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东光
2021-08-25 10:19:12 출처:cri
편집:金东光

탄관상경(彈冠相慶)

   

탄관상경(彈冠相慶)_fororder_137.弹冠相庆

글자풀이: 떨 탄(彈tán), 갓 관(冠guān), 서로 상(相xiāng), 경사 경(慶qìng).

뜻풀이:①친구의 임관,승진을 축하하다. ②친구가 입사(入仕)하거나 승진하면

자신도 장차 임용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서로 축하하다.  

출전: 한(漢) 반고(班固)『한서•왕길전(漢書•王吉傳)』

 

유래: 서한(西漢) 소제(昭帝) 때 창읍중위(昌邑中尉)직에 있던 왕길(王吉)은 자가 자양(子陽)이었고 정직한 성품으로 늘 황제에게 간언을 하여 표창을 받았다. 왕길은 어릴 때부터 학문에 정진하였고 그 품행이 단정하여 주변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던 인물이다.

왕길의 이웃집에는 큰 대추나무가 있었고 대추가 탐스럽게 열린 나뭇가지가 담을 타고 왕길의 마당으로 넘어왔다. 왕길의 아내가 보니 대추가 먹음직한지라 몇알 따서 왕길에게 올렸다. 그후 왕길이 이를 알고는 아내의 행위가 부도덕한 것이고 이는 가풍을 어지럽힌 것이라 여겨 홧김에 아내를 집에서 쫓아냈다.

이웃집 주인이 이를 듣고는 불안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그는 사건의 발단이 대추나무가 담을 넘은 것이고 이때문에 왕길이 아내를 집에서 쫓아냈다고 생각하여 그 나무를 베어 버리려 했다. 이웃들이 이를 알고는 찾아와 대추나무 주인을 말리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왕자양이 아내를 다시 집에 돌아오도록 용서해 준다면 나무를 베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대추 몇알 때문에 부부간을 갈라 놓았으니 내가 무슨 낯으로 사람들을 본단 말입니까?”

마음씨 좋은 이웃들이 이 말을 왕길에게 전하니 왕길은 하는 수 없이 아내를 다시 집에 들였다. 이때부터 왕길의 고매한 품격이 널리 알려졌고 그후 조정에서 인재를  선발할 때 왕길은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었다. 입조 초반에는 낭관으로 있었고 이어 우승직을 제수받았고 그후에는 현령으로 승차했으며 얼마후 창읍왕부(昌邑王府)의 중위로 있게 되었다.

창읍왕은 사냥을 지나칠 정도로 즐겼다. 매번 사냥을 할 때면 수많은 백성들이 몰이꾼으로 동원되었는데 그 규모가 엄청났다. 이를 본 왕길이 이런 간언을 했다. “창읍왕께서는 사냥을 하시느라 매일 200리를 달립니다. 고을의 백성들은 이를 위해 농사일을 제쳐놓고 사냥에 동원되니 이는 농사수확에 영향을 줄 것입니다.”

창읍왕은 이를 받아 들이지는 않았지만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했고 왕길을 존경하게 되었다.

소제가 죽은 후 대장군 곽광(霍光)이 창읍왕을 황제위에 올리려 했다. 이에 왕길이 즉시 창읍왕에게 편지를 보내 권고했다. “대장군 곽광은 선제를 수십년간 보필하면서 추호의 실수도 없었습니다. 곽광이 국정운영에 능하니 주군께서는 보위에 오르신 후 조정의 대소사 처리를 그에게 일임하시옵소서. 하옵고 주군께서는 마음 내키는대로 처리하는 버릇을 고치고 매사에 조심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그러나 창읍왕은 왕길의 말을 귀등으로 흘려 보냈으며 제멋대로 일처리를 하니 결국 황제로 된지 한달도 못되어 폐위되었다.

조정에서는 창읍왕사건에 진노했고 창읍왕부의 관원들의 실직행위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조정대신들은 왕부의 관원들이 간언의 직책을 다하지 않았고 또 창읍왕의 잘못을 조정에 알리지 않아 일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여겼다. 이에 곽광이 원래 창읍왕부에서 임직했던 대소관원들을 전부 하옥하라 명했다. 그러나 심사과정에서 왕길이 여러번 창읍왕에게 간언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가벼운 처벌에 그쳤다.

공우(貢禹)는 자가 소옹(少翁)이며 왕길과는 한고향사람이고 절친한 사이였다. 공우는 유가경전에 박식해 박사(博士)로 임명되었으며 그후에는 하남령(河南令)으로 승차했다.

한나라 때의 관례에 따르면 조정에서는 해마다 세모가 되면 지방관원들의 실적을 평가하여 표창을 하군 했다. 공우는 상급자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 상급자의 힐난을 받게 되자 관모를 벗고 잘못했노라고 사과하자 상급자가 만족해했다. 허나 공우는 “관모를 이미 벗어 버렸으니 뭘 더 남길게 있단 말입니까”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선제 때 왕길이 다시 등용되어 익주자사(益州刺史)를 제수받았고 얼마후에는 박사간대부(博士諫大夫)로 되었다. 왕길의 복귀소식을 들은 공우는 기쁨을 금치 못해 모자의 먼지를 털면서 경하했다. 이에 사람들은 “왕길공이 관직에 있으니 공우공이 모자를 털었다”고 말했다. 그 뜻인즉 두 사람의 정견이 일치하고 뜻이 맞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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