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1-06-11 10:23:56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1년 6월 10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6월의 두 번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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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월

6월에 정말로 아주 중요한 날이 있습니다.

6월 7일은 중국에서 많은 사람들의 생활을 결정하는 중요한 날입니다.

이날은 중화인민공화국 대학교 신입생을 모집하는 전국 통일시험의 날 다시 말해서 대학 입학시험의 날입니다.

 

대학교 신입생 모집 전국통일시험은 합격된 고중 졸업생과 동등 학력을 가진 수험생이 참가하는 선발적인 시험을 이릅니다.

현재 중국에서 대학교는 2956개이며 이 가운데서 일반대학은 독립학원 257개를 망라하여 2688개, 성인고등학교 268개 인걸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1977년은 공화국에서 한 시대와 나라의 변곡점이었습니다.

1977년, 정치운동의 충격으로 하여 10년 중단되었던 중국 대학입시 제도가 회복되었습니다.

1977년, 중국 교육부는 베이징에서 전국대학교 신입생 모집 실무회의를 소집하고 10년 중단되었던 전국 대학교 신입생 모집 시험을 회복하고 통일시험, 우수생의 선발 모집 방식으로 인재를 대학에 선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전환적인 의미를 가지는 이 결정으로 회복된 신입생 모집 대상은 노동자, 농민 그리고 농촌으로 내려갔거나 귀향한 지식청년, 제대군인, 간부 그리고 당해 연도의 고중 졸업생이었습니다.

회의는 또한 신입생을 모집할 때 우선적으로 중점 대학, 의학대학, 사범대학, 농업대학을 보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77년, 수험생은 570만명이었으며 합격생은 4.79%를 차지하는 27만 3천명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지난해까지 대학입학시험은 44차 진행되었습니다. 이 가운데서 수험생이 제일 적은 해는 1984년으로 164만명이었습니다. 이해 합격생은 수험생의 29.7%를 차지한 48만명이었습니다.

2020년 수험생은 역대로 제일 많은 1071만명이었으며 합격생은 90.34%인 967만 5천명으로 역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2021년 2월 19일, 중국 교육부는 “2021년 일반대학 신입생 모집 사업을 잘 할데 대한 교육부의 통지‘를 발표하고 2021년 전국 대학 신입생 모집 통일시험을 6월 7일에 진행할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6월 7일, 2021년의 전국대학입학시험이 정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올해의 대학입학시험 등록자는 1078만명으로 1977년 대학입학시험을 회복한 후 지난해를 이어 등록자가 제일 많은 한해로 되었습니다.

올해의 대학입학시험은 또 광주 등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코로나 환자가 출현하면서 방역작업이 특별히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베이징에서는 올해 계속 지정 시험장소마다 1명의 전문방역 시험관을 배비하고 방역 작업과 돌발적인 상황 처리를 책임지게 했습니다.

일부 성에서 새로운 대학입학 시험을 실행하면서 각 지역의 대학입학시험 마감 시간도 다릅니다. 감숙성, 광서장족치구, 안휘성, 하남성 등 성은 8일 오후 시험을 완료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성과 구, 시는 시험 과목 설치가 달라 9일, 10일도 일부 시험과목을 배치했습니다. 일례로 베이징, 해남 등 지역은 10일 시험을 마칩니다.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수부 연길시의 지정 시험장소는 연변1중학교, 연변제2중학교, 연길시 제1고중 등 3개입니다. 이날 오전 9시에 시작된 대학입시 첫 과목은 어문시험이었습니다. 시험 일정은 첫날 오전 어문시험을 시작으로 당일 오후 수학, 8일 오전 문과와 리과 종합, 오후 외국어 순으로 펼쳐졌습니다.

수험생들이 시험장에 들어가고 9시가 지났지만 지정 시험장소에는 여전히 ‘응원자;’들이 자리클 지켰다고 합니다. 대부분은 수험생 부모였습니다.

이밖에 또 대학입시에 자원봉사자로 나선 사람들도 적지 않아 또 하나의 풍경을 이뤘다고 현지의 리성복 청취자가 글을 보내왔습니다.

