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9 09:43:08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성-14] 형주: 楚 나라의 도읍

(사진설명: 아름다운 형주)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열네 번째는 초(楚) 나라의 도읍 형주(荊州)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유명한 이야기가 발생된 형주는 유구한 낭만의 도시이다.

오늘날 형주에서는 더는 전장을 누비던 말발굽 소리는 들을 수 없지만 청색의 벽돌과 이중 지붕의 성루(城樓), ‘유비(劉備)가 형주를 빌리다’, ‘관우(關羽)가 형주를 잃다’는 등 삼국(三國)의 이야기들은 은은한 역사의 여운을 영원히 형주에 남겼다.

호북(湖北) 성 중부, 장강(長江)의 중류, 강한(江漢) 벌판의 서쪽에 위치한 형주고성은 남쪽으로 장강과 이웃하고 북쪽으로 한수(漢水) 강을 바라보며 서쪽으로 파촉(巴蜀)과 연결되고 남쪽으로 상월(湘粤)과 통하며 ‘칠성통구(七省通衢)’라는 좋은 지리적 입지를 보유한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형주고성)

형주는 주(周) 나라 때 벌써 초 나라에 속했다. 기원전 689년에 초문왕(楚文王)이 도읍을 단양(丹陽)으로부터 영(郢), 즉 오늘날 형주성에서 북쪽으로 5km 거리의 초기남고성(楚紀南故城)에 천도해서부터 선후로 20대에 걸친 초 나라 왕이 이 곳에서 411년간 초 나라를 통치했다.

이 4백여 년 동안 영도(郢都)는 초 나라의 중심이 되었고 이 4백여 년 동안 초 나라는 ‘춘추오패(春秋五覇)’와 ‘전국칠웅(戰國七雄)’으로 부상했다. 또 그 동안 초성왕(楚成王)은 이 곳에 저궁(渚宮)이라는 이름의 별궁(別宮)을 짓기도 했다.

기원전 278년, 진(秦) 나라 장군 백기(白起)가 영도를 점령하고 이 곳에 강릉현(江陵縣)을 두었으며 그로부터 이 곳은 역대 왕들의 임지가 되었다. 그로 인해 형주는 강릉성(江陵城)이라고도 불리며 근처에 웅장한 형산(荊山)이 있다고 해서 후에 형주라 부르게 되었다.

(사진설명: 형주의 옛 성과 성문)

유구한 역사는 형주에 수많은 문화재를 남겼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문화재는 벽돌로 외벽을 쌓고 내부에 흙을 다져 넣고 성의 주변에 해자를 판 견고함의 극치를 이루는 옛 성벽이다.

삼국시기 촉(蜀) 나라 장군 관우가 옛 성의 옆에 별도로 새 성을 축조했고 기원전 352년에 진(晉) 나라 장군 환온(桓溫)이 형주의 도독(都督)으로 있는 동안 옛 성과 새 성을 하나로 통합했다.

그로부터 형주고성은 지었다가 허물어지고 허물어지면 또 다시 짓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그리고 오늘날 보는 형주고성은 청(淸) 나라 때인 1646년에 명(明) 나라 때의 성을 기준으로 신축한 것이다.

(사진설명: 형주의 아름다운 성벽)

350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형주성은 중국에서 완전하게 보존된 몇몇 안 되는 고대 성곽 중 하나이다. 불규칙적인 장방형으로 된 성벽에는 6개의 성문과 군사가 주둔하는 3개의 장병동(藏兵洞), 적을 감시하는 24개의 적루(敵樓)가 있다.

높이 8~9m, 두께 10m에 달하는 성벽은 아름다운 호수 기슭에 산세를 따라 구불구불 펼쳐져 꿈틀대는 용을 방불케 한다. 이 성을 축조할 때 기반이 내려 앉고 홍수가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성벽의 안쪽에 석회와 찹쌀을 섞어 벽돌을 쌓음으로써 성이 견고함의 극치를 자랑해 형주성은 예로부터 ‘쇠로 만든 성’이라 불린다.

현대 건축학자들도 감탄하는 형주성은 견고함으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유비가 형주를 빌리다’, ‘관우가 형주를 잃다’는 등 삼국의 이야기들로 인해 더욱 세상에 이름을 날린다.

(사진설명: 삼국 테마공원의 일각)

현재 형주에는 삼국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대 규모 테마공원이 있다. 이 공원은 <삼국연의(三國演義)>가 묘사한 스토리에 따라 ‘도원삼결의(桃園三結義)’ 장소를 재현하고 유비와 관우, 장비(張飛), 제갈량(諸葛亮)의 조각상, 그리고 제갈량이 짚을 실은 배로 화살을 얻은 이야기 등 경관을 조성했다.

형주성 북문 밖의 구녀탁(九女琢)과 두 개의 둔덕에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전한데 의하면 관우가 형주를 지킬 때 9명의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형주에서 너무 자주 전쟁이 발생해 이 땅을 다시 찾겠다는 왕모(王母)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형주)

관우는 형주를 내놓기 싫어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은 서북쪽에서, 나는 동남쪽에서 시작해 우리 각각 5천보 둘레의 성을 하나씩 축조합시다. 날이 어두워지면 축성을 시작해서 닭이 홰를 칠 때까지 성을 잘 지은 사람이 이 땅을 차지하도록 하지요.”

관우는 닭이 홰를 치기 전에 성을 다 축조했고 아홉 선녀는 아직 한 구간을 채 짓지 못했다. 그러자 관우는 닭장을 흔들어 놀란 닭이 홰를 치게 했고 닭 울음소리에 아홉 선녀는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고 하늘나라로 올라갔다.

이것이 바로 구녀탁의 유래이다. 또 전한데 의하면 당시 장비도 관우를 돕기 위해 흙을 메고 왔는데 늦게 오는 바람에 그 흙을 동문밖에 쏟았고 오늘날 사람들은 그 둔덕을 ‘장비일단토(張飛一担土)’라 부른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형주박물관)

견고한 형주성에 예술적 미를 가미한 아홉 선녀의 이야기는 아름다운 신화와 전설이지만 관우가 동오(東吳)의 공격을 막기 위해 한(漢) 나라 때의 옛 성 옆에 새 성을 축조한 것은 사서에 기록된 사실이다.

‘한 도시를 알려면 그 도시의 박물관으로 가라’는 말이 있다. 형주의 서호(西湖) 기슭에 위치한 형주박물관은 전시홀과 초락궁(楚樂宮), 진보관(珍寶館), 고개원관(古開元觀) 등 네 부분으로 나뉘어 형주고성의 어제를 펼쳐 보인다.

형주박물관에는 전국(戰國)시기의 실크와 월(越) 왕 구천(句踐)의 검, 오(吳) 왕 부차(夫差)의 화살, 그리고 서한(西漢) 시기의 남자 시신 등을 망라해 국보급 문화재 12만 여건이 소장되어 있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형주)

형주에 첫 성이 축조되어 오늘날까지 2천여 년이 흘렀다. 그럼에도 형주는 여전히 사람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다. 매일 이른 아침이나 황혼이 깃들 때면 고성의 안팎에서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고성을 거닐며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그 사람들과 함께 운동을 하며 고성을 따라 돌다가 머리를 들면 한없이 견고한, 명과 청 시기의 벽돌로 쌓은 고성의 아름다움에 또 한번 감탄하게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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