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0여년의 건설역사를 갖고 있는 베이징에서는 역대의 아름다운 건축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중 대부분 건축의 벽돌과 기와위에는 보일듯말듯 한 작은 문자들이 남겨져 있는데 이는 사람들에게 신비감을 안겨주고 있다.
자금성 태화전의 한백옥 난간 아래에는 큰 벽돌로 쌓은 기반이 있는데 그중 한 벽돌의 변두리에는 해서체로 된 "원명원"이 새겨져 있다. 북해공원 동쪽 성벽에도 몇개의 작은 글이 새겨진 벽돌이 있는데 역시 "원명원"이라는 세글자가 새겨져 있다. "원명원"이 새겨진 벽돌들이 왜 자금성과 북해공원에 출현했겠는가? 원명원의 성곽이 파되된 후 그 벽돌들이 황성을 보수하는데 쓰이지 않았을가고 추측케 한다. 그 외 천단공원의 성벽위에도 글씨가 새겨진 벽돌들이 있는가 하면 지안문 내거리의 성벽에서도 이런 벽돌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황족 건축물의 성벽 벽돌에 문자가 있는 외에도 사찰, 왕부 심지어 곡물창고에 사용된 벽돌위에도 문자가 새겨져 있다. 이와 같이 성벽 벽돌위에 새겨진 문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상징하고 있을까?
명조때 법률은 특히 삼엄했는데 성벽은 전략적 물자로서 각별히 중시를 받았다. 성벽 벽돌 품질의 좋고 나쁨은 성지(城池)의 안위와 직접 관계되었다. 때문에 성벽 벽돌의 생산지는 황실에서 허락한 몇몇 공장외에 기타 생산지에서 생산하는 벽돌은 모두 도장을 남기되 년대, 지점, 장인의 이름 등을 표기해 추소에 편리하게 했다.
청조시기에 이르러 성벽은 일부 벽돌에만 도장을 새겼으며 또한 생산지 이름 등을 남겼을뿐 장인의 이름 등은 남기지 않았다. 또한 일부 벽돌은 재료 및 공예성질을 밝혔으며 생산지의 이름을 보탠 것도 있었다. 한마디로 청조시기 성벽 벽돌위의 문자는 책임을 추적 조사하는 기능이 뚜렷하지 않으며 도장 역시 상품의 상표와 홍보로 새기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문자가 새겨진 성벽 벽돌은 대부분 청조시기의 것이다. 파괴된 명조시기의 성벽 벽돌은 청조의 성벽 벽돌에 의해 대체되면서 반 이상은 민간에 유실되었다. 베이징에서 건축 개조 과정중 일반 주민의 담벽중에서도 명조때의 벽돌을 찾아볼 수 있다. 비록 벽돌이 파괴되어 모서리가 떨어지고 모양이 불완정하지만 여전히 명조시기 성벽 벽돌을 대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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