[청취자 내신]

7일부터 전국 대학교 학생모집  통일시험이 시작되였습니다. 수험생들과 학부모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고 연길 북산가두의 뢰봉반 봉사자들이 수험생 먼저  일찍 시험장소 부근에 나섰습니다. 그들은 올해의 지정 시험 장소인 연변1중과 연변 2중 부근에 봉사 텐트를  세워놓고 물과 필요한 약을 준비하여  대학입시 생들과 학부모들이  무료로 차를 마시고 물과 약을 사용하도록 지원하였습니다. 북산가두에서는 13년 동안 대학 입시생과 학부모들을 위한 이런  무료봉사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네, 예전에 대학입학시험 성적이 발표되고 조회를 할 수 있는 시간대는 대학입학시험이 종료된 15일 내지 20일 후였습니다. 올해의 대학입학시험 성적이 발표되는 시간도 6월 23일부터 26일로 예정됩니다.

입시생 학부모와 친지, 주변 지인들에게 좋은 소식이 전해지길 바랍니다.

[간주]

그럼 계속하여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이런 제목으로 재미있는 지명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의 우적골 지명 이야기입니다.

 

 두만강기슭에 있는 우임금의 족적

  우임금은 중국 하夏나라의 시조 우禹를 임금을 이르는 말이다. 옛날 우임금은 치수治水를 잘했는데, 홍수를 다스리면서 구주九州의 곳곳에 족적을 남겼다. 놀랍게도 우임금의 자취라는 의미의 지명 우적촌禹跡村이 두만강 기슭에 있었다고 한다. 우임금이 언제인가 두만강의 기슭에 발자국을 찍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그게 믿기 어려운 탓일지 모른다. 우적촌은 언제인가부터 현지인에게도 무척 낯선 지명으로 되고 있었다. 마을에서 최고령이라고 하는 김창률은 더는 우적촌이 아니라 달리 불린다고 알려줬다.

   “지금은 승적勝績이라고 합니다. 오래 전에 이름을 고쳤지요.”

  그의 말에 따르면 일찍 토지개혁을 하던 1947년경 아랫마을과 합병하면서 이름을 고쳤다는 것이다. 그때 아랫마을은 승지勝地, 윗마을은 우적禹跡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두 마을 이름의 첫 글자를 합쳐서 새 마을의 이름인 승적勝跡을 만들었다. 그 후 자취 적跡이 자을 적績으로 바뀌면서 승적勝績이라는 지명으로 고착되었다. 승지는 1961년 승적이라는 지명에 이름 한 글자를 달랑 남기고 다시 분가, 이때는 북쪽에 동명의 마을이 생겨났기 때문에 중복을 피해 승리勝利라고 개명한다. 그러나 우적촌은 계속하여 원명이 아닌 승적이라는 별명으로 남았던 것이다.

  우적촌 지명의 시원始源은 우적골禹跡溝이라고 한다. 우적골은 그 후 촌민소조 이름을 따서 일명 5대(隊, 촌민소조) 골이라고 불리며 골짜기를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 북쪽으로 십리가량 더 들어간다. 이 골짜기 입구에 있는 오른쪽 산등성이를 ‘채개 더기’라고 부른단다. ‘채개’는 현지의 방언으로서 ‘최 씨’라는 뜻이다.

  “옛날 최 씨 성의 사람이 이 산등성이에서 범에게 물려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긴 이름이지요.”

  김창률은 3대째 우적 아니 승적 마을에서 살고 있는 순수 토박이로 한시기 촌장, 일명 대장隊長으로 있었다. 그는 또 마을에서 최고의 연장자이었기 때문에 마을 역사에 들어서서는 단연 일인자로 손꼽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조부가 일가식솔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오던 때는 1915년경이었다고 한다. 그때 우적골에는 벌써 일여덟 가구가 살고 있었으며 정작 골짜기 밖의 두만강기슭에는 인가가 몇 가구 없었다. 우적골에서 최초의 부락을 이뤘던 간민墾民들은 거개 청나라 관리들의 눈을 피해 벌이 아닌 골짜기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들은 1956년경 산재부락을 한데 집중할 때 비로소 골짜기 밖으로 떨쳐 나왔다고 한다.

