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아름다운 광주)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일흔 두 번째는 근대 중국혁명의 발원지 광주(廣州)이다. 사람들이 광주를 양(羊)의 도시라 부르는 것은 광주의 유구한 역사를 말함이고 꽃(花)의 도시라 부르는 것은 광주의 풍부한 식물자원을 칭찬해서이며 이삭(穗)의 도시라 부르는 것은 광주의 아름다운 전설에 의해서이다.
도시를 흐르는 주강(珠江)의 양안에 맛집이 즐비하고 사화(沙畵)섬에 별다른 운치가 흐르는 영남(嶺南)의 도시 광주는 이렇듯 남다르다. 또한 광주는 교양이 있는 대갓집 규수를 방불케 하면서도 항상 시대의 선두를 달린다.
광동(廣東)성 성도 광주는 주강 삼각주의 북쪽, 남해(南海) 기슭, 서강(西江)과 북강(北江), 동강(東江) 세 갈래 강물의 합류점에 위치한, 중국 남방에서 최대 규모의 도시이다.
(사진설명: 광주의 예스러운 양옥)
광주는 상고시대에 백월(百越)의 땅이었다. 기원전 887년 초(楚)나라가 광주에 행정기관인 ‘초정(楚庭)’을 설립했으며 기원전 214년 진시황제(秦始皇帝)가 남해군(南海郡)을 두어 광주를 관리하면서 군 소재지를 번우(番禺), 오늘날의 광주에 두었다.
당시 남해군 군위(郡蔚) 임효(任囂)가 번우에 성을 쌓았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 성을 ‘임효성’이라 불렀다. 기원전 200년대의 서한(西漢) 초반 조타(趙佗)가 월(越)나라를 세우고 도성을 번우에 두었다. 조타는 임효성을 증축하고 ‘조타성(趙佗城)’이라 불렀다.
삼국(三國) 시기 영남지역은 오(吳)나라에 속했다. 226년 오나라가 영남에 교주(交州)와 광주 두 주를 두면서 광주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900년대의 오대십국(五代十國)시기에 광주는 55년 동안 남한(南漢) 정권의 도성으로 있었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회성사)
광주는 2천여 년 전에 벌써 유명한 상업무역의 도시였고 방직과 도자기, 식품가공, 금속제련 등 수공업이 흥기했으며 조선과 항해기술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당시 중국의 선단(船團)은 광주에서 출발해 남양의 여러 나라들, 그리고 멀리 페르시아만에까지 이르렀으며 진(秦)나라는 동로마제국과 무역거래를 유지했다.
300년대부터 500년대까지 사이에 광주의 해외무역과 대외문화교류는 더욱 빈번해 동로마제국이 광주에 사절을 파견하고 외국의 승려들이 잇달아 광주를 찾았으며 인도의 불교도 광주에 전파되어 광효사(光孝寺)와 화림사(華林寺) 등 절을 지었다.
(사진설명: 황포육군사관학교 유적)
600년대부터 900년대까지의 당(唐)나라 때 광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항만도시로 부상해 대외무역의 범위가 남태평양과 인도양 지역의 여러 나라들로 확대되었다.
당 왕조는 대외무역을 더 잘 관리하기 위해 광주에 중국 최초의 대외무역기관 및 세관 격인 ‘시박사(市舶使)’를 두어 대외무역을 관장했다. 그 밖에 광주에 오는 외국인들이 머물도록 ‘번방(䉒坊)’이라는 전문 숙박장소도 마련했다.
당시 광주에 이른 외국선박이 많았으며 광주에 거주하는 외국 상인들도 많아 최고로 10만명을 넘기도 했다. 외국인들 중 다수를 차지하는 아랍인들이 이슬람교를 신앙하면서 번방에 이슬람사원 회성사(懷聖寺)를 지었다.
(사진설명: 웅장한 진해루)
900년대부터 1100년대까지 사이에 광주는 중국에서 규모가 가장 큰 상업도시와 통상항만이 되어 중국 전역에서 차지하는 광주의 무역액은 98% 이상에 달했다.
1600년대 초반에 광주의 대외무역 항로가 빠른 속도로 확대되어 북미주와 러시아, 대양주를 오가는 항로를 개척했다. 1784년 미국상선 ‘중국황후호’가 뉴욕에서 출발해 광주에 이르면서 북미주에서 광주까지의 무역항로가 개통되어 인기를 끌었다.
