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30 09:38:23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성-29] 新絳: 臥牛의 도시

(사진설명: 아름다운 신강고성)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스물 아홉 번째는 진(晉)과 남당(南唐) 와우(臥牛)의 도시 신강(新絳)이다. 신강고성은 산수의 경지도 보여주고 민풍의 운치도 그려낸 중국화처럼 자연의 취미를 가득 안고 있다.

부지 2.5㎢의 고성에 당(唐)과 송(宋), 원(元), 명(明), 청(淸)을 비롯한 역대 왕조의 문화재가 대량으로 산재한 이 곳에서는 걸음마다 서로 다른 시기의 명승을 만날 수 있다.

고대에 강주(絳州)라 불린 신강은 산서(山西)의 서남부, 분하(汾河) 강과 회하(澮河)강이 합류하는 곳, 북쪽으로 여량산(呂梁山), 남쪽으로 아미령(峨嵋嶺) 산발을 멀리 바라보는 임분(臨汾) 분지에 자리잡고 있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신강고성)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신강은 춘추(春秋)시기에 진(晉)의 도읍이었으며 그 뒤에 줄곧 산서 남부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수(隨)나라 때인 583년 주도(州都)가 신강으로 옮겨오면서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한 신강고성은 14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당나라 때 신축한 신강고성은 성의 모양이 소 한 마리가 바닥에 드러 누운 듯 하다고 해서 와우성(臥牛城)이라고도 불린다. 남북 방향으로 뻗은 넓고 긴 거리는 소의 등뼈를 방불케 하고 거리의 양쪽에 뻗은 62갈래의 골목은 소의 갈비뼈와 같다. 또 남쪽 성문 안에 있는 두 개의 연못은 소의 눈이고 북쪽 성문 근처에 솟은 당나라 때의 탑은 소의 꼬리를 방불케 한다.

신강고성은 ‘네모난 성, 십자로 뻗은 거리, 좌우 대칭’의 다른 중국 고성과 달리 모든 건물들이 지세를 따라 자연스럽게 산재해 당나라 고성의 특색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사진설명: 신강고성의 건물)

산서의 다른 고성들과 마찬가지로 신강고성의 모든 땅에는 유구한 역사와 세월의 변화가 남아 있고 건물 곳곳에는 수많은 스토리들이 깃들어 있다.

멀리서 고성을 바라보면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면서 강주삼루(絳州三樓)와 강주대당(絳州大堂), 당나라 탑이 우뚝 솟아 생동하면서도 변화 많은 도시의 윤곽과 도시의 모습을 그려낸다.

이런 건물들은 또한 고대 강주의 중요한 심벌이기도 하다. 그 중 가장 신기한 건물은 강주대당이다. 이 고건물은 중국에서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주(州) 관아 건물의 하나이다.

(사진설명: 웅장한 강주대당)

당나라 때 신축한 강주대당은 방 일곱 칸 너비에 방 여덟 칸 길이의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한 겹으로 된 팔작지붕을 한 이 강주대당은 천 년이 넘도록 줄곧 강주관아로 사용되었다.

당나라 초반에 좌장군(左將軍) 장사귀(張士貴)가 이 곳에서 군대를 모집했는데 당시 미천한 출신이지만 후에 유명한 장군이 된 강주출신의 설인귀(薛仁貴)가 이 곳에서 나라를 위한 군인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황혼이 질 때면 화려한 저녁 노을 속에서 종루(鐘樓)와 고루(鼓樓), 악루(樂樓)가 절묘한 그림을 그린다. 강주대당의 앞쪽에 높고 낮게 자리해 한자로 품(品)자 형을 이루는 이 세 건물을 강주삼루라고 부른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강주삼루)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악루는 과거 연극공연을 하던 무대였다. 오늘날 건물이 비록 많이 낡아졌지만 악루는 여전히 소박하고 화려한 아름다움을 유지한다.

악루의 앞쪽에 있는 통로와 연결된 고루는 원(元)나라 때인 1300년대에 신축했다. 돌로 기초를 쌓고 벽돌로 외벽을 쌓은 고루는 세 겹으로 된 팔작지붕에 유리기와를 얹어 웅장함과 화려함을 연출한다.