  나중에 우적골에서 인적이라고 이름을 지을 수 있은 건 아름드리의 버드나무 한 그루뿐이었다. 버드나무는 마을이 생겨날 때 벌써 있었다고 하는 백년 고목이었다. 버드나무 아래는 동네 사람들이 늘 그늘을 찾아 담소를 즐기던 쉼터였다. 그래서 버드나무는 언제부터인가 동네의 상징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1970년대 젊은이 몇몇이 무슨 오기를 부리느라고 그랬는지 나무를 베어버렸다고 한다. 백년의 고목은 그렇게 옛 동네 우적골과 더불어 끝내 옛말로 되었다. 바보짓을 저질렀던 젊은이들은 한동안 노인들을 만날 때마다 귀 아프도록 꾸중을 들어야 했다.

  김창률은 바로 우적골에서 고목이 사라지던 그 무렵부터 승적촌 촌장으로 있었다. 예전에는 조나 콩을 주로 심는 밭농사를 했지만 그맘때부터 물을 대고 논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때 마을에는 120가구의 600여명 인구가 살고 있었다. 정부에서 지명조사를 하던 지난 세기 80년대 마을은 148가구의 702명 인구로 훨씬 늘어나는 양상을 보였다.

  “지금은 70가구나 될까요? 옛날의 절반이 되나마나 하지요.” 김창률은 우적골의 고목이 처참하게 쓰러지던 그때처럼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그 무렵 마을 남쪽의 두만강 가운데에도 밭이 있었다고 한다. 그곳은 마을의 옛 이름을 달아서 ‘우적도禹跡島’라고 부르는 섬이었다. 두만강은 마을 부근에 와서 갑자기 북쪽으로 급한 굽이를 만든다. 이 때문에 두만강은 강기슭을 야금야금 할퀴고 뜯으면서 마을 쪽으로 거의 100미터나 밀고 들어왔다고 한다.

  마을의 지형지물과 그 속에서 생긴 일들은 그렇게 책처럼 낱낱이 펼쳐지고 있었다. 정작 책의 주인인 우적골은 웬 일인지 얼굴을 모를 정체불명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우적골은 임금 우禹자를 쓰는 데요…” 김창률은 이렇게 서두를 뗐지만 인차 뒷말을 잇지 못하는 것이었다.

  옛날 조부가 우적골에 이삿짐을 풀었고 김창률 또한 우적골 바로 입구의 동네에서 살고 있었지만 우적골의 지명유래는 한 번도 들은 적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적골 역시 전설의 우임금처럼 옛말로 되고 있는 걸까…

  최초의 마을은 일찍 광서(光緖, 1875~1908) 초년에 형성되었다고 지명지地名志가 기록하고 있다. 그 후 1915년을 좌우로 마을에 교회당이 섰다고 한다. 바로 김창률의 조부가 강을 건너 우적골에 이주했을 무렵이다. 이 교회당을 우禹 씨 성의 사람이 관리했기 때문에 마을이름을 우적촌禹跡村이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당은 우적촌의 70대 노인들에게 이방인처럼 낯선 이름으로 되고 있었다. 적어도 그들이 주변의 뭔가를 확실히 기억할 수 있었던 1950년대에는 벌써 교회당이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옛날 촌민들의 모임을 위해 지은 공회당公會堂을 예수를 모신 교회당으로 잘못 기록하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막상 그렇다 손쳐도 마을에는 또 김 씨나 최 씨, 정 씨 성은 많지만 우禹 씨 성은 단 한명도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교회당은 수증기처럼 공중으로 증발하고 우 씨는 이름을 바꾼 후 어디론가 잠적했을까…

  우적골의 아래위 동네도 옛 이름을 갖고 있지만 우적골처럼 그렇게 난해하지 않았다. 서쪽동네의 남산골南山溝은 금세 무슨 의미인지 일목요연하게 알리는 지명이며 동쪽동네의 승지골勝地溝은 경치가 뛰어난 곳이 아닌가 하고 잠깐 착각할 수 있지만 지명상식을 갖추면 역시 쉽게 알 수 있는 이름이다. 승지골은 일명 음지골陰地溝이라고 하며 옛날 산이 높아 해가 일찍 진다고 짓던 이름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적골처럼 도무지 알기 힘든 지명도 적지 않았다. 순 우리말 지명으로 민간에 전승되고 있는 홍경골이 그 중의 하나이다. 이 지명은 도대체 붉은 빛으로 빛나는 거울이라는 홍경紅鏡인지 아니면 불경을 세상에 퍼뜨린다는 홍경弘經인지 누구도 모르고 있었다. 지명지와 같은 지방문헌에는 홍경골의 기록이 다문 한 줄도 없기 때문이다.

