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8월의 첫번 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임봉해(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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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목요일인 8월 4일은 양력 올해의 216일째 되는 날입니다. 올 한해가 마감할 때까지 149일 남았습니다.
‘역사 속의 오늘’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2022년의 8월 4일은 칠석 연인의 날입니다. 칠석은 중국의 전통적인 명절입니다. 음력으로 계산하면 2022년 음력 7월 초이레 날에 대응하는 날은 양력으로 8월 4일입니다.
칠석날이면 따로 먹는 음식이 있습니다.
첫째, 물만두를 먹습니다.
칠석날 물만두를 먹는 것은 중국 산동성 남부의 조현, 평원 등 지방의 음식 풍속입니다. 가까운 사이의 처녀 일곱이 물만두를 빚는데, 동전 하나, 바늘 하나, 대추 하나를 각기 세 개의 물만두에 넣었습니다. 전하는데 따르면 돈을 넣은 물만두를 먹게 되면 복이 내리고 바늘을 넣은 물만두를 먹게 되면 손재주가 있게 되며 대추를 넣은 물만두를 먹게 되면 일찍 결혼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둘째, 밀가루튀김 음식 교과
절강성의 여러 지역에서는 이날 밀가루로 여러 가지의 모양을 빚은 후 기름에 튀깁니다. 이런 음식을 ‘교과(巧果)라고 부릅니다. 저녁이 되면 뜰에 교과, 연밥, 마름 등 음식을 차립니다. 칠석날의 식품에서 밀가루튀김 음식의 교과가 제일 유명합니다.
셋째, 소를 넣은 떡
칠석날이면 많은 민간 떡집에서 직녀 형상을 빚은 떡을 찝니다. 소를 넣은 이런 떡 빚기 풍속은 아직도 중국의 일부 지역에서 유전되고 있습니다.
네, 8월 4일은 일본의 젓가락 축제의 날입니다.
젓가락은 중국. 한국, 일본의 식사 문화를 상징하고 3국의 문화적 동질성과 다양성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해마다 8월 4일이면 일본은 젓가락 축제를 열고 하루세끼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젓가락에 감사를 표합니다.
사회의 진보와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젓가락의 역할은 갈수록 사람들의 중시를 받고 있습니다. 일본과 서양의 음식문화를 비교적인 시각에서 볼 때 일본의 젓가락은 서양의 포크와 같으면서 또 서로 다릅니다. 양자는 모두 음식 도구이며 서로 내용이 풍부한 문화 캐리어입니다. 젓가락은 아주 작은 음식도구이지만 일본인의 물질생활은 물론 정신문화 영역에서 모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간 주]
입추를앞두고 있지만 아직 무척 덥습니다.
즐거운 여름 휴가를 보내시길 바란다면서 한국 김연준 청취자가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청취자의 벗]
무더운날씨가 지속되는 가운데 태풍이 비켜 가면서 소나기가 자주 내리고 있습니다.
한국의 코로나 확진자는 다소 증가세를 보이는데 일일 평균 팔만명대의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중증 환자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저도 지난달 확진되어 한동안 집에만 머물러야 했으며 처방한 약을 복용하며 건강을 빠르게 회복해 완치되었습니다.
직장에서도 최근 몇명의 확진자가 발생해 긴장하고 있으며 정부에서 4차 접종을 시작해 저도 접종을 받을 예정입니다
지난주 제주로 하계휴가를 다녀 왔습니다.
외국인 관광객이 없어 주요 관광지는 한산했으며 한라산 정상인 백록담에 오르고 생각하는 정원 등을 여행했습니다.
생각하는 정원은 중국의 주요 인사들이 많이 방문했던 곳으로 50여년간 황무지를 개간해 아름다운 분재공원으로 만든 곳입니다.
제가 방문한 날이 개원 30주년이 되는 날로 성범영 원장님을 만나 차도 얻어 마시고 원장님 도서에 서명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차를 마시면서 중국 국가 지도자들의 방문과 기타 중국과의 인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는데 특히 강택민 주석과 호금도 주석의 방문과 관련된 얘기들을 많이 들려 주었습니다.
