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아러툰촌의 회왕릉)
중국의 유명한 고촌(古村) 시리즈 중 백한 번째는 황금의 땅이라 불리는 아러툰(阿勒屯)촌이다. 아러툰촌에 위치한 회왕릉(回王陵)은 여러 민족들 근면의 상징이자 여러 가지 문화가 서로 어울린 역사의 증명이며 민족 단합의 상징이기도 하다.
하미(哈密)에 위치한 아러툰은 위구르족 언어의 음역으로 황금의 땅이라는 뜻이다. 하미촌에 보존된 하미 9대 회왕의 무덤과 회왕부(回王府) 등이 하미촌 최고의 볼거리이다.
건물들은 위구르족의 풍격을 보여주는 동시에 중원(中原) 한(漢) 민족의 문화도 흡수하여 대들보의 조각, 기둥의 그림 등이 고대 민족 문화의 유산임을 말해준다. 마을에는 또 이슬람 사원과 고목, 고대의 도로, 고건물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사진설명: 왕릉의 일각)
하미 왕릉은 청(淸) 나라 때의 하미왕과 그의 왕실성원들이 묻혀 있는 무덤이다. 위구르족들은 이 왕릉을 ‘황금의 왕릉’이라는 의미로 ‘아러툰친커(阿勒屯勤克)’라 부른다.
1679년에 시작되어 233년간 존속한 후 1930년에 종료된 하미왕권은 청(淸)나라 이래 신강 위구르 봉건 왕공(王公) 중 통치시간이 가장 긴 정권이다. 200여년 간 역대의 하미왕은 청 정부의 정교합일(政敎合一) 정책에 의해 신강의 안정을 유지하고 반란을 평정하며 나라의 통일을 수호하는 데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초대의 하미왕은 청 정부에 의해 ‘회강팔부지수(回疆八部之首)’에 봉해졌으며 그는 또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강희(康熙)황제와 함께 전장을 누비며 준가르의 난을 평정해 청 정부의 중시를 받았다.
(사진설명: 회왕릉의 대공배)
왕릉에서 레벨이 가장 높은 건물인 대공배(大拱拜)는 구조가 특이하고 짙은 이슬람 종교적 색채를 띤다. 높이 14m, 너비 15m의 건물은 네 귀퉁이에 네 개의 원추형 탑주(塔柱)를 세웠다.
하단이 모나고 상단이 둥근 대공배는 대들보를 쓰지 않았다. 이는 당시로서는 앞서가는 건축기법이었다. 대공배의 내부에 들어서면 제7대 왕과 그의 왕비들, 그리고 제8대 왕과 그의 왕비들의 무덤이 차례로 줄지어 있으며 무덤의 위에는 황실에서만 사용이 가능한 황금색의 비단이 덮여 있다.
위구르족의 전통 명절이 되면 왕실의 후손들은 모두 이 곳에 와서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새로운 황금색의 비단으로 기존의 비단을 교체한다. 대공배 내부의 벽관 천정은 모두 난이 새겨진 하얀 타일로 단장해 우아하면서도 장엄함을 연출한다.
(사진설명: 회왕부의 일각)
대공배의 맞은 켠에 위치한 아이티카(艾提卡) 이슬람 사원도 이슬람 건축 양식을 자랑한다. 제4대 회왕이 1760년 정도에 신축했다고 전해지는 이 사원은 신강에서 규모가 가장 큰 실내 이슬람 사원이다.
동서 길이 60m, 남북 너비 36m의 이 사원에서는 4,000여 명이 동시에 예배를 볼 수 있다. 사원은 9줄에 걸쳐 도합 108개의 나무 기둥이 천정을 받치고 있으며 기둥은 모두 두 사람이 마주 서야 그러안을 수 있는 굵은 소나무를 사용했다.
사면의 내벽에는 화려하고 산뜻한 색채의 꽃을 그리고 그 사이에 아랍어로 된 코란경을 새겼다. 실내에는 사원의 옥상에 올라갈 수 있는 나선형 계단이 있어서 이슬람의 명절 때마다 담당자가 사원의 옥상에 올라가 예배하러 오라고 외치는데 그 소리가 멀리까지 퍼진다.
(사진설명: 회왕부의 정자)
1902년에 축조된 목조 정자식 건물은 (滿)족과 몽골족, 위구르족, 한(漢)족 네 개 민족의 건축양식을 두루 갖추어 더욱 특색이 있다. 건물 내부의 무덤은 위구르족의 양식이고 둥근 지붕은 만족과 몽골족의 양식이며 회랑과 건듯 들린 처마, 두공은 한족의 양식으로 되어 있다.
네 개 민족의 건축양식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이런 축조물은 세계 건축사에서도 거의 유일무이하다. 또 멀리서 보나 가까이에서 보나 장엄함과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건물은 문화의 풍부함과 민족단합의 저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곳에는 하미왕권의 마지막 왕과 그의 아내, 그리고 그들의 자손이 묻혀 있다.
하미의 9대 회왕 중 전기적인 색채를 띤 사람은 마이리바뉴(邁里巴紐)이다. 제7대 회왕의 아내인 그녀는 하미 역사상 유일한 여왕이기도 하다. 청나라 동치(同治, 1862년~1874년) 연간에 하미에 난이 발생해 농민 봉기군이 하미왕부를 포위했다.
(사진설명: 하미왕부의 일각)
마이리바뉴는 죽음을 불사하고 포위를 뚫고 나와 구원병을 청하러 갔다. 하지만 그녀가 구원병을 거느리고 하미왕부에 돌아오니 하미는 벌써 봉기군에 점령되고 그의 남편인 하미왕도 세상을 떴다.
그녀의 아들이 왕위를 이어 받았으나 어려서부터 질병으로 고생한 아들은 건강상 관계로 제대로 하미왕국을 관리할 수 없었다. 그에 마이리바뉴가 선뜻 나서서 하미왕국을 관리했는데 다른 왕들 못지 않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마이라바뉴라를 여왕이라 부르며 오늘날까지 그의 이야기를 전해 내려온다.
위치: 신강(新疆) 위구르 자치구 하미(哈密)시 회성(回城)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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