광주의 무역을 더 잘 관리하기 위해 청(淸) 정부는 수출입무역을 전문 관리하는 상사 ‘양화행(洋貨行)’과 기타 무역을 관리하는 ‘금사행(金絲行)’를 두어 내외 무역을 분리해서 관리했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중산기념당)
후에 양화행 상인들의 특허 업종을 ‘십삼행(十三行)’이라 불렀으며 그로부터 광주의 대외무역은 최고의 번성일로를 달렸고 십삼행도 내외에 큰 명성을 떨쳤다.
중국의 근대혁명역사에서 광주는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 1841년 영국군이 광주를 침략하자 광주 교외 103개 향의 향민들이 자발적으로 일떠나 삼원리(三元里) 일대에서 영국침략군에 맞섰다.
신해혁명(辛亥革命) 후 광주는 군벌들이 서로 다투는 중요한 도시가 되었고 군벌의 통치를 반대하기 위해 손문(孫文) 선생은 광주에서 혁명정권을 수립했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진가사)
삼원리 평영단(平英團) 유적지와 중산기념당(中山紀念堂), 광주 농민운동 강습소(講習所) 유적지, 황화강(黃花崗) 72열사 무덤, 황포(黃浦) 육군사관학교 유적지 등이 근대 광주가 걸어온 혁명의 발자취를 잘 보여준다.
고대 실크로드 중 해상 실크로드의 출발지 중 하나였던 광주에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유적도 아주 많다. 그 중 특히 진가사(陳家祠)와 광효사(光孝寺), 오선관(五仙觀), 남월왕(南越王) 무덤, 육용사(六榕寺) 꽃 탑, 회성사(懷聖寺)가 가장 대표적이다.
진씨서원(陳氏書院)이라고도 부르는 진가사는 광동 72개 현의 진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세운 진씨의 가문사당이다. 부지가 1만 5천 ㎡를 초과하는 진가사는 정교한 건축과 뛰어난 벽돌조각으로 높은 명성을 자랑한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광효사)
광동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인 광효사는 처음에 서한 월왕(越王)의 저택이었다. 그 뒤 삼국시기 오나라 관리 우번(虞翻)이 기거했고 우번의 사후 그의 가족들이 절로 고쳐 제지사(制止寺)라 이름했다.
676년 당나라 고승 혜능(慧能) 스님이 이 절의 계단(戒壇) 앞 보리수 아래에서 수계(受戒)를 받고 불교 남종(南宗)을 설립했다. 1151년 제지사는 광효사라 개명해 오늘날에 이른다.
현재 영남지역에서 규모가 가장 큰 절인 광효사는 웅장한 규모와 엄밀한 구도를 자랑하며 특히 동진(東晉) 때의 전각과 당(唐)나라 때의 탑, 명(明)나라 때의 불상 등 많은 유적과 유물을 보존한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월수공원)
아열대 경치를 자랑하는 광주는 일년 사시절 꽃이 피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도심의 월수산(越秀山)은 수려한 산악경치와 풍부한 문화재를 아우르는, 광주에서 규모가 가장 큰 복합형 문화의 공원인 월수공원으로 탈바꿈되었다.
월수공원에는 진해루(鎭海樓)와 명나라 때 만리장성유적, 중산기념당, 월수루(越秀樓) 유적, 오양석상(五羊石像) 등 많은 볼거리가 있다. 월수산 산정에 솟은 높이 28m의 진해루는 ‘바다의 안녕을 지킨다’는 의미를 가진다.
명나라 때인 1380년에 신축한 진해루는 5층으로 되어 있는데 웅장하고 예스러운 진해루에 올라서면 저 멀리 아름다운 도시 광주가 한 눈에 안겨와 마음이 탁 트인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오양석상)
공원에 조성된 오양석상은 신화를 기반으로 조성했다. 전한데 의하면 다섯 명의 선인이 오색의 옷을 입고 각자 오색의 양을 타고 광주에 와서 곡식이삭을 초정(楚庭)에 뿌렸다고 한다.
