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24 10:42:12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성-25] 양번: 삼고초려의 땅

(사진설명: 아름다운 양번고성)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스물 다섯 번째는 삼고초려의 땅 양번(襄樊)이다. 2000여 년의 세월이 양번고성을 만들어 바깥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양번고성은 변함없이 자신의 전설을 지켜온다.

양번고성에 들어서면 모두가 오래된 유구한 것뿐이다. 오래된 거리와 오래된 전설, 오래된 건물, 심지어 사람들도 오래 전의 사람들을 방불케 해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 하다.

호북(湖北)성의 서북부, 한수(漢水) 강의 중류에 위치한 양번은 동쪽으로 대홍산(大洪山), 동백산(桐柏山)과 이웃하고 서쪽으로 무당산(武當山), 형산(荊山)이 막아 서서 예로부터 교통 요충지이자 남북문화의 집결지였다.

(사진설명: 양번고성의 성벽과 해자)

양번은 양양(襄陽)과 번성(樊城)을 일컫는 말이다. 한수 강을 사이 두고 북쪽이 번성, 남쪽 양양이었고 두 도시는 철도와 도로 대교로 연결되었는데 1950년에 하나의 도시로 합쳐져 양번으로 다시 태어났다.

양번 최초의 고성은 서주(西周) 시기의 등성(鄧城), 즉 고번성(古樊城)이다. 등성 성벽 유적은 2800년의 역사를 보유한다. 오늘날 성벽 유적은 둘레 3,233m, 두께 10~15m, 무너진 성터 높이 3m, 최고의 높이 6.3m에 달한다.

성벽은 사면에 성문을 내고 성벽의 밖에 40m 너비의 해자를 팠는데 현재는 논밭이 해자를 대신하고 있다. 성 동남쪽의 귀퉁이에는 흙으로 쌓은 8m 높이의 봉화대(烽火臺)가 있다.

(사진설명: 오 왕 부차의 검)

고성안에도 문화재가 아주 풍부하다.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후 이 곳에서 서주(西周)와 춘추전국(春秋戰國)시기의 많은 청동기가 출토되었다. 그 중 가장 귀중한 청동기는 명문이 새겨진 등공정(鄧公鼎)과 오(吳) 왕 부차(夫差)의 검이다.

한수 강 남쪽 기슭의 양양성(襄陽城)은 양수(襄水) 강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이름이 양양이다. 한(漢) 나라 때 성을 처음 쌓았고 당(唐) 나라와 송(宋) 나라 때 벽돌로 고쳐 축성했는데 원(元) 나라 후반에 성이 무너져 명(明) 나라 때 개축했다.

장방형의 성은 둘레가 7.4km이고 성안의 면적은 2.4㎢이며 사면에 6개의 성문을 두고 네 귀퉁이에는 각루(角樓)를 지었다. 성안에는 관아와 사원, 학궁(學宮), 사당, 가게, 민가들이 십자(十字) 거리를 중심으로 완전한 고성의 구도를 형성한다.

(사진설명: 양번고성의 해자)

양번고성이 완전하게 보존된 데는 성벽과 그 밖에 둘러선 해자의 공로가 크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양번고성의 해자는 평균 너비가 180m에 달하고 최대의 너비는 250m에 달해 ‘중국에서 가장 넓은 해자’로 인정된다.

해자의 기슭에 축조된 성은 밖에 벽돌을 쌓고 성의 안에는 흙을 다져 견고하기 그지 없어서 ‘쇠로 다진 양양’이라 불린다. 오늘날 성벽의 주변에 공원을 조성해 녹음과 성벽이 어우러져 아름답다.

역사적으로 양번은 군사가들이 서로 다투는 요충지였으며 따라서 이 곳에서는 수많은 전쟁이 벌어지고 수많은 역사사건들이 발생했다. 그 중 동진(東晉)의 장군 주서(朱序)의 모친 한(韓) 부인이 양번의 여인들을 거느리고 침략에 맞선 사건, 백기(白起)가 언성(鄢城)에 수공(水攻)을 들이댄 전쟁, 관우(關羽)가 홍수로 칠군(七軍)을 이긴 전쟁, 이자성(李自成)이 양양에서 왕이 된 사건 등이 모두 이 곳에서 발생했다.

(사진설명: 양번고성의 일각)

동진 때인 378년, 전진(前秦)이 7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양양을 공격했다. 양양을 수비하던 양주(梁州) 자사(刺使) 주서는 전진의 군사가 선박을 갖추지 못해 한수 강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고 잘못 판단하고 방어에 소홀했다.