종루에는 금(金)나라 때인 1151년에 주조한 만 근(5,000kg)이 넘는 큰 구리종이 걸려 있는데 은은한 종소리는 지금도 15리(里, 7.5km)까지 울려 퍼진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칠성파)

고루와 악루를 연결하는 언덕길 칠성파(七星坡)에는 7개의 돌이 북두칠성의 모양으로 박혀 있는데 과거에는 한밤중이 되면 이 7개의 돌이 별처럼 빛을 뿌렸다고 한다.

이 칠성파로는 사람들이 오가고 여름 밤이면 이 언덕길에서 악루의 연극을 구경할 수도 있고 강주성의 야경을 감상할 수도 있다. 높은 언덕에 세워진 강주삼루는 근대에 지은 고딕식 성당, 당나라 탑과 함께 고대 강주성의 심벌이 되었다.

신강고성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명소는 강수거원지(絳守居園池)이다. 신강고성의 서쪽에 조성된 이 정원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보존된 수(隨) 나라 때 정원이자 중국 북방의 유명한 정원이기도 하다.

(사진설명: 강수거원지의 일각지)

‘수원(隨園)’, ‘연화지(蓮花池)’, ‘신강화원(新絳花園)’, ‘거원지(居園池)’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강수거원지에는 정자와 누각, 전각이 즐비하고 그 사이로 맑은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아담한 동산이 자리잡으며 고목이 울창하고 온갖 꽃이 만발해 심히 아름답다.

전한데 의하면 당나라 학자와 시인들인 금삼(芩參)과 구양수(歐陽脩), 매요신(梅堯臣), 범중엄(范仲淹) 등이 모두 이 정원을 찾았고 정원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많은 시를 남겼다고 한다.

신강성 중심거리의 끝에는 시원하게 우뚝 솟은 탑 한 기가 세워져 있다. 13층에 높이 43m에 달하는 이 탑은 단면이 팔각형이며 계단이 조성되어 탑 정상에 올라 고성을 전망할 수 있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고탑)

탑 옆에는 사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당나라 개국 초반인 600년대 이 곳에 벽락관(碧落觀)을 지었다. 그 후 북송(北宋)의 개국황제가 이 곳에 머물면서 용흥궁(龍興宮)으로 개명했다가 스님들이 건물을 차지하면서 용흥사가 되었다.

사원에 보존된 벽락비(碧落碑)의 수려함이 돋보이는 서체는 아주 예스럽고 필법이 절묘한 전서(篆書)체이다. 비문에 의하면 당나라 때인 670년 당시의 한왕(韓王) 원가(元嘉)의 네 아들이 모친을 위해 이 탑을 세웠다고 한다.

풍부한 역사문화 경관을 보존한 신강은 내외에 이름이 자자한 수공예의 도시이기도 하다. 문헌에 의하면 춘추전국(春秋戰國)시기 벌써 이 곳의 수공예가 아주 발달되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신강고성의 고루)

기원전에 신강에서는 벌써 공법이 정교하고 모양이 아름다운 정(鼎)과 가마, 사발, 국자 등 청동기를 주조했다. 또 당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주조와 방직, 제련, 목각, 양조 등 다양한 산업이 발달해 신강고성은 ‘칠십이항성(七十二行城)’이라 불리기도 한다.

신강의 희곡예술과 민간예술도 아주 풍부하고 다채롭다. 고대의 강주는 징과 북 놀이의 발원지와 원잡극(元雜劇)의 주된 활동지였다. 이 곳에서는 송나라와 원나라 희곡인물이 새겨진 많은 벽돌조각이 출토되고 명나라와 청나라 때의 무대 건물도 신강 곳곳에 산재해 있다.

강주고악(絳州鼓樂)의 역사는 당나라 때인 6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나라 황제 이세민(李世民)은 수나라 군대와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후 이 곳에서 처음으로 북을 울려 승리를 경축했다고 전해진다.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온 강주고악은 이제 국제무대에도 오른다.

(끝)

공유하기:
뉴스 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