  이 홍경골은 우적골 서쪽에서 삼합三合이라는 이름으로 세간에 알려지고 있다. 삼합은 진과 촌 소재지로서 동치(同治, 1862~1874) 중반에 형성되었다고 한다. 지명지에 따르면 시초에 밀수, 탈세 등을 조사하는 검사소라는 의미의 계사처稽査處로 불렸으며 훗날 세 합작사를 합병하고 삼합사三合社로 되었다가 삼합촌으로 개명하였다는 것이다.

  승지골 아래쪽에 있는 비전菲田도 마찬가지였다. 비전은 중국말 그대로 풀이를 하면 향기로운 밭이라는 의미이다. 실은 빼박골이라고 하는 조선말 이름을 중국말로 음역한 지명이다. 빼박골은 ‘빼쏘다’에서 나온 말로 빼닮았다는 의미이다. 지명지는 비전이 예전에 무 등속의 채소밭이 있어서 지은 이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도대체 빼박골이 뭘 빼닮았다는 뜻인지는 알 수 없다. 빼박골이라는 이름마저 실전되고 있기 현 주소이기 때문이다. 확실한 건 우적은 우임금의 발자취가 아니라 뭔가 빼닮은 지명이라는 것. 항간에서는 이를 두고 재미있는 설이 등장하고 있었다. 우 씨의 자취라는 의미의 우禹跡은 실은 소의 족적이라는 의미의 우적牛跡이라고 한다. 글깨나 익힌 어느 선비가 소발이요 뭐요 하는 속된 이름을 운치 있게 비슷한 발음의 ‘우임금의 족적’으로 바꿨다는 것이다. 그럴 법 한다. 우임금이 중원에서 수천 리 떨어진 이역 땅에 나타났다는 그 자체가 일장 기문奇聞이기 때문이다.

  진짜 기문 같은 이야기는 현지에 또 하나 있었다. 지금은 삼합까지 버스가 하루에도 몇 번 씩 다니지만 지난 세기 60년대 초반까지 꿈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버스는 고사하고 기름 대신 목탄을 연소하던 트럭마저 며칠이 가도록 만나기 힘들었다. 달구지나 겨우 다닐 법한 좁은 흙길이었기 때문이다.

  “저희들 세대는 모두 용정까지 두발로 걸어본 기억이 있지요.” 김창률은 마치 언제인가 이웃 마을로 다녀온 듯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우적골에서 산을 넘어 용정 시내까지 가는 데는 약 100리 길이다. 해가 뜰 때 문을 나서면 날이 어둑해질 때 겨우 시내에 들어설 수 있다. 그보다 힘든 건 해마다 마을에서 국가에서 매상하는 곡물을 바치러 갈 때였다고 한다. 소 수레로 용정 시내까지 실어가려면 하루를 가고 하루를 바치며 하루를 오는 등 꼬박 사흘이나 걸렸다. 그래서 옛날 돈 있는 사람들은 아예 강 건너 쪽에 가서 기차를 타고 용정 나들이를 했다고 한다.

  불과 반세기전까지 마을에서 일상처럼 생겼던 이런 일들은 벌써 아득한 전설처럼 몇몇의 기억에 간신히 남고 있었다. 이보다 한 세기 전 두만강기슭에 있었다는 우 씨의 족적은 종내 찾을 길 없었다. 정말이지 우적골에서 인간의 옛 흔적이 아니라 언제인가 땅에 찍혔던 소발자국을 추적하더라도 이처럼 어려울까 싶었다.*

 

네, ‘두만강기슭에 있는 우임금의 족적’이런 제목으로 우적골의 지명 이야기를 보내드렸습니다.

  100년 세월 속에 묻힌 지명의 내원을 찾는데 일말의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합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계속하여 지명과 관련한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용정에는 또 ‘세린하’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지명 ‘세린하’는 무슨 의미로 지은 이름일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지명 ‘세린하’는 무슨 의미로 지은 이름일까요.

네,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박은옥(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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