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아름다운 개봉)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다섯 번째는 천 년의 부침을 보여주는 개봉(開封)이다. 일곱 왕조가 개봉에 도읍을 두면서 개봉이라는 이 도시에 비할 바 없이 탁월한 문화를 부여했으며 그 중에서도 송(宋)나라 때 개봉은 최고로 휘황찬란했다.
용정(龍亭)은 천 년 황실의 기세를 보여주고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는 고도(古都) 개봉의 눈부셨던 어제를 재현하며 세월의 풍상고초 속에서도 여전히 자리를 지켜오는 철탑은 과거의 역사를 말하는 듯 하다.
하남(河南) 중부의 예동(豫東) 벌판에 자리잡은 개봉은 중화민족 역사 문화의 요람인 황하(黃河) 강 기슭에 위치한 유구한 역사와 풍부한 문화를 자랑하는 고성(古城)이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개봉)
고대에 변량(汴梁) 혹은 변경(汴京)이라 불렀던 개봉은 춘추(春秋)시대 정장공(鄭庄公)이 오늘의 개봉 남쪽에 성을 쌓고 땅을 넓힌다는 의미의 ‘계탁봉강(啓拓封疆)’에서 글자를 따서 ‘계봉(啓封)’이라 불렀으며 그 뒤의 한경제(漢景帝)때 개봉(開封)이라 개명했다.
전국(戰國)시대에 위(魏)나라가 개봉에 도읍을 정하면서 오대(五代)의 후량(後梁)과 후진(後晉), 후한(後漢), 후주(後周), 그리고 북송, 금(金) 나라가 모두 이 곳에 도읍을 두어 개봉은 일곱 왕조의 고도(古都)라 불린다.
개봉에 도읍을 둔 일곱 왕조 중 특히 북송이 가장 유명하다. 북송의 9명 황제가 개봉에서 167년간 지내면서 당시 개봉은 성곽이 웅장하고 경제가 번영한, 세계적으로 가장 번화한 도시 중 하나로 부상해 ‘국제도회지’라 불리기도 했다.
(사진설명: 아스라니 솟은 개봉의 철탑)
오늘날도 개봉에는 용정과 번탑(繁塔), 철탑, 대상국사(大相國寺), 우왕대(禹王臺), 연경관(延慶觀), 산섬감(山陝甘) 회관, 악비묘(岳飛廟), 진하철서(鎭河鐵犀), 옛 성벽 등 많은 송나라 유적지가 남아 있다.
개봉성의 동북쪽에 우뚝 솟은 철탑은 개봉 고성에서 가장 높은 축조물이다. 북송 때인 1049년에 신축한 철탑은 개보사탑(開寶寺塔)이라고 하는데 탑의 외곽이 적갈색의 유리 벽돌로 되어 있어서 멀리서 보면 마치 철탑과 같다고 해서 철탑이라 부른다.
55m 높이의 철탑은 건듯 들린 지붕이 호화롭고 외벽에는 하늘을 나는 선녀와 땅에 내린 용, 기린 등 50여 종의 벽돌 조각을 새겨 송나라 벽돌 조각의 대표작으로 인정되기도 한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용정의 야경)
철탑은 9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지진과 수재, 전란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늘날도 철탑에 오르면 개봉 고성의 경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청나라 때인 1692년에 오늘날의 개봉성 서쪽에 위치한 북송과 금나라 황궁의 유적지에 만수정(萬壽亭)을 세웠다. 정자에 ‘황제만세(皇帝萬世)’ 위패가 공양되어 사람들은 용정이라 부르기도 한다.
전한데 의하면 과거 이 용정에는 황제의 조서를 발표하는 곳이라는 의미로 검은색의 커다란 바위 ‘용돈(龍墩)’이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개봉 최대의 명소로 개발되어 남북 방향으로 500m 길이의 중심선에 오문(午門)과 옥대교(玉帶橋), 조문(朝門), 용정대전 등 건물들이 줄지은 용정은 북방 황실 정원을 펼쳐 보이며 ‘고도의 심벌’이 되었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대상국사)
중국에서도 유명한 고찰인 대상국사는 개봉성 도심의 자유로(自由路) 북쪽에 위치해 있다. 이 곳은 원래 위(魏)나라 공자 무기(無忌), 즉 신릉군(信陵君)의 고택이었다.
북제(北齊) 때인 555년에 이 곳에 사원을 짓고 건국사(建國寺)라 이름했으나 후에 전란으로 절이 불에 타버렸다. 당(唐)나라 때인 701년에 개봉에 이른 혜운(慧雲) 스님이 돈을 기부 받아 이 곳에 또 다시 사원을 지었다.
712년 당예종(唐睿宗)이 자신이 상왕(相王)으로부터 황제가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국사에 ‘대상국사’라는 명칭을 하사하고 어필로 ‘대상국사’ 편액을 써주었다.