그리고 선인은 하늘로 날아 올라가고 양은 돌이 되여 광주에 남았다고 해서 광주는 ‘양의 도시’라는 의미로 ‘양성(羊城)’ 혹은 ‘이삭의 도시’라는 의미로 ‘수성(穗城)’이라 불리기도 한다. 오늘날 오양석상은 광주의 심벌이 되었다.
사람들은 늘 ‘주해백운(珠海白雲)’이라는 말로 광주의 경치를 형용하는데 여기서 주해는 주강과 바다를 말하고 백운은 남월의 제일 명산이자 광주 최고로 수려한 산으로 인정되는 백운산(白雲山)을 가리킨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백운산과 광주)
광주의 북쪽에 7.5km나 뻗은 백운산은 30여 개의 산봉우리와 28㎢ 면적의 산발로 구성되어 있다. 산발이 기복을 이루고 산봉우리가 겹겹하며 초목이 무성한 백운산에는 늘 하얀 구름이 감돈다고 해서 이름이 백운산이다.
해발고도 382.3m의 백운산에는 투산정(鬪山亭)과 능인사(能仁寺), 명주루(明珠樓), 수월각(水月閣), 황파동(黃婆洞) 등 인문명승과 ‘하얀 구름과 소나무 숲’, ‘백운산 전망대’ 등 빼어난 자연경관이 펼쳐져 비경이다.
예로부터 광주의 명승인 백운산 정상에 올라서면 저 멀리 아름다운 광주시 전경을 굽어볼 수 있다. 따라서 역대로 송(宋)나라 때의 대문호 소동파(蘇東坡)와 양만리(楊萬里) 등이 모두 백운산에 올라 시작을 남겨 백운산에 두터운 문화적 함의를 가미했다.
(사진설명: 백운산의 우물 구룡천)
백운산에서는 산허리에 있는 용왕의 태자가 변했다는 우물 구룡천(九龍泉)도 명물이다. 옛날 이 곳에는 우물이 없었는데 기원전 200년대 한 은둔자가 이 곳에 은둔했다.
은둔자가 물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어린 동자 아홉이 나타나 우물을 팠으며 그 동자들이 바로 용왕의 태자라고 전해져 우물의 이름이 구룡천이다.
구룡천은 원래 백운사의 우물이었는데 현재는 우물의 주변에 돌 난간을 쌓고 용을 새긴 기둥을 세웠으며 그 옆에 ‘구룡천’ 비석을 세웠다. 오늘날도 구룡천의 물은 맑고 달아 한 모금만 마셔도 마음까지 시원해진다.
(사진설명: 꽃과 아름다운 광주)
광주는 또 유명한 꽃의 도시이자 화교의 고향이기도 하다. 아열대 지대에 위치한 광주는 여름이 길고 겨울에 따뜻하며 일년 사시절 녹음이 푸르고 꽃이 화사해서 ‘꽃의 도시’라는 의미로 ‘화성(花城)’이라 불리기도 한다.
따라서 광주인들은 유난히 꽃을 좋아하며 꽃을 심고 꽃을 사랑하고 꽃을 감상하고 꽃을 선물하는 광주인들의 풍속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화교의 고향인 광주는 중국에서 화교가 가장 많은 도시이다.
광주의 화교는 세계적으로 5대주의 116개 나라와 지역에 분포되어 있으며 그 중 동남아 지역과 미국, 캐나다, 호주 등 나라에 상대적으로 가장 많이 집중되어 있다.
(사진설명: 광동요리 중 딤섬)
광주에서는 맛 있는 음식도 맛보지 않을 수 없다. 광주와 조주(潮州), 동강(東江) 세 지역의 요리를 기반으로 사천(四川)요리와 산동(山東)요리, 절강(浙江)요리 등 기타 지역요리의 장점을 합친 광동요리는 중국 4대 요리에 속하며 맛이 담백하면서도 깊고 식재가 풍부한 특징을 가진다.
‘음식은 광주에서, 맛은 서관에서’라는 속담이 있다. 광주의 음식이 최고이고 온갖 음식이 모여 있는 서관(西關)은 광주에서 가장 번화한 미식가임을 말한다. 서관은 광주미식문화의 핵심구역이자 정통 광주 딤섬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광주의 공예미술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뚜렷한 지방특색을 가진다. 그 중에서도 특히 상아조각과 마호가니조각, 옥돌조각, 채색 도자기, 광주자수가 가장 유명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