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30 17:25:58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2년 6월 30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6월의 다섯번 <청취자의 >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 함께하는 아나운서 임봉해(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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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목요일인 30일은 6월의 제일 마지막 날입니다. 양력 한해의 181일째 되는 날입니다. 한해가 마감할 때까지 184 남았습니다.

1994 6 30, 중화예술박람회가 상해에서 열렸습니다.

1995 6 30, 중국 건설부와 국가통계국에서 공동 조직한 전국 도시 시정 공용시설 전면조사사업이 정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대규모의 도시 시정 공용시설 전면조사는 공화국이 창립된 40여년 이래 이번에 처음 진행되었습니다. 전면조사와 심사, 확인을 통해 처음으로 중국 도시 공용사업과 시정공정 14 업종의 시설 상황을 분명하게 627 도시가 포함되었습니다.

6 30일은 세계 청년과 학생 연환축제의 날입니다. 연환축제는 세계 청년과 학생 평화친선연환축제라고 부릅니다. 세계청년연환축제 본부가 헝가리에 설립된 세계민주청년연맹에서 주최합니다.

역대로 규모가 제일 연환축제는 1957 모스크바에서 열린 6 세계청년연환축제였습니다. 131 나라 3 4천여명 청년들이 축제에 참가했습니다. 연환축제에서 소련 명곡 모스크바 교외의 세계에 유행되었습니다. 참가국이 제일 많은 것은 1989 평양에서 열린 13 세계청년연환축제로, 177 나라가 참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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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토요일인 7 2일은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가 베이징에서 개국한 72주년 기념일입니다.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개국 72주년을 축하면서 오랜 청취자인 길림성 장춘의 김수금 청취자가 축하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청취자의 ]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가 조선어로 보도와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세계 인민들에게 친선의 정을 전하고 평화와 정의를 추구, 수호하며 중국을 세계에 전하고 국제정세를 알리면서 72년간 걸어온 위대하고 빛나는 성과를 이룩한데 열렬한 축하를 드립니다.

방송개국 당시 방송일군 4명이 책상 4개와 책상위에 놓인 2인용 탁상등 하나, 그리고 원고와 서류함, 고물 같은 진공관 라디오 대로 방송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어렵고 간소한 상황에서 세계에 울린 전파는 중국의 발전과 위대한 성과를 알려줬습니다. 얼마나 흉금을 울리는 자랑한 방송이었습니까!

저는 2011년부터 방송국과 인연을 맺은 오늘까지 옹근 11년을 방송을 청취하고 많은 지식을 전수 받았으며 거의 달마다 감수 등을 적어청취자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매일 아침 조선어방송을 들을 때마다 아름다운 언어, 충실한 내용에 만족을 감명 깊게 느낍니다.

저는 방송국에서 진행되었던 해남 지식경연, 중한수교 20주년 기념지식경연, 중국국제방송 개국 70주년 지식경연에 참가하여 각각 2등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경제전망대 프로그램에서 진행된 지식경연 경제퀴즈 참가하여 경제 퀴즈왕으로 당선되었으며 연말에는 경제 퀴즈왕 상품까지 받았습니다.

방송과 청취자는 물과 물고기 사이의 관계로 서로 떠날 없습니다. 김동광 주임, 송휘 아나운서, 한창송, 아나운서, 임봉해 아나운서가 우리 장춘에 오셔서 만나 많은 사연과 뜨거운 정을 따끈따끈하게 나눴습니다. 방송국에서는 장춘 청취자들에게 라디오 선물했습니다. 저는 어느 한번은 장춘을 찾은 방송국 임직원님들에게 청국장을 가져와 대접할 있었습니다.

장춘의 청취자들은 방송을 아주 사랑하고 아주 열심히 청취하고 있습니다. 방송은 소식의 전파자, 지식의 전수자입니다. 방송은 많은 지식을 전수해 주기에 청취자에게 감동을 줍니다.

7 2일의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개국 72주년에 즈음하여 우리 로인협회 악대 등은 코로나 사태 시기 온라인 재택활동으로 음악합주 나와 나의 조국 편집해서 보냅니다.

노래의 주선율은 김예란 선생의 전자풍금 연주, 박룡익 선생의 바이올린 연주, 진룡득 선생의 취관 연주, 색스폰 연주, 김강 선생의 피리 연주로 합주되었습니다.