(사진설명: 상국사의 일각)
당나라와 송나라 시기 대상국사는 번성일로를 달려 ‘이 세상에서 대상국사가 가장 웅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때 대상국사는 종교와 문화, 경제교류의 중요한 장소였다.
그 뒤에 대상국사는 물에 잠겼고 현재 건물은 청나라 때인 1766년에 개축한 것이다. 현재 정문(正門)과 천왕전(天王殿), 대웅보전(大雄寶殿), 팔각유리전(八角琉璃殿), 장경루(藏經樓) 등 건물이 있는데 그 중 팔각유리전에 공양된, 58년의 시간을 들여 은행나무로 조각한 천수천안(千手天眼) 관음상이 정교한 기법과 눈부신 외관으로 아름다움의 극치를 자랑한다.
송나라 때 개봉에서는 정직하고 청렴한 포공(包公)과 충성의 가문 양가장(楊家將), 변법을 주도한 왕안석(王安石) 등 많은 중요한 역사인물들이 배출되어 중국의 역사와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포공사의 일각)
개봉성의 서남쪽에는 푸른 물이 찰랑이고 호수의 바닥이 환히 보이며 호숫가에는 버드나무가 휘늘어진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 그 호수가 바로 포공호이다.
포공호의 서쪽 기슭에 우뚝 솟아 있는, 사면이 물에 안겨 있는 포공사(包公祠)는 북송에서 청렴한 관리로 유명한 포증(包拯)의 사당이다. 송나라 건물을 모방해서 지은 포공사는 전시구역과 정원 구역, 서비스 구역으로 나뉜다.
주요 건물들로는 대전(大殿)과 이전(二殿), 동서 별채, 회랑, 비정(碑亭), 대문(大門), 이문(二門) 등이며 건물들에는 포공의 동상과 포공이 사건을 심리하는 과정을 재현한 밀랍상, 포공의 역사자료, 비문 등이 전시되어 예스러우면서도 소박하고 장엄하면서도 숙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진설명: 웅장한 대량문)
북송 때 요(遼)나라에 대항한 민족영웅 양업(楊業)의 저택인 천파양부(天波楊府)는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명소이다. ‘사랑탐모(四郞探母)’, ‘십이과부정서(十二寡婦征西)’ 등 양씨 가문의 스토리가 모두 이곳을 언급하기 때문이다.
개봉성의 서북쪽 천파문(天波門) 옆에 위치한 천파양부는 동원(東院)과 서원(西院), 중원(中院) 등 세 개의 뜰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양씨가문의 저택이 자리잡은 중원에는 대문(大門)과 조벽(照壁), 종루, 천파루 등 건물들이 산재해 있다.
그밖에 양씨 가문의 가든인 서원에는 강남 정원의 풍격을 띤 정자와 누각, 방갈로 등이 있고 훈련장인 동원은 과거 말을 타고 활을 쏘며 군사를 훈련시키던 장소였다.
(사진설명: 웅장한 개봉부)
북송 때 북쪽으로 황궁의 선덕문(宣德門)에서 남쪽의 남훈문(南熏門)까지 이른 10여리에 달하는 통로는 황제가 궁궐을 출입할 때 경유하던 어가(御街)였다.
송나라 때 개봉의 번화함을 재현하기 위해 현재 기존의 어가 유적지에 송도어가(宋都御街)라 이름하는 송나라 상가를 신축했다. 남쪽의 신가구(新街口)에서 북쪽의 오조문(五朝門)까지 이르는 송도어가는 길이가 400m에 달한다.
현재 거리 양쪽에는 50여 개의 개봉 특산물 가게와 전통 맛집, 골동품 가게가 줄지어 과거 개봉의 번창함과 번화함을 재현하면서 <동경몽화록(東京夢華彔)>의 축소판이라 불린다. 재미 있는 것은 이 곳의 가게 점원들이 모두 송나라 때 의상을 하고 있어 송도어가를 거닐면 마치 정말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북송의 도읍에 이른 듯 착각한다는 점이다.
(사진설명: 번화한 청명상하원)
송도어가가 북송 어가의 번화함을 재현했다면 청명상하원(淸明上河園)은 전반 개봉성의 번화함을 펼쳐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청명상하원은 송나라 화가 장택단(張擇端)의 명작 <청명상하도>를 본떠 조성한 송나라의 민속과 풍토를 보여주는 대 규모 놀이공원이다.
문루(門樓)와 홍교(弘橋), 거리, 가게, 부두 등 다양한 건물들이 송나라 도읍의 번창함을 재현하는 청명상하도는 개봉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이다.
북송 때는 경제가 번창했을 뿐만 아니라 자수기법도 아주 수준이 높아 당시 개봉에는 여러 지역의 자수 장인들이 운집했다. 또 황제와 비빈들의 의상을 만들던 ‘문수원(文繡院)’도 있었는데 문수원의 자수는 기법이 정교하고 모양이 아주 생동했다. 오늘날 내외에 이름이 자자한 개봉변수(開封汴繡)가 바로 송나라 때의 자수를 기반으로 발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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