생각하는 정원 내에는 중국 주요 지도자들의 친필과 어록,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중국어로도 잘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성범영 원장께서는 코로나 이전에는 중국 관광객이 많이 방문했으나 지금은 줄어 아쉽다면서도 한중수교 30주년이 되는 금년에도 기념행사를 개최하려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CRI 청취자중 제주 여행을 계획하고 계시다면 생각하는 정원을 꼭 방문하시길 추천 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김연준
8월 2일
네, 무더위가 아직도 기승을 부리고 코로나가 그냥 사라지지 않고 있는데요, 김연준 청취자를 비롯해서 여러 청쥐자들이 모두 건강관리 잘 하셔서 즐거운 여름휴가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간 주]
건군절은 이름 그대로 군인들에게 축복을 하는 날입니다.
1927년 8월 1일,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중국공농홍군이 남창에서 첫 총소리를 울린 후 중국 노동자계급과 농민들은 드디어 인민들에게 속하는 대오가 있게 되었습니다. 2022년 8월 1일은 중국 건군절의 95번째 기념의 날입니다.
이날을 기념하여 길림성 연길시의 박철원 청취자가 ‘당신들은 가장 사랑스런 사람들입니다’라는 소식을 보내왔습니다.
[간 주]
<8.1>건군절 95주년을 맞아 26일 연길로인뢰봉반에서는 <로전사의 집>을 찾아 13명 참전 로전사들을 모시고 즐거운 련환모임을 가졌다.
로인뢰봉들은 먼저 <로전사의 집>에 진렬된 항미원조전장터의 실물과 일본군 중국침략 죄증 실물을 참관하며 로전사의 해설을 들었다.
“우리는 어제날의 당신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가장 사랑스런 사람입니다”. <8.1>헌례사는 로전사들의 심금을 울려 주었으며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과 <중국인민 지원군 군가>가 울려펴지자 모두들 기립하여 우렁차게 합창하였다.
“당신들의 땀물과 피물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의 행복이 있을수 없습니다.” 로인뢰봉반에서는 <로전사의 집>에 사랑의 성금 2000원을 기부하고 군인아주머니였던 김봉자로인이 한뜸 한뜸 정성들여 만든 신발창 60개를 선물하면서 그옛날 전쟁터로 나가는 남편을 바래던 때를 상기하였다.
이어 <공산당이 없으면 새 중국이 없다>, <본보기 뢰봉 따라배우자>, <고향의 봄> 세 곡을 합창하고 광장무 <당에 드리는 노래>에 이어 소년아동무용, 춤 <행복한 로인>, 자매대창, 무술표연 등 다채로운 프로들을 선물하였다. 조선어와 한어로 엮어진 시랑송 <우리는 새시대 로인뢰봉>은 더더욱 박수갈채를 받았다.
공훈메달을 한 가슴 가득 단 로전사들도 달려나와 그제날의 노래도 부르고 춤판에서 덩실덩실 돌아가며 환락의 장을 만들었다.
[간 주]
이 시간에는 ‘승려를 따라 찾은 옛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 “산중의 검은 샘물을 마시던 명승의 이야기”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산중의 검은 샘물을 마시던 명승의 이야기
산중의 옛 이야기는 웬 농가의 뜰에서 발견된 비석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광양산廣陽山의 산 고개는 마치 담처럼 이 농가의 마을을 에워싸고 있었다. 광양산은 하북성河北省 남부의 명산으로 삼면 모두 해를 볼 수 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산은 높아서가 아니라 신선이 있어서 이름이 나는 법”, 도교의 교조敎祖 노자老子가 《도덕경道德經》을 쓴 후 바로 이곳에 은거하면서 수련했다고 전한다.
솔직히 사장촌寺庄村도 이름처럼 산중에서 수련하는 사찰 마을을 연상케 하고 있었다. 택시기사 임씨任氏는 형태邢台의 도심에서 불과 80㎞ 상거한 곳에 이런 산골 마을이 있는 줄은 여직 몰랐다고 한다.
