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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구 "중류격즙(中流擊楫)" 잃어버린 땅을 되찾겠다는 굳은 결심 
2013-05-10 18:03:36 cri

中流擊楫(중류격즙)

◎글자풀이: 가운데 중(中), 흐를 류(流), 칠 격(擊), 노 즙(楫)

◎뜻풀이: 강의 중류에서 노를 두드리다라는 뜻으로 잃어버린 땅을 되찾겠다는 굳은 결심 또는 가슴에 품은 웅대한 뜻을 비유하는 사자성어이다.

◎출전: <진서(晉書)> <조적열전(祖逖列傳)>

◎유래:

춘추시기 오(吳)나라가 초(楚)나라 경성을 공격하자 초소왕(楚昭王)은 영토를 버리고 도주하였다. 이에 초나라 대부 신포서(申包胥)가 진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신포서는 진애공(秦哀公)을 만나 이렇게 아뢰었다.

"오나라가 무도함으로 천하를 삼키려 하니 초나라가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충신으로서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진공께 간곡히 청을 올립니다. 부디 저의 고충을 헤아려 주시고 초나라를 구원해주십시오."

그러자 진애공은 "먼저 돌아가게. 짐이 대신들과 의논해볼 것이니..."라고 하며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신포서가 거듭 애걸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신포서는 진나라 조정 대청에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이레 동안 통곡하였다. 신포서의 읍소에 감동한 진애공은 "초국에 이런 충신이 있다니... 과인에게는 이런 충신이 없음에 슬프구나!"라고 말하며 즉각 출병을 명령했다.

진나라 군대는 오나라와의 접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초나라를 회복하였다. 왕위를 되찾은 초소왕이 신포서에게 상을 내렸지만 신포서는 이를 거절하였다. "내가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것은 명예나 노고를 치하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제 군주의 왕위가 안정되었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그날 밤, 신포서는 작별하고 산중으로 들어가 은거생활을 했다.

중국의 역사에는 신포서와 같은 충신들을 찾아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동진(東晉) 시기의 조적(祖逖) 역시 우국우민지사로 역사에 기록된 인물이다.

위진(魏晉) 시기 이민족 간의 갈등으로 천하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동진 조적은 적들에게 영토를 빼앗기고 형제들이 처참히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잃어버린 땅을 수복하고 국위를 드높이 떨치리라 마음을 다졌다. 조적은 북벌을 실현하고자 무사들을 소집하여 밤낮으로 호된 훈련을 거듭하며 세력을 키워갔다. 그러던 어느날, 조적이 진나라 원제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진(晉)나라 황실의 난은 번왕들이 권세를 다퉜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외적들에게 처참히 짓밟힌 백성들도 격분하여 투지에 불타있습니다. 군주께서 여러 장군에게 위엄으로 명하고 조적에게 군사를 맡겨 출병을 허락하신다면 국군의 호걸들도 반드시 이를 따를 것이며 저 조적은 반드시 적들을 제거하고 국치를 씻을 것을 맹세하옵니다."

원제는 몹시 기뻐하며 조적을 분위장군(奮威將軍)에 임명하고 천 명이 먹을 양식과 베 3천 필을 주며 스스로 의병을 모으게 했다. 드디어 조적이 대군을 이끌고 강을 건너 북상하였다. 함선이 장강 중류에까지 이르자 조적은 노로 뱃전을 두드리며 "중원의 적을 소멸하고 강산을 수복하지 못하면 이 조적은 흐르는 강물처럼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중류격즙(中流擊楫)"하고 맹세했다.

조적은 수차례 싸움에서 적들을 물리치고 많은 땅을 수복하였다. 조적은 병법을 다스림에 현명하였고 상과 벌을 줌에 있어서 몹시 엄격하였다. 그는 전사한 병사들의 시신을 거두고 제를 지냈으며 투항한 적들은 용서했다. 이에 군심과 민심이 그에게 모아지니 백성들은 조적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면 돼지를 잡고 술을 올리며 그들의 승리를 경축했다. 당시 강북일대에는 조적의 위덕을 기리는 민요가 전해졌다고 한다.

                          "다행이로다 남은 백성들은 포로신세를 면하고

                           삼신(三辰)은 밝아져 자애로운 아버지를 만났구나

                           현주(玄酒)는 고달픔을 잊게 하고 포효(瓠脯)는 달콤하니

                           무엇으로 은혜를 노래하고 춤을 추랴"

사자성어 "중류격즙(中流擊楫)"은 중국 진(晉)나라 때 외적의 침입에 맞서 싸운 조적의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었다. 강의 중류에서 노를 두드리다라는 뜻으로 잃어버린 땅을 되찾겠다는 굳은 결심 또는 가슴에 품은 웅대한 뜻을 비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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