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족(畲族)은 중국 남방의 유경민족(이동하며 경작하는 민족)이다. 천 여년간 써족은 원시적인 거주지였던 광동성 조주(潮 州)시 봉황(鳳凰)산에서 복건과 절강, 강서, 안휘, 귀주, 사천 등 성에 이주하였다. 현재 90%의 써족이 복건과 절강의 산간지역에 거주하고 있고 나머지는 강서와 광동, 안휘에 산재해 있다. 써족은 중국에서 인구가 비교적 적은 소수민족의 하나이다. 2010년 제6차 전국인구보편조사에 따르면 써족의 인구는 약 70여만명이다. 써족은 한어-티베트어계 묘족요족 어족에 속하는 자신의 민족 언어인 써족어를 사용하며 한문을 통용한다. 99%의 써족이 사용하는 언어는 객가어와 비슷하다. 하지만 말씨나 어투가 객가어와 다소 구별되고 개별적인 용어가 객가어와 완전히 다르다. 1956년에 중국 국무원은 써족을 자체의 특징이 있는 소수민족으로 공식 인정했으며 이 때부터 써족은 법정 호칭을 갖게 되었다. 1985년, 써족의 전통 명절인 3월3일절을 계기로 중국의 첫 써족 자치현인 경녕(景寧)써족자치현이 설립되었다. 이는 중국의 유일한 써족자치현으로 ‘중국 써족의 고향’으로 불린다.
써족의 민족 기원설은 여러가지이다. 하지만 귀납한다면 외래인설과 토착민설 두가지이다. 외래인설은 한나라와 진나라 때의 ‘장사(長沙) 무릉만(武陵蠻)’설이다. 이 설의 가장 중요한 논거는 ‘무릉만’과 써족이 모두 반호(盤瓠)를 숭배하는 토템 문화 맥락에 속한다는 것이다. 토착민설은 써족이 주나라의 ‘민(閩)’인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한다. 오늘 날 복건성의 약칭인 ‘민’은 복건의 토착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들이 복건의 최초의 주인이고 그 후예가 오늘 날의 써족이라는 것이다. 이 설을 뒷받침하는 가장 유력한 논거는 ‘민’과 ‘써’간의 긴밀한 연계를 주장하며 ‘민’-‘만’-‘료(僚)’-써’가 일맥상통하기때문에 써족이 복건의 토착 민족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 외 써족의 기원과 관련해 ‘월나라인의 후예설’ , ‘동이(東夷)후예설’, ‘하남이(河南夷)의 한 갈래, ‘남만(南蠻)족의 한 갈래’ 등 여러가지 설법이 있다. 하지만 허다한 써족의 기원설은 파란만장한 역사와 민족의 형성과정에 써족이 만, 월(越), 민, 이(夷) 및 한족과 어울리며 융합발전을 거듭해 왔음을 잘 말해준다.
써족의 여러가지 기원설 중 가장 보편적인 설법으로 거론되고 있는 장사 ‘무릉만’설을 살펴보자. ‘무릉만’설은 써족과 요족 모두 한나라와 진나라 때의 장사의 ‘무릉만’(일명 오계만五溪蠻)에서 기원했기때문에 써족과 요족이 한 갈래라고 주장한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기원 7세기 초의 수나라와 당나라 때 써족은 이미 복건성과 광동성, 강서성의 접경지대인 복건성 남부와 조산(潮汕) 등지에 살고 있었다. 그러다 송나라 때부터 잇달아 복건성 중부와 북부 일대로 이주했으며 명나라와 청나라 때에는 복건성 동부와 절강성 남부의 산간지역에로 대거 이주했다. 그 중 강서 동북부의 써족은 원래 광동성 조주부 봉황산에 거주하다 후에 복건성 정주부(汀洲府) 녕화(寧化)현에 이주했고. 안휘성의 써족은 약 100여년전 절강의 란계(蘭溪), 동로(桐蘆), 순안(淳安) 등 현으로부터 옮겨왔다. 허나 각 지의 써족은 모두 광동성 조주 봉황산을 민족의 발상지로 여긴다. 전설에 의하면 써족의 시조인 반호가 광동성 봉황산에 묻혀 있고 써족 여인들의 머리 장신구가 봉황의 모양으로 되어있는 것 또한 그들의 시조인 반호를 기리기 위함이라고 한다. 써족들 속에서는 원시 사회 토템 숭배 성격의 반호의 전설이 널리 전해지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써족의 시조인 반호는 황제를 도와 외환을 평정한 공로로 셋째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고 결혼 후 봉황산에 거주하면서 3남 1녀를 낳아 길렀다고 한다. 반호의 3남 1녀는 각기 반(盤)씨, 남(藍)씨, 뢰(雷)씨, 종(鐘)씨 성을 가졌으며 오랜 세월 동안 이 곳에서 후대를 번식하며 차츰 써족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집집마다 널리 알려진 이 전설은 써족의 족보에도 기입되었고 연환화로 그려져 ‘조상도’(祖圖)로 이어져 내려왔다. 써족은 명절이면 이 조상도를 걸어 놓고 성대한 조상제를 지낸다. 