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22 15:40:36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 내신] 2022년 4월 21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4월의 세번 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임봉해(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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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 목요일인 21일은 양력 올해의 111번째 되는 날입니다. 올 한해가 마감할 때까지 254일 남았습니다.

‘역사 속의 오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4월 21일은 ‘전국 기업가 활동의 날’입니다.

‘전국 기업가 활동의 날’은 중국기업관리협회, 중국기업가협회가 해마다 4월 21일 전국기업과 기업가를 조직하여 전개하는 기업가활동입니다. 이 활동은 기업들의 교류를 증진하고 또 그들에 대한 나라의 기대를 기탁했습니다. ‘전국 기업가 활동의 날’은 1994년 처음 성공적으로 개최된 후 지금까지 열렸습니다. 그동안 나라는 날을 따라 강성했고 갈수록 많은 기업가들이 굴기했습니다. 그들은 국제화한 흐름 속에 빛과 열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서기전 753년 로마성이 세워졌습니다.

1153년 금나라는 연경을 중부로 고쳤습니다. 연경은 오늘날의 베이징입니다.

1519년, 스페인 군인 에르난 코르테즈가 선대를 인솔하고 멕시코에 상륙했습니다.

에르난 코르테즈는 스페인 귀족 출신으로 대항해시대 스페인 항해가였고 군사가, 탐험가였으며 아즈텍 제국의 정복자였습니다.

1504년, 에르난 코르테즈는 서인도군도의 히스파니올라 섬에 정착했습니다. 7년 후 그는 쿠바를 출정하는 대열에 들어섰습니다. 이때 에르난 코르테즈는 멕시코의 일부 도시가 큰 재부를 보유하고 있으며 황금과 보석으로 가득하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 전설에 솔깃한 그는 1519년 탐험대를 인솔하여 멕시코에 침입했습니다. 탐욕으로 가득 찬 그는 선후로 아나웤 지역의 아즈텍인을 정복했으며 멕시코시티에서 천주교 사상을 선양했습니다. 그 후 북상하여 사우스 캘리포니아주를 탐색했습니다.

에르난 코르테즈는 1547년 12월 2일 스페인에서 사망했습니다.

1938년 4월 21일, 고 모택동 주석이 ‘평원 유격대에 대한 지시’를 내렸습니다.

이 지시는 평원 지역에서 유격전을 진행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지시는 또한 중국공산당과 팔로군은 하북과 산동의 평원 지역에서 광범위한 항일유격전쟁을 발전시킬 데 대한 방침을 단호히 취하고 될수록 제일 광범위한 군중의 공개적인 무장투쟁을 벌이며 유격대 그리고 생산을 탈리하지 않는 자위군을 조직하고 하루빨리 항일민주정권을 수립하며 근거지를 창설, 발전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1960년 4월 21일 중국 정주 황하대교가 건설되어 통차했습니다.

2010년 4월 21일, 중국 청해 옥주지진 전국 추모의 날 행사를 가졌습니다.

[간 주]

이 시간에는 ‘승려를 따라 찾은 옛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 “일엽편주를 타고 섬에 현신한 지장보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일엽편주를 타고 섬에 현신한 지장보살 

바다에 손을 내밀면 금방이라도 닿을 듯한 섬이었다. 이름도 잇닿을 의미를 가진 연도連島이었다. 기실 연도는 바다 건너 육지와 한데 이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섬 동쪽과 서쪽의 산이 서로 연접되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그럴지라도 육지의 강소성 연운항連云港은 바다의 이 연도와 기어이 한데 이어지고 있었다. 바로 앞에 두고 있는 연도와 뒤에 업고 있는 운대산雲臺山에서 각기 한 글자를 취한 지명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연운항의 옛 이름은 해주海州였으며 20세기 30년대 부두를 만들면서 비로소 연운항이라고 개명했다고 한다. 우리를 안내한 정鄭씨 성의 택시기사는 연도 역시 예전에는 배가 꼭 드나드는 문이라는 의미의 응유문應由門이라고 불렀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뒷이야기이지만, 이 응유문은 또 같은 발음의 응유산鷹遊山에서 파생된 지명이라고 전하고 있었다. 지방지 《운대산지雲臺山志》에 따르면 옛날 섬에는 정말로 매가 늘 떼를 지어 날아다녔다고 한다.

그때 섬에 매가 많았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유람객이 꼬리를 물고 있다. 연도에 강소성江蘇省의 으뜸으로 꼽히는 해수욕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도는 적어도 20년 전에는 사람들의 생활에는 몹시 불편한 섬이었다. 육지와 지척에 있었지만 필경은 배를 타고 왕래해야 했다. 태풍이 불어치고 파도가 높을 때면 단수斷水의 위험까지 감내해야 했다.

