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간장(廟會)은 일종 사회풍속으로서 심각한 사회적 원인과 역사원인을 갖고 있다. 절간장의 풍속은 불교사찰 및 도교의 종교활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민간신앙활동과 함께 발전, 보급되기 시작했다.
동한시기 불교가 중국에 전해지기 시작했고 도교도 점차 형성하기 시작했다. 불교와 도교는 치열한 생존경쟁이 벌어졌으며 각종 종교활동이 우후죽순마냥 출현했다.
최초의 절간장은 성대한 제사활동에 불과했지만 경제의 발전, 사람들 교류의 수요와 더불어 제사활동을 유지하는 한편 점차 시장거래를 융합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절간장은 "묘시(廟市)"라고도 불렀으며 중국 시장의 중요한 형식으로 되었다. 사람들의 수요와 함께 절간장에는 일부 오락활동이 추가되었으며 설날 절간장에 다녀가는 것은 새해맞이 중요한 내용이기도 했다.

위진남북조시기 불교와 도교가 흥기하면서 상품교환이 점차 빈번해졌으며 사찰은 상업활동에 기회를 마련해줬다. 절간장은 바로 이때로부터 시작되었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제사활동과 함께 형성, 오락대중에 의해 발전, 상품교환을 위해 흥성한 것이 것이다.
베이징 최초의 절간장은 "등시구(燈市口)"절간장이다. 현재는 이미 모습을 감췄지만 명조시기 등시구는 낮이면 번화한 시장으로서 3대6조의 골동품, 화려한 복장, 다양한 식품 등을 이 곳에서 구매할 수 있었을뿐만 아니라 밤이 되면 경쾌한 북소리와 눈부신 불빛하에 아름다운 화면을 이루곤 했다. 청조초기에 이르러 만족(滿族)인들이 베이징에 진입하면서 한족인들을 밖으로 내쫓았으므로 등시구 묘회는 전문(前門)밖으로 이동되었다. 오늘날 동화문(東華門) 부근에는 등시구 이름만 남겨져 있을뿐이다.
명조시기 성황묘 절간장도 상당한 규모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청조말기 큰 화재로 인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 절간장은 옛베이징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베이징 절간장의 탄생지로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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