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正善
2020-06-09 18:30:19 출처:cri
편집:朱正善

누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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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족은 중국에서 인구가 적고 사용하는 언어가 상대적으로 많은 민족 중의 하나이다. 주로 운남성(雲南省) 누강(怒江) 리수족 자치주의 로수(瀘水), 복공(福貢), 공산(貢山) 두룽족 누족 자치현, 란평(蘭坪) 바이족 프미족 자치현 그리고 디칭(迪慶) 티베트족 자치주의 위시현(維西縣)과 티베트자치구의 일부 지역 등지에 살고 있다.

누족은 “누쑤(怒蘇)”, “아누(阿怒)”, “아룽(阿龍)”, “뤄러우(若柔)”라고 자칭하며 누강과 난창강 양안의 오랜 주민이라고 자처한다. 이들은 한어티베트어계 티베트미얀마어족에 속하는 누족어를 사용한다.

2010년 전국 인구 보편조사결과로 보면 누족의 인구는 3만7천명 정도이다. 이들은 리수족, 두룽족, 티베트족, 바이족, 한족, 나시족 등 민족과 섞여 살고 있다. 누족은 국경 이주민족이며 미얀마에 약 3만명 정도가 살고 있는 것으로 집계된다.

누족 생활지역에서 수집한 많은 신석기 유물과 민족의 전설로 분석해볼때 누족은 16세기 이전에는 신석기 후기단계에 있었던것으로 판단된다. 이때까지도 돌호미외에 나무호미와 참대호미 등을 사용했고 채집과 수렵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누족지역은 기원 8세기부터 선후로 운남의 남조(南詔), 대리(大理)정권의 관할 범위에 들었고 원나라, 명나라 이후에는 리강(麗江)나시족 목씨토사(木氏土司)의 통치를 받았다. 17세기부터 누강지역의 누족은 리강 목씨토지부 관할인 위시캉푸토천총과 엽지토천총의 통치를 받은 외에도 차와룽 티베트족 토천총과 라마사찰, 바이족토사의 관할을 받았다. 그외 누강지역에 이주해온 리수족 두령들도 누족의 토지를 강점했고 심지어 누족인들을 붙잡아 노예로 삼았다.

18세기 중반이후 누족지역의 사회생산력이 크게 발전하면서 여러가지 농작물을 재배하게 되고 수공업도 상당한 발전을 가져왔다.

신해혁명후, 중화민국정부는 1912년에 누족지역에 관리기구를 세웠고 후에 이를 행정위원공서 (行政委員公署)라 개칭했다. 1928년부터 1933년까지 민국정부는 세개 공서를 설치국(設置局)으로 개명하고 누강지역에 대한 통치를 강화했으며 누족인들에게서 여러가지 명목의 가렴잡세를 거두어 들였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의 기간 일본침략군이 노수현을 침범해 갖은 악행을 저질렀고 많은 누족인들이 “북벽로련 유격자위대”에 가입해 전선에서 싸움으로써 운남 서북전장의 전면승리에 큰 힘을 보탰다.

1950년 누강지역이 평화적으로 해방되고 누족인들은 자기운명의 주인이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창건이래 특히는 개혁개방과 서부대개발 전략이 실시되면서 누족인들의 노력을 거쳐 이들이 살고 있는 지방은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다. 지금에 와서는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고 인민들의 생활수준도 크게 향상되었다.

이들이 살고 있는 지방의 자치권리도 계속 강화되었다. 해방후 노수, 벽강, 복공, 공산에는 인민정권이 출범했고 정부는 여러 민족의 평등한 정치적 지위를 담보했다.

1954년 8월에 벽강과 복공, 공산, 로수 네개현을 포함한 누강리수족자치구가 설립되었고 1957년 1월에 자치주로 하고 란평현을 자치주에 포함시켰다.

1956년 10월 1일에 공산두룽족누족자치현이 설립되면서 누족인들은 여러가지 정치행사에 더욱 광범위하게 참여했다.

1989년에 누강리수족자치주는 “운남성 누족리수족자치주자치조례”를 반포했고 1991년에 공산두룽족누족자치현은 “공산두룽족누족자치현 자치조례”를 반포했다. 이로써 누족인들은 이 땅의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법률적으로 보장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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