1993년, 섬과 뭍 사이에 언제가 생겨났다. 장장 6.7㎞의 이 언제를 만드는데 무려 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때 바닷가에서 산이 하나 사라지고 대신 바다에 언제가 하나 나타났던 것이다. 이 언제는 중국에서 제일 긴 언제로 알려져 있다. 위에는 왕복 2회선 도로가 자로 그은 듯 일매지게 쭉 뻗어있었다.

실은 공사가 끝나던 그때 언제에는 1회선의 도로밖에 없었다고 한다. 훗날 지속적으로 언제를 보강하고 길을 밖으로 넓혔던 것이다. 언제의 남쪽에는 또 갯벌처럼 평탄한 땅이 펼쳐지고 있었고 거기에는 대형 건물이 들어서고 있었다.

정말이지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상전벽해는’ 동진東晋 시기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에 나오는 말인데, 동해가 여러 번이나 뽕나무 밭으로 변했다는 마고麻姑의 말에서 유래했다.

연도는 비록 ‘상전벽해’의 고사성구처럼 《신선전》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벌써 ‘신선의 세계’처럼 이름이 난 듯 했다. 섬 기슭에 이르기 바삐 인파로 복닥복닥 하는 분위기가 갯내음처럼 해풍에 물씬 풍겨왔다.

연도에 인가가 들어선 것은 불과 수백 년 전의 명明나라 때이다. 그때 연유산에는 처음으로 군사가 상주했다. 응유산은 천연적인 바다병풍으로 되고 있었고 또 응유문은 바닷길의 문호門戶로 되고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 때 이곳에 군사를 주둔한 것은 왜구倭寇를 막기 위해서였다. 왜구는 그 무렵 중국 대륙의 연안과 한반도에서 약탈을 일삼고 다니던 일본 해적을 이르는 말이다.

이에 앞서 영유산에 나타났던 일본인은 기실 해적이 아닌 사절과 구법승이었다. 당唐나라 때 대륙과 일본의 내왕은 아주 빈번했으며, 견당사遣唐使와 구법승은 당나라로 왕래하던 도중 해주의 영유산을 경유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반도의 많은 구법승들도 영유산에 들려서 장안長安으로 향발했다. 와중에 신라의 구법승 자장(慈藏, 590~658)은 귀국한 후 신라 제일의 사찰 황룡사黃龍寺에 9층 불탑을 세우는데, 다섯 번째 층을 ‘영유鷹遊’라고 명명한다. 일각에서는 이 매가 백제 왕실의 상징이라고 하면서 이때의 ‘영유’를 백제의 이름으로 보기도 한다.

아무튼 그들이 하나 같이 모두 영유산에 나타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곳에서 시작된 해상 실크로드는 지중해의 동해안까지 이르렀으며 아시아와 유럽 대륙을 잇던 2천 년 전의 바닷길이었다.

그러나 고전명작 《서유기西遊記》에 나오는 명승 현장(玄奘, 602~664)은 하필이면 바다가 아니라 서역을 통해 천축국(天竺國, 인도)으로 다녀온다. 《서유기》는 당나라의 승려 현장(玄奘, 602~664)이 인도에 가서 불경을 가져온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명明나라 때의 신괴神怪소설이다.

《서유기》의 주인공 손오공孫悟空의 전신도 역시 애초부터 서역과는 십만 팔 천리 떨어진 이곳의 영유산 부근에서 출생하고 있다. 손오공이 괴석에서 태어나 원숭이들의 왕으로 등극했다고 하는 전설의 화과산花果山은 바로 연운항의 도심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현장, 즉 손오공이 보좌하던 삼장三藏 법사의 실제 모델도 이 화과산과 인연이 깊다. 동진 시기의 신괴소설 《수신기搜神記》는 동해 진광예陳光蕊의 세 아들이 천天, 지地, 수水 삼계를 관장했다고 서술한다. 도교는 천, 지, 수를 삼원三元이라고 이르는데, 동해 일대의 1,600년 전 옛 삼원궁三元宮은 화과산에 나타난다. 《서유기》에서 현장도 진광예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현장은 삼원궁이 있는 화과산과 떨어뜨릴 수 없는 혈연을 맺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서유기〉의 저자는 왜서 삼장 법사를 바닷길로 떠나보내지 않았을까?

솔직히 누구라도 머리를 갸우뚱할 대목이다. 더구나 《서유기》의 저자 오승은(吳承恩, 1510~1582)은 연운항 남쪽의 회안淮安 태생으로, 이웃한 영유산이 옛 바닷길의 시발점이라는 것을 모를 리 만무하다.

