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23 14:38:49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2년 9월 22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9월의 네번 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임봉해(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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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목요일인 9월 22일은 양력 올해의 265일째 되는 날입니다. 올 한해가 마감할 때까지 100일 남았습니다.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한 적 있습니다. “기억하라, 하나의 시간만이 중요한 것이니 그것인즉 바로 지금이다. 지금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언가 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역사 속의 오늘’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해마다 9월 22일은 ‘세계 차 없는 날’입니다. ‘차 없는 날은 프랑스에서 발기했습니다. 환경의식을 높이고 도시 환경에 대한 자동차의 위해성을 알게 하며 사람들이 시내에서 공공교통도구와 자전거를 사용하거나 보행을 하도록 격려하는데 취지를 두었습니다. 2002년 2월, ‘차 없는 날’은 유럽연합에 의해 친환경 정책의 틀에 들어갔으며 9월 22일은 ‘유럽 차 없는 날’로 되었습니다. 그 후 이 활동은 세계에 재빨리 확장, 발전되어 ‘세계 차 없는 날’로 되었습니다.

1980년 9월 22일 이라크와 이란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1980년 9월 22일, 이라크가 이란에 출병하였으며 이로하여 이라크와 이란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라크와 이란은 장기간에 걸쳐 영토 분쟁, 민족과 교파 모순이 있었습니다. 이번 전쟁에서 쌍방은 핵무기를 제외한 모든 신식무기를 사용했습니다. 전쟁이 끊임없이 격상되면서 쌍방의 사상자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전반 국면에는 큰 개변이 없었으며 최종적으로 유엔 중재로 종료되었습니다. 이라크와 이란 전쟁은 제일 현재적인 무기로 싸운 제일 후진적인 전쟁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1862년 9월 22일, 링컨 미국 대통령이 ‘흑인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1992년 9월 22일 백서 ‘티베트의 주권 귀속 및 인권 상황’이 발표되었습니다.

1994년 9월 22일 국제고고학자 소조가 최초의 인류 화석을 발견했습니다.

[간 주]

이 시간에는 ‘승려를 따라 찾은 옛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 “한강의 기슭에 울린 신라사의 종소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한강의 기슭에 울린 신라사의 종소리

땅의 이름은 무심코 생긴 게 아니다. 설화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고 나침반처럼 위치를 나타내며 또 거울처럼 모양을 흉내 낸다.

한양漢陽은 ‘놈을 기르다’는 뜻의 한양漢養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실은 한강漢江의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불린 이름이다. 산의 남쪽, 물의 북쪽을 ‘양陽’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한양의 삼각산은 세 봉우리가 흡사 세모꼴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다.

한강漢江은 삼각산의 근처에서 장강長江에 흘러들고 있다. 장강은 대륙의 제일 긴 강이며, 한강은 장강의 제일 긴 지류이다.

“가만,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하고 이 대목에 이르러서는 누구라도 머리를 갸우뚱할 법한다.

그러나 백번 말해도 틀리지 않는다. 이 한양은 대륙 중부에 위치한 무한武漢의 옛 이름이기 때문이다. 훗날 몸뚱이에 ‘발’이 달려서 대륙에서 반도로 건너간 동명의 지명이라는 것. 실제로 한강은 백제가 이에 앞서 동진東晉과 교류하면서 대륙의 문화를 받아들여 중국식으로 고쳐서 부른 강 이름이라고 전한다. 한강과 함께 반도에 나타나는 지명 삼각산은 기막힌 우연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건 그렇다 치고 한인漢人은 한漢나라 때문에 민족의 이름을 얻었으며 한나라는 유방劉邦이 한중왕漢中王으로 분봉되면서 얻은 이름이다. 한중漢中의 곡지谷地는 한족漢族의 발원지인데, 그 지명 내원은 한양과 마찬가지로 한수漢水 즉 한강과 이어진다.

그러고 보면 대륙의 한족의 터전 한수가 또 반도 한민족의 터전 한강으로 되고 있는 것이다.

반도 한양의 지명 역시 한강처럼 대륙보다 뒤늦게 출현했다. 대륙의 한양은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605년 지금의 호북湖北 지역에서 한진현漢津縣을 개명하면서 나타났다. 한진현은 나루 진津을 이름에 넣었듯 역시 반도의 한양처럼 한강으로 인해 생긴 지명이다. 반도의 한양은 신라 경덕왕(742~764) 때 한양군漢陽郡으로 불리면서 세상에 등극했다.

경덕왕 하면 솔직히 한양보다 에밀레종을 눈앞에 떠올리게 된다. 에밀레종은 경덕왕이 선왕 성덕왕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 아이가 어미를 부르는 소리와 흡사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종의 제소리를 내게 하기 위해 아이를 쇳물에 던져 넣었으며, 엄마를 찾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종의 소리로 울린다는 것이다. 경주 성문을 여닫을 때면 어김없이 에밀레종을 타종打鐘했다고 한다.