우리 노인악대의 합주 음악으로 방송국 개국 72주년을 열렬히 축합니다.

[음악 노인악대 합주]

, 중국국제방송 조선어부 방송 개국 72주년을 기념하여 중국 길림성 장춘시의 김수금 청취자가 보내온 축하서한 내용이었습니다.

기회를 빌어 11년을 하루 같이 우리 방송을 열심히 청취한 김수금 청취자를 비롯한 여러 청취자에게 거듭 감사를 드립니다.

시간에는 승려를 따라 찾은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 천태산의 비문에 적힌 삼국유사 이야기 말씀드리겠습니다.

천태산의 비문에 적힌 삼국유사 이야기

천태산(天台山) 오악五嶽 못지않게 소문을 놓는다. 절강성浙江省 남부에 위치하는데, 나라 자미성紫微星 지키는 , , 삼태성三臺星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정말로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을까, 주성主星 병풍처럼 뭇별이 옹위하듯 주봉을 산봉우리들이 연꽃잎처럼 에워싸고 있다.

산이 크니 골이 깊었다. 지난 세기 7,80년대까지 시내 행차라곤 하지 못한 촌민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현대판 은사들의 은거 이유는 금방 같았다. 산중에 있는 마을 석량石梁에서 10 산길을 내려 다시 현성까지 두발로 닿으려면 하루 나절의 시간을 허무하게 길에 널어놓아야 했던 것이다.

그대로 범속의 세계를 떠나려는 수련자의 첫손 꼽히는 도장이였다.

기실 천태산은 산수의 경치로도 빼어났다. 봄에는 두견화가 산을 울긋불긋 물들이고 겨울에는 설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고 한다. 석량이라는 마을 자체는 바로 폭포가 쏟아져 내리는 골짜기에 바위가 대들보처럼 얹혀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천태산은 나라 벌써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전당시全唐詩 나오는 2천여 명의 시인 가운데서 이백李, 두보杜甫 3백여 명이 천태산을 다녀갔다고 전한다. 천고의 기인이라고 불리는 나라 때의 여행가 서하객徐霞客 일생동안 번이나 천태산에 올랐으며 천태산 하나를 두고 편의 여행기를 남겼다.

지금도 천태산에는 봄부터 구경 나들이로 산을 오르는 인파가 붐빈다고 한다. 아니, 때문에 천태산의 산길이 미어질 지경이란다. 그러나 우리가 산을 오르는 시기가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하다고 기사가 말했다. 눈이 녹아서 없고 꽃도 아직은 피지 않아 구경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겨울 막바지의 주봉 화정봉華頂峰으로 오르는 산길은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가속 페달을 밟는 내는 기사에게 속력을 줄이라고 자주 소리를 질러야 했다. 자칫하다간 산정의 고찰에 이르기 전에 나의 몸을 공양물로 올리게 같았다.

화정봉 정상의 화정사華頂寺 후진後晉 천복天福 원년(936) 설립된 것으로 전한다. 원래 화정원각華頂圓覺 도장으로 불리다가 나라 치평治平 3(1066)에는 선흥사善興寺 개명했고 민국(民國, 1912~1949) 화정강사華頂講寺 불렸다. 문화대혁명 시기 극좌운동의 충격으로 훼손되었고 근년에 다시 개축했다고 한다.

사찰의 풍경소리를 귀에 듣기도 전에 먼저 시주 해야 했다. 화정사는 천태산 화정국가삼림공원 일부로 되고 있었으며, 따라서 인민폐 50원을 내고 입장권을 구매해야 했던 것이다.

정작 화정사에는 부처에게 보시를 하는 불자들이 없었다. 사찰은 보수를 하고 있었고 승려가 없는 불전에는 인부들이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화정봉은 실은 사찰보다 일명 모봉茅蓬이라고 하는 초막으로 소문이 났다. 통상 불도를 수행하는 곳은 이라고 하며 작은 곳은 암자, 이보다 초라한 곳은 모봉이라고 한다. 옛날 화정봉에는 승려들이 행하면서 기거하던 모봉이 수십 채나 있었다고 전한다.

고승 지의(智顗, 538~597) 바로 화정봉의 모봉에서 실상의 깨달음을 크게 얻었으니, 그가 창시한 천태종天台宗처럼 유명한 화정개오華頂開悟라는 단어가 이로써 세상에 등장한다.

