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正善
2021-06-26 18:49:16 출처:cri
편집:朱正善

지노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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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노족은 중국에서 인구가 비교적 적은 민족의 하나이고 민족언어는 지노어를 사용한다. 그 언어는 한어-티베트어계 티베트미얀마어족 이족어갈래에 속한다. 지노족은 자체 문자가 없었으며 과거에는 나무나 대나무에 기호를 남기는 방법을 사용했고 숫자를 세거나 일을 기록할 때는 한자를 통용했다. 지노족은 주로 운남성(雲南省) 시솽반나 따이족(傣族)자치주 경홍시(景洪市)   지노산지노족민족향과 그 주변의 멍왕(勐旺), 멍양(勐養), 멍한(勐罕) 등 지에 집중거주하며 멍라현(勐臘縣)의 멍룬(勐侖), 샹밍(象明)에도 일부 지노족이 살고 있다.

지노족은 1979년에 정식으로 단일민족으로 확정되었으며 2010년 제6차 전국인구보편조사 통계로 보면 총 인구수가 2만 3100여명이다.

민족기원:

지노족의 민족기원과 관련해서는 토착민설과 남부이동설 두가지가 있다. 지노라는 단어는 그 선민들이 제줘산(杰卓山)에 거주할 때 “지노로크(基諾洛克)”라는 이름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지”는 외삼촌, “노”는 뒤를 따라 다닌다는 뜻으로 외삼촌 뒤를 따라다니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다. 지노족의 발상지는 “스제줘미(司杰卓米)”이다. 이는 지노산 동부변두리에 있는 해발 1440미터의 산이며 현재는 공명산(孔明山)이라 부른다. 지금에 와서도 지노족은 조상들의 이주노선을 말할 때 그 출발과 발상지를 이 산으로 꼽는다. 이는 오래전부터 지노족의 선민들이 지노산과 그 주변지역에서 살았음을 말해준다.

지노족이 지노산에 정착해 살 때는 모계사회 발전단계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전설에 의하면 “제줘”에 제일 먼저 거주한 사람은 한 과부인데 그 과부가 7남 7녀를 키웠고 이들이 결혼을 하면서 후에 인구가 늘어나고 두 개의 마을로 나뉘었다. 즉 이는 서로 통혼하는 두 쌍의 씨족을 말하는 것이다. 첫 쌍의 마을은 아버지 마을과 어머니 마을로 불렀고 이 마을에서 열개의 자식들 마을이 생겨났다. 이들이 지노산의 앞 부분을 차지했고 다른 한 쌍의 마을에서 파생된 자식마을들이 지노산의 뒷쪽에 자리잡았다.

현지인들은 원고시대에 홍수가 이 땅을 삼켰고 선량하고 용감한 오누이가 신선의 보호와 도움을 받아 살아남았고 여러가지 고난을 겪은 후 결국 부부로 되었다는 전설을 믿는다. 신선이 이들에게 조롱박씨를 주었고 이걸 심으니 집채같은 크기로 자랐고 그 속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조롱박을 열어보니 제일 먼저 지노인이 나왔고 이어서 한족, 따이족, 하니족인들이 차례로 나왔다. 후에 이들은 각자 자기의 낙원을 찾았다. 이 전설을 통해 지노족이 한족, 따이족, 하니족과 원고시대부터 긴밀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전설에 따르면 지노족은 보이(普洱), 묵강(墨江) 지어는 더 먼 북방에서 이주해 온것으로 되어있다. 이들은 민족대이동시 곤명(昆明)과 아산현을 경과했고 후에는 시솽반나 지역에까지 도착했고 최종적으로 지노로크에 정착하였다. 지노족의 마법사들은 망자의 혼백을 달랠 때 북방으로 보낸다. 지노족은 지노산에 도착한 후 “제줘”라고 하는 산마루에 있었고 지금까지도 지노인들은 이곳을 서로가 공유하는 곳으로 부른다. 이곳에서 지노족은 비교적 원시적인 채집과 수렵경제생활을 했고 그후 산지농업경제로 전환하면서 생활적으로 큰 발전을 가져왔다.

현재의 자료로 볼 때 지노족의 최초의 예속관계는 1160년이며 이 때 지노산은 바진왕족의 세습영지었다. 그러다가 원나라 때 운남에 행성을 설치한 후 시솽반나는 원나라의 통치권에 들어갔다. 명나라 때에는 처리군민선위사(車里軍民宣慰使)를 세우고 토사(土司)가 이 곳을 관리하기 시작해 청나라 때도 이 제도를 답습했다. 중화민국시기 정부는 지노산을 소멍양향 관할범위에 두었고 후에는 보갑제(保甲制)를 실시해 지노족의 상층 두령들 중에서 보장과 갑장을 선출했다.

1941년 지노산에 있는 28개 마을의 약 8천여명이 국민당 정부의 가렴잡세와 부역에 저항해 무장봉기를 일으켰고 지방정부는 봉기군의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전 지노족의 기본사회구조는 혈연이 아니라 부동한 씨족이 공동 거주하면서 형성된 지연단위인 농촌공사(公社) 구조였다. 이때의 매 촌사(村社)는 독립적인 하나의 마을이었다. 마을사이의 지경에는 칼이나 총과 같은 모양의 나무, 돌비석을 세워 두었고 그 지경안쪽의 땅은 그 촌사의 공유지로 다른 사람이 침범해서는 안되었다. 마을마다 통혼을 하는 두 개 이상의 씨족이 있었고 장로 두 명이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마을의 행정과 제사, 생산 등을 처리했다.

1950년 멍양에 구정부가 세워졌고 지노산은 멍양의 관할에 들어갔다. 1954년 4월 중국공산당과 인민정부가 파견한 민족실무팀이 지노산구에 들어가 당의 민족정책을 알리고 민족종교지도층과 유명인사들의 단합을 도모했으며 민족간 관계의 소통을 강화하고 생산을 크게 발전시켰다. 당과 정부는 지노족사회의 특징에 맞게 “단결, 생산, 진보”라는 방침을 제정하고 민주개혁을 거치지 않고도 이들의 생산문화를 발전시키는 방식을 취해 직접 사회주의에로 이행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이로써 지노족은 역사적인 비약을 실현하게 되었다.

1981년 지노로크공사 혁명위원회가 지노공사괸리위원회로 바뀌었고 1983년에 지노공사를 철폐하고 지노산구공소(公所)로 대체, 경홍현정부의 파견기구로 되었다. 1988년 초에 지노구를 지노산 지노족민족향으로 개칭했고 경홍현 관할에 두었으며 이 현 경내에는 지노족과 하니족, 부랑족 등 소수민족이 함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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