경주는 신라의 천년 수도로 서울에서 남쪽으로 약 300㎞ 떨어져 있다.

재미있는 일이 있다. 당唐나라의 서울 장안長安에서 남쪽으로 수백 리 상거한 고장인 안강安康에 신라사新羅寺의 범종梵鐘은 동네방네 소문을 놓고 있었다. 이 범종은 당나라 정관(貞觀, 627~649) 연간에 만든 일이니, 시기적으로 신라 경덕왕 때의 에밀레종과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다. 잠깐,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 안강은 또 한강의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동명의 지명과 물품은 이처럼 대륙과 반도에 거듭 나타나면서 ‘나’와 ‘너’를 자꾸 헷갈리고 있는 것이다.

안강은 섬서성陝西省과 사천성四川省, 호북성湖北省이 접경한 지역의 중심도시이다. 교통망이 발달하여 어느 때든 이동하기 쉽다. 장안 즉 오늘의 서안西安에서 열차로 불과 세 시간 정도 걸렸다.

이른 아침의 한강 공원은 우리 일행만 있는 것처럼 조용하고 한적했다. 이웃한 한강대교에도 아직 다니는 차량이 드물었다. 강기슭의 건물에 걸려있는 ‘한성漢城’이라는 이름의 간판이 더구나 유표한 듯 했다. 서울의 옛 한자 이름이 바로 ‘한성’이 아니던가. 강가에서 산보하는 노인을 만나 영문을 물어보았다.

“한강에서 생긴 이름인데요, 한강을 끼고 있는 도시니까 ‘한성’이라고 하는 거지요.”

실은 몇 년 전 한 부동산회사가 ‘한성’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 어찌됐거나 인제는 서민들에게도 안강이자 ‘한성’이라는 이미지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듯 했다.

그럴지라도 안강은 ‘한성’ 즉 서울은 아니었다. 안강은 서진西晉 태강太康 원년(280), 부근 파산巴山 일대의 유민들을 안치하면서 ‘만년풍락萬年豐樂, 안녕강태安寧康泰’의 의미를 담아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 무렵 신라인들은 또 남쪽의 복건성福建省 용암龍岩 지역에 나타나고 있었고 뒤미처 대륙의 연해지역에 여기저기 군락으로 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옛 문헌의 기록으로 볼 때 안강에 나타난 신라인은 유민이나 이주민이 아닌 구법승과 사절이었다.

당나라 정관 10년, 신라승려 자장慈藏이 일행을 인솔하여 장안에 온다. 자장은 장안 남쪽의 종남산終南山에서 3년 동안 수도, 당나라 태종太宗의 두터운 예우를 받은 이국 승려이다. 그는 귀국한 후 경주의 황룡사黃龍寺에 9층 목탑을 세웠으며 제2대 주지로 있었다. 황룡사는 삼국시대의 제일 큰 사찰로 대표적인 왕실사찰이다.

그때 자장의 제자 승실僧實이 사절과 함께 안강으로 왔는데, 승실은 동명의 한강을 보자 도무지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사찰을 세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게 해줄 것을 풍왕酆王에게 요청했다고 한다.

훗날 사찰 터에서 발굴된 비좌碑座의 위치로 볼 때 신라사의 대전은 서남쪽에 자리하고 동북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사찰은 분명히 반도 방향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한강에 신라사를 세웠다는 옛 이야기가 새삼스럽다.

누군가 일부러 지어낸 이야기는 아니다. “당나라 정관 초, 풍왕이 신라 승려를 위해 (사찰을) 세웠다.”고 명明나라 때의 지방문헌 《흥안주지興安州志》이 밝히고 있다.

풍왕 이원형李元亨은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막내아들이다. 정관 연간 이원형은 금주金州 자사刺史로 임명되었다. 금주는 안강의 옛 별칭이다. 우연인지 몰라도 동명의 금주는 또 한반도의 경상남도 김해에도 나타난다.

승려 자장의 속성俗姓이 김씨라고 하니, 그야말로 일장 드라마를 만드는 것 같다.

정작 기이한 이야기는 신라사에서 나온다. 먼 옛날 한강에 갑자기 홍수가 났다고 현지에 전하고 있다. 홍수는 하루 밤 사이에 안강의 위쪽에 작은 언덕을 만들었고, 한강은 이로 하여 물길을 바꿨다는 것이다. 신라사는 흔적 없이 물에 밀려갔고, 쇠로 만든 큰 종은 마치 가랑잎처럼 모래톱에 둥둥 떠내려갔다.

그러나 현지에서 구전되는 민요는 이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신라사를 허물고 사씨謝氏 무덤을 지었네.