지의 대사는 화정봉에서 10년을 수행했다. 아름다운 풍경과 마음에 일어나는 번뇌의 싸움을 겪은 시기를 천태의 은거라고 말한다. 그가 고행을 하던 어느 새벽 어디선가 신승神僧 문득 나타났다. 신승의 계시를 받고 지의 대사는 화정개오 깨달음을 크게 얻으며 마침내 실상을 체달體達 했다고 전한다.

역대 고승을 적은 화정사의 비문에 지의 대사는 번째 순위로 적혀 있었다. 일찍 동진(東晋, 317~420) 시기부터 화정봉에는 벌써 고승이 기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실 화정봉의 수련 역사는 이보다 이르다. 동한(東漢, 25~220) 말년, 도인 갈현葛玄 화정봉에서 수도를 했다. 갈현은 도교 유파의 4 천사天師 사람으로 존숭을 받는 인물이다.

불교가 전래되기 전부터 수행자들은 모두 깊은 산속에서 수련했다. 단군檀君 같은 고조선의 성현들도 그러했다. 세속의 소란함을 떠나 한적한 산속에 머무르면 원력原力 굳게 세우고 체달의 깨달음을 얻기 쉬웠던 것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화정봉의 도인과 승려는 차탁에서 함께 만난다. 차는 산속의 수행에 지친 몸을 닦고 수마睡魔 피곤을 쫓을 있었다. 사실상 차를 심고 마시는 과정도 하나의 수행이었다. 초기의 수행자 갈현이 화정봉에 차를 심고 마셨고 훗날의 승려들이 화정봉에 차를 심고 마셨다. 화정산의 운무雲霧 속에서 만들어진 차는 나중에 천태산의 특산물이요, 전국의 명차로 거듭난다.

각설하고, 화정사의 비문에는 천태종을 전수 받은 반도의 승려가 나타난다. 고려의 승려 반야(波若, 또는 若라고 적는다)이다. 반야는 범어梵語 prai 음역한 한자를 다시 옮긴 우리말로 지혜 뜻한다. 이름은 지의 대사의 수제자를 제치고 바로 지의 대사의 뒤에 적혀 있다.

반야가 언제 어디서 출가하였는지는 없다. 불조통기佛祖統紀, 속고승전續高僧傳 이에 대해 반야가 고려인이며 속성이 씨라고 밝히고 있을 뿐이다. 이런 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반야는 남진(南陳, 557~589) 금릉(金陵, 지금의 남경) 와서 지의 대사의 설법을 들었다. 반야는 지의 대사의 설법을 듣고 이치를 깊이 이해했다고 한다. 지의 대사가 금릉에서 법화경法華經 강설한 때가 585년이니, 유추하면 반야의 이때의 나이는 20 중반이었다. 반야는 대륙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계속 불법을 익히다가 596 다시 지의 대사를 찾아간다. 지의 대사의 심오한 강설은 그의 가슴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지의 대사는 천태산에서 머물며 교화를 펴고 있었다. 나중에 그는 선법을 전해주길 청하는 반야에게 천태산의 최정상인 화정봉에 올라가서 두타행頭陀行 수련하도록 지시한다. 두타행은 출가 수행자가 세속의 모든 욕심이나 속성을 버리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닦으면서 참기 어려운 고행을 참고 행하는 것을 말한다. 모름지기 지의 대사는 혹독한 두타행을 이겨낼 있는 반야의 뛰어난 근기를 읽은 같다. 자신이 바로 6,7년간 화정봉에서 홀로 두타행을 하면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 아닐지 한다.

드디어 반야는 석장 하나에 의지한 홀로 화정봉으로 향한다. 돌로 만든 계단의 좁은 길이 산기슭에서 화정봉으로 구불구불 가파르게 이어지고 있었다. 반야의 화정봉의 수행도 산길처럼 어려운 고행이었으리라. 그때부터 반야는 장장 16 동안 밖의 세상에는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다.

현재로서는 반야가 깊은 산속에서 어떻게 홀로 살았는지, 수행의 경지가 어디까지 이르렀는지 길이 없다. 그가 산속에서 수행할 옷이나 음식은 어떻게 해결하였는지는 역시 미스터리로 되고 있다. 지의 대사는 5,60 밖의 화정봉에 미리 옷이나 음식을 마련해두었지, 아니면 지의 대사의 경우처럼 신승神僧 반야의 수행을 돕기 위해 화정봉에 화현化現 했는지 궁금한 부분이다.

