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번역은 누가 시킨거예요.》
《한국회사에서 근무하는 내 후배야.》
이런식으로 둘러댈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미향은 투자의향서, 제품소개, 회사소개같은 짧은 서류들을 번역해 달라고 팩스를 보내왔다. 그런 격식의 문장을 어떻게 번역하는가를 배우겠다는것이였다. 배우겠다는 사람의 요구를 거절할수 없었다. 다른 때같으면 안해에게 그냥 넘겨 번역하라고 했겠지만 또 번역료 말을 꺼낼가바 그냥 내가 번역해서 팩스로 보내주었다.
그 후 얼마지나지 않아 미향이가 북경에 진출한 한 한국무역회사에 입사했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당연히 축하할만한 일이였다. 내가 축하할겸 식사나 함께 하자고 하니 미향은 첫 로임을 탄후에 자기가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했다. 미향은 한국회사에 입사한 후에도 자기가 아직도 번역에 서툴다고 하면서 가끔 회사관련 서류의 번역을 의뢰해왔다. 번역을 의뢰해온 서류를 보니 미향이가 몸담은 회사는 무역중개업을 하는 작은 회사같았다.
하루는 내가 서재에서 컴퓨터로 미향이가 보낸 서류를 번역하고 있는데 안해가 들어왔다. 컴퓨터 형광막에 나타난 글을 보고 안해는 자못 놀란 기색이였다.
《소설 쓰는가 했더니 딴 판이네.》
《짧은 글이니 당신 손 빌것도 없고 해서…》
《당신 이런 번역은 다시는 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번역료는 있어요?》
《친구청탁인데 술 한잔 사겠지.》
《그저 술, 술, 술, 이젠 술소리만 들어도 지겨워나요. 참 그런데 지난번에 번역한건 어떻게 됐어요?》
《뭘 말이오?》
《〈심계법〉말이예요.》
《주겠지.》
《그냥 주겠지 하고 기다리지 말고 재촉하세요. 당신 시간이 없으면 내가 찾아갈테니 주소만 알려주세요.》
《기다린바하곤 좀 더 기다리라구.》
《그러다가 또 전번 꼴이 되면 어쩔라구요. 대체 누구 청탁인가요?》
《내 후배라고 했잖소.》
《대학후배예요?》
《말해도 당신 모르오.》
《후배라고 너무 믿지 말고 재촉할건 미리 재촉하세요.》
《알았다니까.》
《그런데 당신 나하고 역정낼건 뭐예요?》
《당신 오늘 무슨 말이 그리 많아?》
《어디 말 안하게 됐나요? 지난번처럼 그저 두눈 펀히 뜨고 당할가봐 그래요.》
미향이가 첫 로임을 타는 날 우리는 미향이가 정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이런저런 말을 나누다가 미향이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선생님, 번역료는 어떻게 계산하는가요?》
보매 미향이가 번역료를 챙겨가지고 왔는 모양이다.
《번역원고에 따라 다른데 준확한 표준에 대해선 딱히는 모르겠지만 대체로 일반 번역원고는 번역된 자수로 천자에 적어도 30원은 하지.》
이말에 미향은 두눈이 호동그래졌다. 그는 한참이나 아무말없이 앉아있었다.
《뭘 생각하나?》
《아니요.》
《그 얼굴에 씌여져 있는데.》
《사실 전 번역료가 그렇게 될줄 생각지 못했어요.》
그러면서 미향은 핸드백에서 봉투 하나 꺼내 내앞으로 밀어놓으며 말을 이었다.
《전 3백원이면 충분할줄로 알고…》
돈 수자에 기막힌 웃음이 나갔지만 미향의 천진스러움과 그 솔직함에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미향이가 북경에 와서 인생의 새출발을 했으니 그 돈은 내 축하선물이더럼 치고 도로 넣소.》
이말을 하면서 나는 어쩔수없이 안해를 떠올렸다. 두 번 다시 당하는 꼴 다시 볼수없다던 안해에게 뭐라고 말할가. 에라, 또 당했다고 하지. 후배녀석이 회사공금을 가지고 실종됐다고 할 판이지. 지금 세월에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니까. 그러나 밤을 패며 원고를 번역한 안해에게 또 실망을 안겨줄 일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난들 어쩌나…
《선생님…》
미향이가 말을 잇지못하고 어깨를 들먹였다. 녀자들의 울음끝에는 꼭 할 말이 있다. 이윽고 미향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선생님. 사실 전 선생님을 속였어요. 바른대로 말씀드린다면 전 배우겠다고 〈심계법〉 번역을 선생님한테 의뢰한 것이 아니얘요. 제가 한국회사에 입사하려고 찾아가니 회사 사장님이 저보고 〈심계법〉을 번역해 보라는게 아니겠어요. 저의 문자수준을 보려는것이였어요. 사실 전 한어
나 조선어나 다 약해요. 그러나 전 그 기회를 놓칠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전 선생님에게 번역을 의뢰했던거얘요. 회사 사장님은 선생님이 번역한 〈심계법〉을 보더니 대뜸 오케를 부르는게 아니겠어요. 그 후에 선생님께서 번역해준 회사서류도 전부 제가 번역한걸로 되었어요. 죄송해요…》
《미향의 그 솔직함이 내 마음에 들어. 됐어, 그만 울라구. 미향이, 거짓말도 때론 아름다운 거짓말이 될 수도 있고 기특한 거짓말이 되는 경우도 있지. 이런 이야기가 있어. 한 군인이 군사훈련중 전우를 구하다가 희생되였는데 그 비보를 홀로 있는 어머니한테 전할수 없었지. 왜냐하면 희생된 군인은 외독자였고 그 어머니는 시한부생명을 사는 로인이였으니까. 그래서 희생된 군인한테서 구원을 받은 전우가 매달 아들의 이름으로 편지를 띄우고 그 어머니에게 약과 돈을 부쳐주었지. 시한부생명을 살던 로인은 결국은 아들의 장래가 창창하기를 바라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지. 이런 경우의 거짓말은 아름다운 거짓말이고 미향의 경우는 기특하게 받아들일수 있는 거짓말에 속하지. 그러나 그런 기특한 거짓말도 자주 하면 못써. 믿음이 가는 사람에게는 어디까지나 솔직한게 좋아.》
말을 해놓고보니 내가 집에 돌아가 안해한테 해야 할 거짓말은 안해에게는 기특한 거짓말이 되기는 고사하고 배신감을 주는 거짓말이 될 것이다. 방금 미향에게 믿음이 가는 사람에게는 어디까지나 솔직한게 좋다고 말했지만 나는 안해에게 솔직할수 없다. 그래서 누군가 사내는 속임과 허위의 가증스런 탈바가지라고 했나보다. 그러나 안해도 고생스레 번역한 원고가 한 인간이 새생활에로의 출발에 도움이 되었다는것을 알면 내 거짓말을 용서할 것이다......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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