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아름다운 흡현고성의 일각)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스무 번째는 휘주(徽州) 문화의 땅 흡현(歙縣)이다. 황산(黃山) 기슭에 위치한 아름다운 흡현고성은 한때 낙후한 교통과 기복을 이룬 산발로 인해 외부와 단절되었지만 그로 인해 무릉도원을 방불케 하는 아름다운 환경을 오늘날까지 유지하고 있다.
흡현고성에 들어서면 아름다운 산수와 예스러운 고건물이 어우러져 사람들은 아름다운 산수를 거니는 듯, 또 고건물의 박물관에 들어선 듯 착각하게 된다.
안휘(安徽)성 남쪽, 신안강(新安江) 상류에 위치한 흡현은 남쪽으로 황산, 동쪽으로 항주(杭州)와 천도호(千島湖), 서쪽으로 도자기의 도시 경덕진(景德鎭), 북쪽으로 무호(蕪湖)와 동릉(銅陵)으로 통하는 요충지이다.
(사진설명: 흡현고성 전경)
산발이 기복을 이루고 강물이 얼기설기하며 기후가 습윤하고 물산이 풍부한 흡현은 예로부터 신안강 상류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동남의 노(魯) 나라’라 불린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제(秦始皇帝)는 중국을 통일한 후 이 곳에 현(縣)을 두고 흡현이라 칭했으며 수(隨) 나라 때는 흡주(歙州)라 불렀다. 북송(北宋) 때인 1121년 흡주를 휘주(徽州)라 개명해 원(元)과 명(明), 청(淸) 왕조까지 그 명칭을 사용했다. 흡현은 1300여년 동안 줄곧 휘주의 소재지였으며 황산과 신안의 읍(邑)으로 휘주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남송(南宋) 때 도성을 개봉(開封)으로부터 오늘날의 항주를 말하는 임안(臨安)으로 천도한 후 임안과 가까운 흡현은 수도권의 영향력으로 경제의 발전과 문화의 번영을 이루었으며 안휘의 상인을 말하는 휘상(徽商)이 궐기하고 이학(理學)이 뿌리를 내려 ‘관상학 일체’의 문화체계를 형성했다. 명나라와 청나라 때에 이르러 휘상들은 전국을 다니며 중국의 상업계를 견인해 ‘휘상이 없으면 도시가 없는’ 국면을 형성하기도 했다.
(사진설명: 흡현고성의 건물)
휘상이 번성일로를 달리면서 다수의 휘상들은 고향에 돌아와 땅을 사고 저택을 짓고 사당을 세우고 패방(牌坊)을 건설했으며 그로 인해 흡현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웅장함을 자랑하는 안휘 풍격의 휘파(徽派)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휘상들은 또한 문인묵객들에게 자금적 지원을 많이 해주면서 풍류를 즐겼다. 하여 이학의 대가 주희(朱熹)와 활자인쇄의 발명가 필승(畢昇), 서예의 대가 황빈홍(黃賓虹), 교육가 도행지(陶行知) 등 대가들이 흡현에서 신안리학(新安理學)과 완한학파(晥漢學派), 신안화파(新安畵派), 휘파(徽派) 조각 등 독특한 휘파문화의 형성을 이끌었다.
유구한 역사와 번영하는 경제는 흡현에 많은 명승고적을 남기기도 했다. 명 나라 때 축조한 흡현고성에는 현재 남쪽과 북쪽의 초루(譙樓), 그리고 일부 성곽이 남아 있으며 성안에는 명나라와 청나라 때의 많은 민가와 정원이 보존되어 있다.
(사진설명: 흡현고성의 투산가)
성안에는 명청시기 풍격의 거리와 골목이 남아 있으며 곳곳에서 오래된 사원과 다리, 탑 등을 볼 수 있다. 그 중 대표적인 볼거리들로는 투산가(鬪山街)와 도행지 기념관, 휘원(徽園), 태백루(太白樓), 태평교(太平橋), 신안비원(新安碑園)이다.
투산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해서 투산가라 이름한 이 거리는 500m 길이에 돌을 깐 옛 거리이다. 이 거리에는 민가의 대표인 왕씨가택(汪氏家宅)과 관가의 저택을 대표하는 양가대원(楊街大院), 고대 사숙(私塾)의 대표인 허가청(許家廳), 상인가문인 반가대원(潘家大院), 천 년의 우물, 보기 드문 목조 패방인 ‘엽씨로절방(葉氏鹵節坊)’ 등 대표적인 축조물들이 모여 있다.
양쪽에 고건물이 줄지어 있고 반들반들한 돌이 깔려 있는 투산가를 거닐면 마치 역사의 그림 속에 들어선 듯 건물과 거리가 사람들에게 유구하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진설명: 휘원의 일각)
휘주의 문화를 잘 보여주는 휘원(徽園)은 흡현의 중심지이자 과거 휘주관아가 자리 잡았던 터에 휘파건물을 모방해서 새로 조성한 관광지이다. 휘원은 웅장한 기세를 자랑하고 하얀 담벽에 검은 기와가 대조적인 건물들이 소박함과 우아함을 보여줘서 휘원에 들어서면 마치 예스럽고 아름다운 휘주 고성에 들어선 듯 하다.
황산에서 천도호로 가는 도중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태백루(太白樓)는 2층 누각이다. 굵은 기둥에 날아갈듯한 처마를 떠 인 태백루에 올라서서 저 멀리 바라보면 아름다운 산수와 예스러운 건물, 다리, 탑 등이 조화를 이루는 흡현고성이 한 눈에 보이며 누각의 내부에는 역대의 비석과 명인들이 쓴 대련이 전시되어 있다.
전한데 의하면 당(唐)나라 시인 이백(李白)이 흡현에 은둔한 은자 허선평(許宣平)을 만나러 흡현에 이르렀는데 허선평을 만나지 못하는 바람에 홀로 강가에서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 뒤에 사람들은 이백이 술을 마시던 자리에 누각을 짓고 이백의 자를 따서 태백루라 부르게 되었다.
(사진설명: 웅장한 허국석방)
독특한 휘파문화를 자랑하고 많은 명승고적을 보유한 흡현은 또 ‘패방의 고장’이라 불리기도 한다. 흡현에는 특히 명나라와 청나라 때 곳곳에 패방을 세웠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패방으로는 허국석방(許國石坊)과 다월(棠樾) 패방의 군락을 꼽는다.
흡현고성의 중심에 세워진 허국석방은 명나라 때 조정이 태자태보(太子太保) 예부상서(禮部尙書)이자 무영전(武英殿) 대학사(大學士)인 허국(許國)을 위해 새운 석조 패방이다.
보기 드물게 8개의 기둥에 사각형으로 된 이 석조 패방은 목조 건물을 모방했는데 패방 곳곳에 정교한 조각이 즐비해 입체적인 무늬와 아름다운 모양으로 다채로움을 자랑한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당월 패방군)
당월 패방군은 흡현에서 서쪽으로 6km거리에 위치해 있다. 7개의 패방이 충성과 효도, 수절, 의리의 순서에 따라 마을 밖에서 마을 쪽으로 가면서 차례로 세워져 있다.
이 7개의 패방은 한 번에 세운 것이 아니라 몇 백 년에 걸쳐 하나씩 세운 것이지만 모두 똑 같은 풍격으로 혼연일체를 이루며 보는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석조 패방이 이 땅에 세워진 뒤로 20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모양이 상이한 패방은 마치 사서처럼 사람들에게 흡현고성의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