하지만 전진의 군사는 기병 5,000명을 파견해 선박 백 척을 마련해서 강을 건넜고 그 바람에 준비가 없던 주서는 성안으로 퇴각했다. 주서의 모친 한부인은 양양이 포위되자 성안의 여인들을 거느리고 내성(內城)을 쌓으며 방어에 나섰다.

진(晉) 나라 군대는 외성을 지키고 한부인과 여인들은 내성을 지키며 끝내 전진의 군대를 격파하고 양양을 지켰다. 후에 사람들을 그 내성을 부인성(夫人城)이라 부르며 한부인의 이야기를 미담으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미공사)

양번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동시에 춘추(春秋) 시기 군사가 오자서(伍子胥)와 전국(戰國) 시기의 시인 송옥(宋玉), 동한(東漢)의 개국황제 유수(劉秀), 당(唐) 나라 때의 시인 두보(杜甫) 등 많은 인물들을 배출했으며 또 제갈량(諸葛亮)과 북송(北宋) 시기의 서예가 미불(米芾) 등의 두 번째 고향이기도 하다.

양번성의 서남쪽에 위치한 미공사(米公寺)가 바로 미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미공사는 원(元) 나라 때 신축했으며 현재의 건물은 청(淸) 나라 때 개축한 것이다.

부지면적 16,000㎥에 달하는 미공사의 주요한 건물들은 중심선을 따라 뒤로 들어가며 차례로 줄지어 있으며 그 중앙에는 미씨의 자손들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지은 배전(拜殿)이 위치한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고융중)

미공사의 뒤에 위치한 보진재(寶晉斋)의 비랑(碑廊)에는 비문이 새겨진 많은 역대의 비석이 보존되어 있다. 후에 앙고당(仰高堂)과 결정(潔亭), 동원(東苑), 서원(西苑) 등 건물을 개축해 미공사는 초목이 우거지고 가산이 아담한 아름다운 환경을 자랑한다.

양번은 삼국시기에 아주 유명해 현재도 고성의 안팎에는 삼고초려와 융중대(隆中對) 등 이야기가 발생한 고융중(古隆中)과 동한(東漢) 후반의 명사 사마미(司馬微)가 은둔하던 곳 수경장(水鏡庄), 유비(劉備)가 말을 타고 단계(檀溪)를 벗어난 장소, 관우가 수공(水攻)으로 전쟁에서 이긴 장소 등 많은 삼국문화 유적지가 보존되어 있다.

양양성의 서쪽 산중에 위치한 고융중은 사면에 소나무 울창한 산이 둘러서고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경치 좋은 명소이다. 삼국시기 유명한 인물인 제갈량이 유비의 군사가 되기 전에 바로 이 곳에 은둔했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수경장)

고융의 산중에는 제갈량과 유비, 관우, 장비(張飛)가 남긴 흔적과 무후사(武侯祠), 삼고문(三顧門), 삼고당(三顧堂), 고백정(古柏亭), 관성대(觀星臺), 금대(琴臺) 등 역대로 축조한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수경장(水鏡庄)에 산재한 누각 형식의 고건물들은 날아갈 듯 건듯 들린 지붕이 웅장함을 자랑하고 금빛의 창틀과 붉은 기둥에는 정교한 조각과 화려한 그림이 즐비하며 그 사이에 보이는 사마미와 제갈량 등 역사 인물들의 조각도 생동하기 그지 없다.

수경장에는 현재 초려(草廬)와 수경유적지, 사마미의 이야기가 기록된 비랑, 수경사(水鏡祠), 유거재(幽居斋) 등 명소가 있으며 아름다운 환경이 예스러운 건물, 재미 있는 스토리와 어울려 많은 볼거리를 만든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양번)

동한 후반의 명사 사마미(司馬微)가 은둔하던 수경대(水鏡臺)는 맑은 물을 마주하고 산 자락에 위치한 산 좋고 물 맑은 명소이다. 삼국시기 유비가 말을 타고 단계를 벗어나 수경장에 이르러 사마미를 만났다.

그 때 사마미는 유비에게 ‘와룡(伏龍)과 봉추(鳳雛)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얻으면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말했고 그로부터 ‘삼고초려’와 ‘융중대(隆中對)’ 등 역사 이야기가 펼쳐지게 되었다.

양번은 역사적으로 음악문화의 고장이기도 하다. 일찍 전설 속의 황제 염제(炎帝)가 이 곳에서 악기 슬(瑟)을 발명하고 ‘풍년의 노래’를 창작했으며 동한(東漢) 후반 음악의 대가 두기(杜夔)의 아악(雅樂) 4부곡은 진(晉)나라 때까지 유행되었으며 명(明) 나라와 청(淸) 나라 때에 이르러 양번의 음악문화는 전에 없는 번성일로를 달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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