산속의 촌락은 대개 흙집이나 초가이지만, 이곳은 흙처럼 흔한 돌을 쌓아 집을 짓고 있었다. 농가의 뜰에 뉘어있는 옛 비석도 원래는 식탁 대용품으로 쓰였다고 한다. 네모반듯한 돌비석은 이리저리 손질할 품을 덜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 비석이 있었던 옛 사찰은 칠천사漆泉寺라고 불렸다고 현지의 지방문헌인《사하현지沙河縣志》가 기록하고 있다. “칠천사는 (당나라) 정관貞觀 5년(631) 칙령으로 설립”한 황실사원이며 “칠천漆泉이 사찰의 왼쪽에 있는데 그 색깔이 옷처럼 검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는 것이다.
샘물은 사찰의 이름을 만들었고 또 형태의 지명을 만들고 있었다. 나라 이름 형邢은 옛날 우물 정井과 통했다. “혈지穴地에서 물이 나오니 정井이라고 한다”고 《강희자전康熙字典》이 해석한다. 형태는 옛날부터 샘물천지로 소문난 고장이었으며 이에 ‘따라 정방井方이라고 불렸다. 상고시절 황제黃帝가 형태 일대에 우물을 파고 밭을 만들었으며 성읍을 쌓고 거주했다. 후세의 사람은 황제의 이 공덕을 기리기 위해 우물 정井과 고을 읍邑 두 글자를 하나로 합쳐 나라 형邢을 만들었다고 한다.
비석은 마을은 물론 시에서도 다 알고 있는 ‘보배’라고 집주인이 자랑했다. 언제인가 한국의 학자들이 돌집에 찾아와서 비문의 탁본을 만들어 갔다고 한다.
사실상 이 비석 조각은 진씨네 집에서는 그저 ‘툇마루’로 되고 있을 뿐이었다.
《대당광양칠천사혜각선사비大唐廣陽漆泉寺慧覺禪師碑》는 2014년 현지의 고고학 요원들이 칠천사 옛터를 발굴하면서 발견되었다. 뒤미처 누씨樓氏 성의 한국 유학생이 논문 ‘새로 발견된 신라 입당구법승 혜각 선사의 비명碑名’을 발표하면서 또 한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혜각 선사는 6조 혜능(慧能, 638~713)과 7조 신회(神會, 670~762)의 법맥을 이은 계승자이다. 그는 대학자 최치원(崔致遠, 857~?)에 의해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에 소개될 정도로 신라 최고의 명승이었다.
혜각 선사의 비석은 전체 높이와 넓이가 각기 215㎝와 104㎝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문 내용을 분석한 누씨 성의 유학생 논문에 따르면 혜각 선사는 유식학唯識學이 성행했던 신라 성덕왕(聖德王, ?~737) 때 선종宗禪을 배우기 위해 입당入唐했다. 혜각 선사는 7조 신회의 직계제자로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그는 형주(邢州, 형태) 개원사에 6조 혜능 비석을 세우는 등 하북 지역에서 남종선南宗禪의 권위를 확립했던 것이다.
칠천사는 형주 나아가서 전국에서 남종南宗의 ‘돈오선종頓悟禪宗’ 중심사원이었다. 사찰을 지을 때 당나라의 명장 위지경덕尉遲敬德이 직접 현장감독을 맡았다고 한다.
위지경덕은 민간에서 신격화되어 저택의 수호신 즉 문신으로 되고 있는 인물이다. 유불선의 성현과 신선의 사적을 서술한 명나라 때의 저서 《삼교원류수신대전三敎源流搜神大全》은 문신의 연원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은 일찍 싸움터에서 사람을 무수히 죽였다. 그래서 즉위한 후 밤마다 꿈자리가 좋지 않았다. 귀신들이 날마다 악몽에 나타나서 궁전 내외에 기와와 벽돌을 뿌리며 소리를 지르지 몹시 두려워했다. 신하들은 원수 진경秦琼과 대원수 위지경덕 두 사람이 밤중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소지한 채 궁문 양쪽을 지키게 할 것을 제안했다. 그날 밤 과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또 날마다 이러했다. 시간이 오래되자 이세민은 두 장군이 밤마다 고생하는 것을 걱정하여 궁중 화공에게 두 눈을 부릅뜨고 손에 무기를 든 갑옷 차림의 두 장군의 그림을 그려서 궁문 양쪽에 걸어놓게 했다. 그때부터 귀신이 나타나지 않았다. 훗날 민간에서 이를 따라 문신 풍속이 생기게 되었다.”
