선 도저히 쫓아올 수 없는 오지로 피난을 갔던 것이다.

  “저기지요, 호랑이가 애기를 떨어뜨린 자리가 바로 둔덕 뒤쪽이라고 합니다.”

  기씨가 말하는 둔덕에는 정자가 있었다. 흡사 초병이 수비하는 망루를 방불케 했다. 마을을 호시탐탐 노리는 호랑이를 멀리서 발견할 수 있도록 일부러 만든 것 같았다. 실은 마을 전경과 강 건너 쪽의 이국 풍경을 구경하기 위해 일부러 만든 전망대라고 한다.

  전망대는 민속마을인 ‘백년부락’의 일부였다. 기씨는 바로 이 ‘백년부락’에서 일하고 있었다.

  ‘백년부락’은 팔간 조선주택을 둘러싸고 재현한 옛 시골마을의 정경이다. 중국에 현존하는 전통적인 팔간 조선주택은 백룡촌의 이 가옥이 유일하다고 한다.

  예전에 간민들은 대부분 서발 막대기 휘둘러도 거칠 게 없는 가난한 살림이었다. 팔간 집이 아니라 큰집을 지을 여력이 없었다. 더구나 여차하면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예 큰집이 필요 없었을지 모른다. 대개 방과 정주간, 부엌이 함께 달린 초가삼간이면 만족했던 것이다.

  혹간 누군가 돈을 모아 팔간 주택을 지으려고 해도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거목의 소나무가 필요했지만 그 무렵 연변지역의 산에는 재목으로 쓸 만한 소나무가 그리 없었기 때문이다.

  ‘백년부락’ 팔간 주택의 주인도 수백 리 밖의 백두산에서 홍송을 뗏목으로 날라 왔다고 한다.

  그때가 바로 1877년경이라고 백년부락의 뜰에 세운 석물에 기록되어 있었다. 조선의 박 씨 성의 상인이 이 주택의 주인이었다고 한다. 그는 또 두만강 대안에서 청기와를 배로 실어왔으며 꼬박 3년 동안의 시간을 들여 집을 지었다고 한다. 으리으리한 팔간 기와집은 미구에 마을 안팎을 들썩하게 한다.

  8.15 광복 후 상인은 청산을 당할까 두려워 다시 두만강을 건너갔다고 한다. 얼마 전 김 씨 성의 촌민이 피폐해진 이 주택을 보수하고 옛 우물을 팠으며 물방아를 세우고 연자방아를 놓아 민속마을‘백년부락’을 만들었던 것이다.

  방불히 하늘에 걸린 듯한 용마루와 금세 날아 갈듯 건뜻 들린 추녀… 고풍스런 백년의 조선주택은 말 그대로 웅크리고 있는 천 년의 용을 방불케 한다. 옛 우물에 잠적했다는 백룡이 다시 현신한 게 아닐지 하는 생각이 갈마든다.

  그러나 백룡은 비늘조차 보이지 않고 호랑이는 포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백년부락’은 마을에서 실물로 만날 수 있는 마지막 전설이었다.*

MC:

  호랑이가 마을에 내리고 어린이를 물어갔다는 이야기, 정말 전설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네, 노래 한곡 듣고 다음 코너로 이어가겠습니다.

(노래 한곡)

[노래 한곡]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이달에는 지명과 관련한 퀴즈를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연변 용정의 명동마을은 학교로 유명세를 탔던 마을인데요, 이 ‘명동마을’은 무슨 뜻으로 지어진 이름일까요.

  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명동마을’은‘ 무슨 뜻으로 지어진 이름일까요.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MC 16번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프로편성에 진행에 박은옥(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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