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正善
2020-11-06 21:53:58 출처:cri
편집:朱正善

징족의 역사

징족의 역사

징족(京族)은 월족(越族)이라고도 부르며 그 민족언어는 징족어이다. 그 언어적요인이 복잡한 관계로 언어학자들은 징족어의 어계를 정확히 분류하기 힘들다고 평가한다.

징족은 그 주체가 동남아에 살고 있다. 중국 경내의 징족은 주로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의 방성항시(防城港市)에 분포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동흥시(東興) 강평진(江平鎭)의 만미(澫尾), 산심(山心), 무두(巫頭) 세개 바다섬에 살고 있다. 하여 이 세개 섬을 “징족3도(京族三島)”라고도 부른다.

징족은 베트남의 주체민족으로 이 나라 총 인구의 86%를 차지한다. 2010년에 있은 전국인구보편조사로 보면 중국 경내의 징족 총 인구는 2만8천명 정도이다.

징족은 고대 낙월(駱越)부락에서 발전되어 왔다.

징족의 조상들은 기원 16세기 경에 베트남으로부터 중국으로 왔으며 처음에는 무산도(巫山島와 강평진 부근의 채두촌(寨頭村)에 살다가 후에 만미, 산심, 담길(潭吉) 등 지로 터전을 넓혀갔다. 베트남의 주체민족인 징족은 과거 중국에서 월남인(越南人), 안남인(安南人)으로 호칭되었고 요족은 이들을 “교지인(交趾人)”이라 칭했다. 징족인들중에는 류(劉)씨와 완(阮)씨가 많은데 이들의 조상들은 원래 베트남에 거주하면서 고기잡이에 종사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한번은 이들이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오늘의 광서장족자치구 동흥시의 무두도에 이르렀다. 이곳이 인적이 없고 고기잡이에 유리한 지라 정착해 살았고 지금까지 약 16대 혹은 17대에 이르렀다. 한 세대를 25년으로 잡으면 적어도 5백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징족은 강평지역으로 오기전 이미 봉건사회 발전단계에 있었다. 이들이 중국 경내에 들어온 후 징족과 한족의 지주계급의 압박과 착취로 어업과 농업생산이 장시기동안 발전하지 못했다.

청나라 정부는 강평지역에 “강평순검사(江平巡檢司)”라는 행정기구를 설치했다. 1884년 중국과 프랑스간에 전쟁이 일어났고 강평의 징족거주지역은 프랑스 침략자들이 장악했다. 이들은 대량의 상품을 현지에 팔았고 특산물과 값싼 노동력을 약탈해 결국은 평강 지역의 경제명맥을 틀어쥐었다. 또 천주교를 전파해 징족인들을 정신적으로 마비시켰다. 이들은 정보수집과 자원조사 등 여러가지 불법활동에 종사함으로써 징족 지역의 어업, 농업생산을 심각하게 파괴했다.

제국주의와 봉건주의, 관료 자본주의의 장기적인 통치와 착취로 징족인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아무런 정치권리가 없는 고통스러운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부지런하고 용감한 징족인들은 한족, 요족(瑤族), 장족(壯族) 등 민족들과 함께 여러 번에 걸쳐 반제 반 봉건의 항쟁에 참가했다. 중국-프랑스전쟁 기간에 만미, 무두 등지의 징족과 한족 수십명이 만미촌 징족인 두광휘(杜光輝)를 두령으로 하여 “흑기군(黑旗軍)”에 참가했으며 프랑스 침략자들에 항거하는 최전선에서 싸웠다.

국민당통치시기에는 징족거주지역들에서 민족압박과 차별시정책을 실시하여 단동(團董)과 보갑(保甲)제도를 실행했으며 가렴잡세를 거두고 인부들을 징발했다. 징족인들은 이에 항거하여 여러차례 봉기를 일으켰다.

1921년 중국공산당이 창당된 후 징족인들은 공산당의 영도하에 반제반봉건의 기치를 더욱 높이 들었다. 대혁명시기 징족지역에서는 총공회와 농민협회를 세웠고 이현 조직들은 징족과 한족 등 여러 민족을 조직해 여러차례 시위를 단행했다.

1944년초에 일본제국주의가 징족지역을 침범하자 징족인들은 공산당이 강평지역에서 조직한 항일유격대에 적극 참가했으며 항일전쟁이 승리할 때까지 무장투쟁을 견지했다.

1945년 10월 중국공산당 광동남로특위(廣東南路特委)의 파견대가 10만대산근거지를 창설하고 유격전을 진행했다. 징족인들은 유격대에 젊은 청년들을 참가시켰고 군자금과 군량미를 보내주었으며 지주와 부자들의 재물을 몰수해 유격대를 지원했다. 이들은 또 유격대를 추포하는 국민당군에 용감히 맞서 싸움으로써 혁명역량을 보호했다.

1949년 이 지역의 유격대는 중국인민해방군과 함께 8개월의 짧은 시간내에 평강 등 거점들을 장악했으며 방성현 인민정부를 세웠다.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전에 징족지역은 계급분화가 심했다. 징족은 주로 어업에 종사하면서 농업과 염업도 함께 했다. 부농과 어업자본가들은 대량의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지주들은 어업도구, 농경지, 어로구역 등을 세주어 폭리를 취득했다. 농민과 어민들은 실물로 소작료를 바치는 외에도 지주집의 여러가지 노역을 담당해야 했다. 예하면 소작농 한명당 지주집을 위해 약 40일간 땔감을 해와야 했고 평소에는 지주집의 건물보수, 돼지우리만들기 등에 동원되었으며 경조사가 있을 때는 잡부로 일해야 했다.

과거 징족내부에는 “옹촌(翁村)”이라는 조직이 있었다. 옹촌은 촌장이라는 뜻도 포함하는데 연장자가 이 직을 맡아 마을의 규약집행을 감독하고 마을의 사무를 처리하며 제사를 주재하는 일을 했다. “옹촌”의 향약 제1조에는 촌민들은 세금과 소작료를 바치고 병역에 나가야 하며 이를 어기는 자는 처벌을 받는다고 규정되었다. 향약은 반동정부가 인민들을 통치하고 착취하는 도구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창건후 1952년에 징족3도에 만미,산심, 무두 세개 민족향을 설립했다. 1958년 5월 1일 징족민족향과 부근의 10만산장족요족차지구를 기반으로 동흥각민족자치현(東興各族自治縣)을 설립했다. 1956년에는 동흥각민족자치현이 광동성에서 광서장족자치구로 소속되었다. 1978년 12월 25일에는 방성(防城)각 민족자치현으로 개명했으며 1992년 9월에 동흥개발구가 설립되었다. 1993년 5월에 방성각민족자치현과 방성항구를 철폐하고 지구급 시인 방성항시를 내왔고 징족 3도는 방성항시 동흥경제개발구 소속으로 되었다.

1996년 4월에 현급시인 동흥시를 설립했고 이때부터 징족3도는 방성항시 동흥시 강평진 소속으로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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