민간에서는 문짝에 진경과 위지경덕 두 영웅인물의 그림을 붙이고 집안의 평안을 수호하는 신으로 간주했다. 재미있는 일은 한때 이세민의 당나라 군대를 뒤쫓아 하북 일대에 이르렀던 고구려의 명장 연개소문淵蓋蘇文 역시 이런 문신으로 대접을 받았다는 것이다. 명․청明․淸과 민국(民國, 1912~1949) 시기, 형태 북쪽의 석가장石家庄 일대를 중심으로 하북성의 많은 지역에서 연개소문은 문짝에 붙어있는 수호신이었다고 한다.
어찌됐거나 형태 부근에서 이세민의 군대를 뒤쫓은 적장은 연개소문이 아닌 두건덕(竇建德, 573~621)이라고 전하고 있다. 두건덕은 수隋나라 말, 당나라 초 하북 일대에 웅거하고 나라를 세웠던 농민봉기군 수령이다.
이세민은 형태 일대에서 두건덕의 부대와 격전을 벌였다. 형태의 서남부에는 그때의 유적이 적지 않게 남아있다. 칠천사의 뒷산에는 이세민의 군대가 주둔하던 진왕채秦王寨가 있으며 북쪽에는 진왕호秦王湖가 명승구로 거듭나고 있다. 생사의 위험에서 누군가 이세민을 구했던 일도 전설이 아닌 것 같다. 칠천사의 부근에는 어가를 구했다는 의미의 구가촌救駕村이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현재 아홉 가구라는 의미의 동명의 촌명 구가촌九家村으로 불린다.
칠천사는 이에 앞서 광양산에 있던 고찰이었다. 이세민이 숨어든 사찰은 바로 이 칠천사였다. 이세민은 사찰의 부처가 현신하여 그를 보우했다고 생각하고 앞으로 이곳에 부처를 위해 도장을 짓겠다고 발원했다. 그래서 즉위한 후 특별히 위지경덕을 파견하여 광양산에 사찰을 세우게 했던 것이다.
명나라 만력萬曆 2년의 《사하현중수칠천사전우기沙河縣重修漆泉寺殿宇記》의 기록은 이를 견증하고 있다. “(사하)현 서쪽 80리 정도 되는 곳에 옛날부터 칠천사라고 하는 고찰이 있었으니, 언제 지었는지 모른다. 대당 연간에 중수重修했으며 위지경덕이 현장감독으로 있었으니 지금까지 천여 년이나 된다.”
칠천사의 옛터는 산언덕을 하나 더 넘어 동북쪽으로 약 3리 되는 산비탈에 있었다. 도중에 길가에서 옛 우물을 만났고 또 비탈의 밭에서 사찰의 유물을 만날 수 있었다. 허리를 치는 수풀 속에는 사찰의 옛 담과 연자방아, 주춧돌, 기와 등이 여기저기에 시체처럼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산비탈의 펑퍼짐한 곳에 명나라 때의 석비가 고독하게 서서 고찰의 옛터를 알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울리는 새의 울음소리가 더구나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비문에 따르면 혜각 선사는 칠천사의 개산開山 주지였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되어 이세민과 만나게 되었고 또 이 황실사원에 오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혜각 선사는 종국적으로 귀국하지 않고 당나라에 입적했으며 그의 전기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칠천사의 잔존한 비문은 혜각 선사의 일부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혜각 선사의 이야기는 칠천사의 비석처럼 파편으로 되어 형태의 산야에 흩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 천사의 주지 혜각 선사가 그 툇마루에 앉아서 천년 사찰의 폐허를 우울하게 지켜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승려를 따라 찾은 옛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 “산중의 검은 샘물을 마시던 명승의 이야기”을 말씀드렸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먼저 지난 달의 퀴즈 답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법기사는 대륙 초기의 사찰인데요, 이 법기사는 어떻게 지어진 이름일까요.
대륙 초기의 사찰인 법기사는 “불법의 기원”이는 의미에서 취한 이름입니다.
계속하여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유명한 사찰 소림사에서 불교음악을 배워 반도에 전한 신라 승려가 있습니다. 이 승려는 누구일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유명한 사찰 소림사에서 불교음악을 배워 반도에 전한 신라 승려가 있습니다. 이 승려는 누구일까요.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임봉해(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