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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상(포도常)의 역사
2011-05-19 15:59:22 cri

포도상 작품

1894년 음력 10월, 청조 광서황제가 의화원에서 자희태후 60세 생일을 축하하던 날, 자희태후는 의화원극장에서 경극을 관람하다가 우연히 싱싱하고 먹음직한 포도를 발견했다. 음력 10월의 베이징은 이미 초겨울에 들어섰는데 이와같이 신선한 포도를 발견하자 자희태후는 크게 기뻐하며 하인들에게 포도를 뜯어오도록 분부했다. 하인은 급히 "그 포도는 가짜랍니다"라고 전했다. 자희태후는 너무도 신기해 누가 만든 가짜포도냐고 묻자 "한치하웨부"라고 부르는 부부의 작품이라고 대답했다. 자희태후는 그들의 손재주에 탄복하여 "한치하웨부"의 부인에게 "상재(常在)"라는 이름을 주었고 "무의상(無儀常)"이라는 편액을 하사했다. 자희태후의 은혜를 갚기 위해 "한치하웨부"는 상재로 개명했고 가족의 성씨를 전부 "상(常)"씨로 바꿨다. 포도상(葡萄常)"은 이에서 전해진 말이다.

포도상의 창시인- 상재는 몽골족 사람이다. 청조 도광황제때 궁중에서 몽골 공주를 맞아들였는데 당시 상재는 수종으로 베이징에 따라왔다. 함풍황제가 등극한후 사회적 영향으로 인해 상재는 작은 장사로 생활을 겨우 유지하게 되었다.

어느날 그는 아이들이 흙으로 놀이감을 만들며 즐기는 것을 보고 계발을 받았다. 상재는 흙으로 포도를 빚어 염색하고 구워낸 후 거리에서 팔아보니 의외로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당시 베이징 숭문문(崇文门) 부근의 꽃시장일대는 이미 옥기와 장신구, 유리기 등을 만드는 공예가들이 집결되어 집시를 형성했다. 상재는 유리기 공예가들에게서 기술을 배워 유리기로 포도를 만들려고 시도했다. 유리기는 흙보다 생동하고 아름다웠기에 유리기 포도가 일품일것이라 예상하고 상재는 끊임없는 연구와 실천끝에 끝내 새로운 공예품을 창작해냈다.

1919년, 포도상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파나마국제박람회"에 참가해 1등상을 수상했으며 포도상의 이름은 국내외로 널리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상재의 두 아들이 선후로 작고한후 상재의 3명의 딸이 이 기술을 이어받게 되었다. 가족의 전통기예를 지키기 위해 3명의 딸은 평생 시집가지 않았으며, 상재의 두 손녀 상옥령과 상옥청도 고모와 동병상련으로 평생 시집가지 않는것으로 포도상의 기예를 계승했다. 상씨네 다섯처녀는 자신의 청춘과 사랑을 희생하여 이 소중한 전통기예를 지켜왔다.

포도상이 제작한 포도 등 제품은 모두 유리를 주재료로 한다. 먼저 금속관으로 일정한 온도에 달한 유리용액을 포도알 모양으로 불어 만든 다음 일련의 공예과정을 거쳐 완성품이 된다. 이렇게 완성된 포도알은 자주색, 파란색이 있는가 하면 표면에 한층의 하얀색 서리가 앉아 오색영롱하고 먹음직해 천연포도를 연상케 한다.

포도상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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