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인새는 주나라때 시작되어 진조때에 이르러 "새"와 "인"이 구분되어 황제가 사용하는 것은 "새(璽)", 대신과 백성들이 사용하는 것을 "인(印)"이라고 불렀다.
최초의 옥새는 진시황의 전국새인데 이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씨벽"으로 조각된 것이다. 화씨벽은 그 뒤로 역대 왕조정통의 상징으로 되었으며 황제들은 등기한 후 본인의 옥새를 새겨 황권과 위용을 나타냈다.
고대 옥새위에 조각된 것은 대부분 "용"이거나 사자, 코끼리 등 길상의 짐승이었다. 옥새의 재질은 대부분 옥, 수산석 등으로 되어 있다. 그중 용을 응용한 것이 가장 많았는데 이는 용은 중화민족의 토템, 전설중의 하늘과 통하는 신의 짐승이었기 때문이었다. 용은 사슴의 뿌리, 낙타의 머리, 뱀의 목, 어류의 비늘, 매의 발톱, 범의 발바닥, 소의 귀 등으로 조합된 신의 짐승이다. 네모난 옥판에 용을 새긴 옥새는 바로 황제의 사방에서의 권력과 천하를 다스리는 위엄을 상징한다.
옥새는 세대의 변화발전을 거쳐 명청시기에 이르러 가공공예가 가일층 성숙되었는데 그중 청조의 옥새는 공예로부터 소재에 이르기까지 전례없던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 청조 건륭황제는 옥새의 수량을 총 25개로 명확히 제한해 순서적으로 배열했는데 각각 황제의 최고 권력의 모든 방면 행사를 대표했다.

자금성내의 "25보물"
자금성은 명, 청조 두개 왕조의 황제들이 거주한 궁전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큰 황궁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각 역사시기의 귀중한 보물 근 백만점이 보존되어 있다. 수많은 보물중 어느것이 황제의 지고무상한 권력과 지위를 대표하는가 물음에 대답한다면 바로 옥새이다. 중국 역대의 통치자들은 모두 옥새의 작용을 매우 중요시했으며 국가의 상징물로 여겨 황제가 천하를 다스리는 징표로 되었다.
현재 자금성내에는 명, 청조시기의 황제와 황후가 사용하던 옥새가 근 5000점에 달한다. 건륭황제는 청조 입관이래 제4대 황제로서 60여년간의 통치기간, 청조 역대의 가장 찬란한 시대를 창조했다. 건륭이전 청조 황제의 옥새는 명확한 수량이 규정되어 있지 않았으며 건륭 통치 11년째 되는 해부터 옥새는 25개로 규정되어 후세사람들은 이를 "25보물"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왜 25개로 규정했을까?
기재에 의하면 건륭황제는 청왕조가 25대까지 전해지기를 희망했기 때문에 청조 "25보물"은 건륭황제가 지정한 대표적 국가정권의 25개 국가 보물의 총칭이다. 그뒤로 25개 옥새는 가경, 도광, 함풍, 동치, 광서황제를 거쳐 말대황제 부의 통치시기에까지 사용되었다. 이 25개 옥새는 각각 자기만의 용도가 있었고 한데 뭉치면 또한 황제가 국가 최고권력의 각 방면을 행사하는 위엄을 대표한다.
25보물은 현존하고 있는 유일 완정한 황제의 보물이기도 하다. 25보물은 자금성내 교태전의 보물함에 보관되어 있었으며 내각에서 관리하고 황제의 허락을 거쳐야만 꺼낼 수 있었다고 한다.
새로운 세기에 진입해 중국문물학회에서는 절판본의 "중국역대명옥" 복원품을 발행했는데 그중 건륭황제가 아끼던 옥새 "광운지보"도 포함되었다. 이는 또한 중국 국가급 문물연구기구에서 처음으로 진행한 복원제작이기도 하다. "광운지보"는 신강 옥을 소재로 고궁박물관에 수장된 원본에 근거해 정교하게 조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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