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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사상가 순자
2010-02-01 10:19:55 cri

순자(荀子) 기원전 3세기 중국 문명에 심원한 자취를 남긴 또 한 명의 위대한 사상가이다. 순자의 이름은 황(況)이고, 자는 경(卿)이다. 순자가 손(孫)자와 발음이 비슷해서 순경, 손경자(孫卿子)라고도 불렀는데 경이란 벼슬한 사람에 대한 존칭이기도 했기 때문에 순자를 귀족 출신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중국 고대의 역사서인 "사기"는 순자의 일생을 50세 무렵부터 적고 있는데 순자가 50세 이전에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기재에 의하면 순자는 조(趙)나라 사람으로 50세 무렵에 제(齊)나라에서 유세(遊說)하여 직하(稷下)에 모였던 학자들 사이에서 장로(長老)로 존경받았다. 그러나 순자는 그를 시기하는 자들의 모략에 피해를 입은 후 진나라로 자리를 옮겼다. 진나라는 당시 최강대국이었으며, 부국강병을 주장하는 법가 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삼고 있었다. 때문에 덕을 강조하는 순자의 사상이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하여 순자는 초(楚)나라로 자리를 옮긴 후 춘신군(春申君)에 의해 등용되어 난릉(蘭陵 현재의 산동성 남부)의 지사(知事)가 되었다. 난릉은 사방 백 리 정도의 작은 고장이다. 그러나 이때가 순자가 처음으로 자신의 철학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본 시기가 된다. 기원전 238년 춘신군이 암살당하자 순자는 관직에서 물러나 난릉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책을 짓는 일로 여생을 보냈다.

순자의 제자 가운데서 법가 사상의 이론적 기초를 세운 한비자와 진시황을 도와 중국을 통일한 이사가 나온다. 그러나 후대 학자들은 한비자와 이사를 유가 사상가로 보지 않았고 순자를 법가 사상가로 보지도 않았지만 기실 순자는 유가와 법가의 갈림길이었던 셈이며 순자의 현실 지향적 사고가 법가 사상의 모체가 되었다.

순자의 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 책이 "순자"이다. "순자"는 본래 323편이었다고 하는데 한나라 때 유향이 32편으로 정리했다. 책의 편제는 대화체가 많은 논어나 맹자와는 달리 논문 식으로 되어 있으며 제자들의 기록이라고 짐작되는 일부분을 빼면 대부분 순자가 직접 쓴 글로 보인다. "순자"에 들어 있는 대부분의 글은 표현이 소박하며 꾸밈이 거의 없다. 그러나 글의 전개 방식의 체계적이며 비교적 논증이 세밀하다. 이 점은 순자의 철학이 객관적 방법론 토대 위에 서 있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예기"가운데 많은 부분을 순자가 지은 것으로 보기도 하고 증자가 그의 문인들과 함께 지었다고 하는 "대학"도 순자의 글로 보기도 한다.

순자의 사상

순자는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는 맹자의 기본 신조에 대하여 명백하게 반대하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의 본성은 비인격적이고 도덕과 무관한 천(天)으로부터 유래하였으며, 사람의 감정과 본능적 욕망은 사람을 싸움으로 이끌기 때문에 나쁜 것이다. 이러한 상태를 교정하기 위해서는 교육을 통한 개량이 필요하다. 그는 스승은 매우 중요한 존재이며 따라서 존경받아야 마땅하다고 강조했으며 학습의 과정은 "경전을 암송하면서 시작하고 예(禮)를 공부하는 것으로 끝난다."고 하였다.

순자 사상의 특징은 철저하게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 것이다. 순자는 사람의 본성을 악하다고 했지만 그 악한 본성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인간 자신의 의지적인 노력을 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의 구체적인 제도로 "예제(禮制)"주장했다. 순자는 "예제(禮制)"의 부활을 단순한 복고가 아니라 현실의 임금들이 당시에 맞는 예의 제도를 만들어서 피치자 모두를 교화시켜 가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그것이 실현되기를 바랐다.

그는 사람의 본성은 악(惡)하지만 후천적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고대 중국에서는 재해를 하늘의 뜻으로 여겼는데 인간의 후천적 노력을 중시하는 순자는 이를 부정하였다. 또한 그는 고대의 신화적 천자, 즉 선왕(先王)을 군주의 이상형으로 삼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반대하였고 현재의 정치는 현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고 현실에 노력한 왕, 즉 후왕(後王)이 정한 정책이나 제도에 당연히 복종해야 한다는 후왕사상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현실 및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중시하는 순자의 주장은 이상론을 원칙으로 삼는 유교에서는 이단시되어 오다 18세기에 접어들어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순자 이전의 사상가들은 대부분 모든 것의 근원을 하늘에서 찾고 만물을 낳아 준 것도 하늘이고 주재하는 것도 하늘이라고 인정했다. 그들의 학설에 따르면 하늘은 만물 생성의 근원일 뿐 아니라 인간 도덕의 근원이기도 했다. 그러나 순자는 인간과 하늘의 관계를 끊어 버렸다. 그는 하늘이란 비가 오고 바람 부는 자연 현상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보았고 따라서 하늘은 인간을 낳아 준 존재도 아니며 더구나 인간의 도덕적인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주장했다.

순자는 경전과 예를 사람에게 절대로 필요한 모든 지혜의 보고로 이해하고 규칙적인 교육과 스승에게 핵심적 역할을 부여하였으며 귀신에 대한 믿음을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유가의 주류를 구성하는 많은 사상적 요소를 제공하였다. 교육과 의례, 계급 질서, 훈계와 징벌을 통한 엄격한 통치 등에 대해 크게 강조한 순자의 사상은 점차 중국 정계 발전사에 큰 영향을 미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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