그리고 써족은 집집마다 조장(祖杖)이 있는데 조장에는 용머리 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이 역시 써족 토템의 중요한 상징이다. 반호의 전설과 반왕 토템, 반호의 3남 1녀의 성씨인 반씨, 남씨, 뢰씨, 종씨성이 써족의 주요한 성씨로 자리매김한 등이 요족과 아주 비슷하다. 써족의 자칭과 타칭을 보아도 ‘써요’(畲瑤), ‘요’(瑤), ‘요가’(瑤家), ‘산요’(山瑤) , ‘요인’(瑤人)등이 있다. 하여 써족과 요족은 한 갈래로 여겨지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한 장사 ‘무릉만’설이 강유력해 진 것이다. 현재 광동성 써족 인구의 10분의 1이 봉황산 일대에 거주하고 있으며 이 곳에서는 지금도 풍부하고도 생동한 토템 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광동성 민족연구소 관련 전문가들은 광동 봉황산 써족 토템의 완전한 보존과 유구한 역사는 국내 여러 민족들 중에서도 보기 드물어 중국의 소수민족 토템 문화를 연구하는데 상세하고도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써족의 발전역사를 살펴보자. 사서의 기재에 따르면 당나라 때의 복건, 광동, 강서 접경 지대가 써족 선민의 주요한 활동 구역이었다. 고대 써족은 이동하며 경작하는 산간지대의 유경민족이었고 그 이주의 역사를 보면 대체로 당나라와 송나라, 원나라 시기와 명나라와 청나라 시기로 구분된다. 당나라 때 써족의 선민은 ‘만료’로 불리며 복건과 광동, 강서 접경의 구룡강 이서의 산간지대에서 생활했다. 이 시기 써족의 선민은 주로 장주(漳州)와 정주(汀洲) 일대에서 한족들과 함께 황무지를 개간해 생산을 발전시켰고 당왕조가 써족 지역에 대한 통치를 강화해 세금을 징수하며 써족 지역에서 봉건토지세의 원시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송나라 때에 써족의 활동 지대는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송나라 말기와 원나라 초반에 전란이 빈번해지며 써족은 이주를 시작했고 이주 코스가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송나라와 원나라 때 써족 지역의 사회경제가 당나라 때보다 한층 발전했다. 하지만 한족의 지주와 봉건관리들이 써족에 대한 세금징수를 늘리고 토지 약탈을 강화하면서 써족은 극히 빈궁한 생활에 빠져들게 되고 이는 또 써족 내부의 계급 분화도 조성했다. 명나라와 청나라 때 또 한차례의 써족의 대 이주가 있었다. 이 시기의 더는 전란의 원인이 아닌 산간지대에서 이동하며 경작하는 유경 전통에 기반한 이주였다. 이런 이주는 그 속도가 아주 느리며 이주의 방식은 가정이나 가족 중의 일부 성원을 단위로 땅이 넓고 인적이 드문 한족 지역으로 서서히 옮기는 것이다. 이 시기는 오늘 날 써족의 ‘대 분산, 소 집거’의 분포 구도가 자리잡은 중요한 역사 단계이다. 이 때 써족 지역의 사회경제생활은 비교적 안정되었고 써족 지역에서 봉건제도가 이미 기본상 확립되었으며 사회경제상황도 현지의 한족과 비슷하게 되었다. 써족은 장시간의 동란과 이주를 거쳐 복건과 절강, 광동, 강서, 안휘 등 성의 넓은 산간지역에 정착해 복건 동부와 절강 산간지대의 개발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지방 사서의 기재를 본다면 절강 서남부의 경녕(景寧)과 운화(云和)의 땅은 대부분 써족이 개간한 것이다. 1840년 아편전쟁 전에 써족 사회는 자급자족의 자연 경제를 토대로 하는 봉건사회였다. 아편전쟁 이후 써족은 전국의 각 민족 인민들처럼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에 들어서게 되었다. 자본주의 열강들이 중국에 침입하면서 청나라 정부가 복주(福州)와 온주(溫州) 등을 통상구로 개방함에 따라 써족의 사회경제도 치명타를 입고 소 농업과 가정수공업을 결부한 자급자족의 자연 경제가 붕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생활난에 빠지게 된 써족은 한족들과 함께 반제 반봉건 투쟁에 뛰어들었으며 써족의 우수한 청년들은 항일 전쟁에 동참해 용감히 싸우고 1949년에 전국인민들과 함께 해방을 맞이했다. 1949년 이후 약 50년간의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 특히는 개혁개방정책에 힘입어 오늘 날 써족의 정치와 경제 문화에는 커다란 변화가 발생했으며 써족 사회도 중둥 생활수준의 사회를 향해 매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