낮에는 천 그루의 참대가 보이지 않고

밤에는 만 개의 등불이 켜지지 않네.”

사찰을 훼손한 사씨 가문에 불만을 토로한 이 민요는 또 신라사에 참대가 병풍처럼 서있고 불등佛燈이 찬란한 풍경을 그리고 있다. 8백년을 존속한 신라사는 사씨의 손에 의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다는 것이다. 사씨는 명明나라 중반 금주에서 어사御使로 있었던 사문謝文이라고 하는 관원을 말한다.

종국적으로 ‘멸문지화’를 당한 건 신라사만 아니었다. “사문이 사찰을 허물고 조상을 묻었으며, 사찰이 파괴되고 사씨도 가문이 끊어졌다.”고 《흥안주지》가 기록하고 있다. 허황한 욕심은 결국 사씨 가문에 화를 부른 것이다. 길지라고 빼앗아 사찰 터에 만든 사씨의 조상 무덤도 현재로선 종적을 찾을 수 없다.

안강에는 옛 사찰은 일여덟 개 되는 걸로 전하고 있다. 와중에 신라사는 금주의 4대 사찰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신라사는 비록 신라 승려가 세웠다고 하지만 나중에 이름난 승려는 안강 출신의 고승 회양懷讓이다. 회양은 당唐나라 경종敬宗 이담李湛에 의해 대혜大慧 선사의 시호諡號를 받은 고승이다. 회양은 12살 때 신라사에서 출가했으며 한때 신라사에서 수도했다고 한다. “신라사가 주州의 치소 서쪽 6리 되는 곳에 있으며 회양 선사의 암자가 있다”고 《명일통지明一統志》가 밝히고 있다.

《안강현지安康縣志》 등 지방문헌의 기술에 따르면 신라사의 종은 성내의 중양궁重陽宮에 방치하다가 또 백신묘百神廟의 소유로 되는 등 이리저리 자리를 옮긴다. 신라가 망한 후 에밀레종이 한때 천덕꾸러기의 신세가 되었다더니 사찰이 파괴된 후 신라종은 주처住處를 잃은 것이다.

항일전쟁 시기, 신라사의 종은 옛 성 북문에 이전되어 방공경보 설비로 되었다. 20세기 80년대에는 홍계동紅溪洞풍경구에 특별히 종각을 만들어 보관하였다고 한다. 홍계동은 말이 풍경구이지 그보다 도관으로 유명한 곳이다. 도교 신화에서 등장하는 여덟 신선의 하나인 여동빈呂洞賓이 수련하면서 선단仙丹을 굽던 곳이라고 전한다.

여동빈의 수련장소라고 하는 팔선동八仙洞 등 홍계동의 명소는 무려 50개가 넘는다. 그러나 일행은 다른 데는 제쳐놓고 곧바로 종각이 있는 산마루로 직행했다. 하늘로 통하는 사다리라는 의미의 천제天梯를 톺아 오르자 종각은 인차 시선에 뛰어들고 있었다.

홍계동 종각의 종은 대륙의 유일한 신라 성씨의 종이다. 진품은 지난해부터 박물관에 소장되고 홍계동의 종각에 걸려 있는 종은 모조품이었다. 당목撞木 역시 옛 ‘진품’이 아니었다. 밋밋한 망치나 바다의 고래가 아니라 중국의 습관대로 용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범종은 절에서 사람이 모이게 하거나 시각을 알리기 위하여 치는데, 종교적으로는 종소리를 듣는 순간만이라도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강을 건너면 귤나무도 탱자나무가 된다”고 하더니 사찰의 범종은 도관에 온 후 중생의 서원을 들어주는 안식처가 되고 있는 것이다.

기실 사찰 자체가 이역에 살고 있는 신라인들의 마음의 안식처요, 구심점이었다. 대륙의 신라인들의 군락마다 부근에 사찰이 등장하고 있었다면 신라사의 부근에는 또 신라인들이 꼭 촌락으로 집거하고 있었다.

이에 따르면 한강 신라사 부근에 신라인들이 집단적으로 살고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한 기록은 지방문헌에 단 한 줄도 남아있지 않는다.

[간 주]

네, 한강 기슭의 한양에서 신라의 타종 소리는 더는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이 시간에는 ‘승려를 따라 찾은 옛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 “한강의 기슭에 울린 신라사의 종소리”를 말씀드렸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계속하여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신라방이 있던 ‘그곳’은 또 유명한 소설가 오승은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주은래 전 총리의 고향이었습니다.

신라방은 있던 ‘그곳’은 어디일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신라방이 있던 ‘그곳’은 또 유명한 소설가 오승은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주은래 전 총리의 고향이었습니다.

신라방은 있던 ‘그곳’은 어디일까요.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임봉해(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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