그럴지라도 영유문이 해상 실크로드의 대문으로 되는 데는 아무런 손색이 없다. 오늘날 영유문은 이름 그대로 문을 활짝 열고 억톤 물동량의 거대한 항구 연운항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종국적으로 영유산에 이름을 새겨 놓은 것은 뭐니뭐니 해도 신라의 구법승 김교각(金喬覺, 697~794)이다. 김교각은 훗날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평가를 받는 고승이다. 이 신분이야말로 유독 그가 영유산에서 소문을 타고 있는 이유가 아닐지 한다.

성인 김교각을 모신 사찰이라는 의미의 ‘금선선사金聖禪寺’는 소마만蘇馬灣에 위치하고 있었다. 선사 양쪽의 백미터의 긴 낭하가 산중턱의 수풀에 별유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소마만은 섬 북남 쪽의 작은 만으로, 명明나라가 멸망된 후 옛 대신 소경蘇京이 청나라에 반기를 들고 이곳에서 군사를 훈련하며 말을 길렀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그때 그 시절 소경이 기르던 말은 더는 소마만에 나타나지 않고 말이 물을 마시던 옛 우물만 홀로 산기슭에 남아 옛날의 감미롭던 물맛을 되새기고 있었다.

금선선사로 향한 산길은 옛 우물 부근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돌층계를 따라 선사에 오르니 금세 푸른 바다가 시야에 넘실넘실 달려오고 있었다. 옛날 김교각도 이곳에 서서 멀리 한반도의 고향을 바라보았을까…

김교각은 이곳을 지날 때 속명이 중경重慶이었으며 구화산에서 출가한 후 비로소 교각喬覺이라는 이 법명을 얻고 나중에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추앙을 받는다. 현지에서는 김교각이 해주에 상륙한 후 다시 배를 타고 양자강揚子江을 따라 불교의 영산靈山 구화산에 갔으며 이때 영유산의 진해사에 들렸고 게문을 남겼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진해사는 1,500년이 아닌 250년 전의 사찰이다. 게문의 저자는 김교각이 아닌 후세의 문인으로, 게문은 사찰의 역사를 분식粉飾하기 위한 위작僞作이라는 게 중론衆論이다.

영유산에 다시 유명한 승려가 나타난 것은 청淸나라 강희康熙 49년(1710)이다. 이때 승려 은산隱山이 이곳에 초가를 짓고 수행을 했다고 한다. 그 후 숙성宿城 법기사法起寺가 승려 보수普受를 이곳에 보냈다. 보수는 나중에 은산으로부터 의발衣鉢을 물려받았다. 보수는 “부지런히 수행하고 계율이 적절, 엄했으며” 건륭乾隆 17년(1761) 백간 낭하의 사찰을 세웠다고 《가경해주직이주지嘉慶海州直隶州志》가 기록하고 있다. 금성선사는 옛 진해사의 건축양식을 본 따고 있으며 옛 사찰의 모습을 기억에 비끌어 매고 있는 것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보수는 “자체로 자재資財를 모으고 탁발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사찰건축의 불사佛事는 한낱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일설에 보수가 땔나무를 하던 중 산속에서 보물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현지에는 아직도 명나라의 옛 대신 소경이 청나라에 반기를 들었을 때 영유산에 재물을 숨겨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진해사가 개관할 때 해주의 지주知州가 친림했으며 숙성 법기사의 주지승이 내림했고 또 주변 지역의 고승이 운집했다고 한다. 옛 진해사는 항일抗日전쟁 시기 전화戰火에 의해 훼손되었다. 현재 영유산의 서남쪽 비탈에는 ‘진해사’의 이름을 달고 있는 작은 불교장소가 있을 따름이다.

‘진해사’의 바로 뒤쪽 골짜기에서 수십 개의 불탑이 둑에 늘어서서 땜의 넘실거리는 푸른 물결 위에 신비한 불화佛畵를 그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멀리 앞바다의 위에 길게 누워 있는 언제는 마치 하늘 아래에 하나의 거대한 감탄부호를 찍고 있는 듯 했다.*

네, 옛 구법승의 역사는 반도와 대륙을 이은 교류사 그 자체입니다. 그들은 중국 대륙의 여러 지역에서 모두 문헌에 기록될 만한 사적을 남겼습니다.

‘일엽편주를 타고 섬에 현신한 지장보살’의 이야기었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계속하여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북대하는 하북성(河北省) 북단의 해변 마을로, 중국에서 유명한 휴양지입니다. 이곳에는 화북지역 언어문화의 ‘외로운 섬’이라고 불리는 한 조선족마을이 있는데요, 이 마을의 이름을 뭐라고 부르겠습니까?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중국의 유명한 휴양지인 하북성 북대하에는 화북지역 언어문화의 ‘외로운 섬’이라고 불리는 한 조선족마을이 있는데요, 이 마을의 이름을 뭐라고 부르겠습니까.

네, 금주에는 길림성 연길의 박철원 청취자가 함께 퀴즈의 정답을 보내왔습니다.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임봉해(MC),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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