어찌어찌 해도 보석이라면 어디서든지 빛을 발하기 마련이다. 반야의 신이神異 행적은 끝끝내 산밖에 정체를 드러낸다. 나라 대업大業 9(613) 2, 반야는 홀연히 화정봉을 떠나 천태산 서남쪽의 불롱봉佛隴峰으로 내려왔다. 불롱은 산에 부처의 형상이 자주 보인다고 해서 불리는 이름이다. 불롱봉은 지의 대사가 이곳을 수행지로 정한 세운 사찰이 있었으며 황제로부터 수선사修禪寺라는 이름이 하사되었다.

산길을 타고 걸어오는 반야는 더는 속세의 사람이 아닌 했다. 반야의 뒤에는 하얀 옷을 사람 명이 옷과 발우拔羽 받쳐 들고 뒤따르고 있었다고 한다. 앞에 이르자 명은 곧바로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

속고승전 기록의 뒤에 밖에서 보인 신령함이 이러할진대 산속의 신통과 이적異迹 상고相考하기 어렵다 진술하고 있다.

반야는 수선사를 지나 산기슭의 국청사에 도착했다, 지의가 입적한 이듬해 수양제隋煬帝 국청사國淸寺 창건하여 천태산의 중심지로 삼고 수선사는 도장으로 되고 있었다. 국청사는 원래 이름을 따서 천태사天台寺라고 했다가 절이 서면 나라가 맑아진다 글귀를 빌어 개명한 이름이다.

국청사에는 지의 대사의 수제자인 지월智越 주지를 맡고 있는 지인들이 아직도 일부 있었다. 반야는 승려들을 불러 만나 깜짝 놀라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속세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네. 여러 스님들과 이별을 하고자 이렇게 산을 내려왔네.

며칠 반야는 52세의 나이로 입적하였으며 화정봉에 매장되었다. 반야의 장례식 승려나 신자는 물론 현지의 관리와 백성들이 구름처럼 모여왔다고 한다. 산중에서 16 동안 오로지 수행에 전념했고 수선사에서 신이함을 보인 승려라는 소문은 벌써 동네방네 전해졌던 것이다.

반야는 고려 후기에 승려 일연一然 지은 5 3책의 사서 삼국유사에도 짤막한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승려 반야는 중국 천태산에 들어가 지자(智者, 지의 대사를 이르는 ) 교관敎觀 받았다. 신이神異 사람으로 산중에 알려졌다가 죽었다. 당승전唐僧傳에도 또한 실려 있는데 자못 영험한 가르침이 많다.

화정사의 비문은 바로 삼국유사 이야기를 반증하고 있는 셈이다. 반야는 1 4 처음 천태종의 교학과 행법이 체계를 이뤘을 개산조인 지의 대사의 문하에서 직접 천태 교관을 전수 받은 반도의 스님이었다. 그러나 반야는 국청사에서 적멸寂滅하면서 종당에는 천태종을 반도에 전래하지 못했다.

천태종이 반도에 배를 타고 건너간 것은 그로부터 5백년이 지난 후였다.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천태 교단의 중심지 국청사를 찾아오는 것이다. 의천은 국청사에서 수도한 반도에 돌아갔으며 2 반도에서 천태종을 창시했다.

그때 의천은 송나라 상선을 타고 밀주密州 상륙한 해주海州, 명주明州 경유하는 실크로드를 따른 구법 노선도를 세상에 남기고 있다.

, 실제로 의천은 거짓 하나 없는 왕자로, 고려 11 문종文宗 넷째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로써 천태산에는 삼국유사 아닌 하나의 이야기가 화려하게 등장하는 것입니다.

승려를 따라 찾은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 천태산의 비문에 적힌 삼국유사 이야기 말씀드렸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계속하여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해마다 5 19일은 중국 관광의 입니다. 이날은 천대산 일기 시작된 날이라고 해서 생긴 명절인데요, 천대산의 일기 어느 책에서 나오는 글이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5 19 중국 관광의 천대산 일기 시작된 날이라고 하는데요, 천대산 일기 어느 책에서 나오는 글이겠습니까.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16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

MC: ,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시간 진행에 임봉해(MC),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 함께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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