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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기 촉나라 개국 황제 유비
2010-06-21 15:29:09 cri

유비(劉備)는 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 황제이다. 유비의 자는 현덕(玄德)인데 탁현 출신이다. 유비는 전한(前漢) 경제(景帝)의 아들이며, 중산왕(中山王) 유승(劉勝)의 후예이다. 유비는 귀가 굉장히 컸으며 또한 손을 내리면 손끝이 무릎까지 닿았다.

유비는 어려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멍석을 짜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런 생활 속에서 유비는 자신의 세력을 확장해 나가면서 관우, 장비와 유명한 도원의 결의로써 형제의 의를 맺고 인재를 모으면서 자신을 중심으로 한 집단을 형성했다.

184년 황건 봉기가 일어났다. 그 때 말 장수들이 유비가 거사할 수 있는 자금과 말을 제공해주었다. 이를 밑천으로 유비는 같은 고향의 장비(張飛)와 탁군에 망명한 관우(關羽) 등과 손을 잡고 군사를 일으켰다. 황건 봉기를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유비는 안희현(安喜縣)의 지방관에 임명되었다. 처음에는 유비는 자신이 직접 지배하는 영토가 없어 서주 목사 도겸(陶謙)에게 의지 했다. 그 후 도겸이 병사하면서 자기의 지위를 유비에게 넘겨주어 유비는 비로소 손바닥만한 근거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 후 유비는 공손찬(公孫瓚), 조조(曹操), 원소(袁紹) 사이를 전전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갔다.

조조 밑에 있을 때 이런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조조가 연회석에서 유비에게 이렇게 말했다.

"천하의 영웅은 오직 그대와 나 두 사람뿐일세."

이 말을 들은 유비는 크게 놀라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유비는 조조의 말속에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여 유비는 조조에게 원술을 치겠다고 5만 군사를 얻어가지고 조조의 손이 미치지 않은 곳으로 떠났다.

조조의 공격을 두려워한 유비는 원소를 설득하여 조조와 대항했다. 그러나 조조와 원소의 싸움에서 조조가 크게 승전하자 유비는 다시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몸을 의탁한 곳은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였다. 유표는 유비에게 신야(新野) 수비를 맡겼다. 유비는 유표의 밑에서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하면서 한편으로 제갈량(諸葛亮)과 방통(龐統) 등 우수한 인재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이 바로 제갈량이다.

유비는 제갈량을 모사로 삼기 위해 세 번이나 제갈량의 집을 찾아갔다. 이 이야기를 역사상 삼고초려(三顧草廬)라고 한다. 서서(徐庶)가 먼저 유비에게 제갈량을 추천하고 떠난 후 사마휘(司馬徽)가 제갈량을 유비에게 추천하였다. 사마휘는 제갈량을 주왕조 팔백년을 일으킨 강태공이나 한 왕조 사백년을 일으킨 장량과도 견줄만한 인물이라고 했다. 그래서 유비는 예의를 갖추어 관우, 장비와 함께 제갈량을 찾아가 제갈량에게 대업을 이루기 위한 계책을 묻자 제갈량은 당시의 정세를 상세히 분석하고 먼저 조조, 손권과 더불어 삼국을 정립하고 익주를 차지해 대외적으로는 손권과 동맹을 맺고 대내적으로 백성을 잘 다스리면 충분히 패업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제갈량의 계책을 들은 유비는 무릎을 치면서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는 것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유비와 제갈량간의 친분관계를 일컬어 군신수어지교(君臣水魚之交)라고 한다.

당시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조조와 약세인 촉나라, 오나라가 나뉘는 형국에서 유비로서는 위나라에 대응하면서 오나라의 위협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오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208년 유비는 오나라 손권(孫權)과 손잡고 남하해 오는 조조를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격파하고 천하삼분(天下三分)의 기초를 쌓았다. 적벽대전은 손권(孫權)과 유비(劉備)의 연합군이 조조(曹操)와 호북성 자위현 "嘉魚縣" 서쪽에 있는 적벽에서 싸웠던 싸움이다. 적벽대전에서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은 5만 명의 군사만으로 조조가 이끄는 수십만 대군에 저항하여 반격을 가했다. 연합군은 교묘한 화공법으로 조조 군사를 대파했다. 적벽대전은 위나라, 촉나라, 오나라의 삼국 정립 형성에 기초를 다졌던 전쟁이었다. 적벽대전에서 조조는 많은 병마를 잃어 더 이상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수 없어 새로운 삼국 판도가 형성되었다.

적벽대전후 유비는 자신보다 30살이나 어린 손권의 누이와 결혼한 것은 삼국을 정립시켜 자신의 근거지를 확보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그 후 유비는 익주(益州)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손권과 대립했다.

211년 다시 군사를 일으킨 조조는 유언의 아들 유장(劉璋)을 공격했다. 유장은 유비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것은 촉나라가 유장의 영토를 확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당시 유비는 수만 명 대군을 인솔했는데 표면상으로는 유장을 돕기 위한 것이었지만 사실상 치명적인 일격을 가해 유장의 영토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유비 군사의 압력을 받은 유장은 마침내 자기의 지위를 유비에게 양보하고 목숨을 유지했다.

유비는 촉나라에 들어가 성도(成都)를 공략하여 익주를 차지했다. 이에 손권은 조조와 손잡고 형주에 남아 있던 관우를 죽이고 형주를 점령했다.

219년 유비는 한중왕(漢中王)이 되었고 221년 후한(後漢)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성도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한(漢蜀漢)이라 하고 연호를 장무(章武)라고 했다. 그는 관우의 원수를 갚으려고 직접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와 전쟁을 벌였으나 그 전쟁에서 장비마저 부하들의 손에 죽음을 당하는 액운을 맞았다. 유비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백제성(白帝城)까지 후퇴했다가 그곳에서 중병에 걸려 생을 마감했다. 운명하기 전 유비는 제갈량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그대의 재능은 조조보다 월등하니 만일 내 아들이 천하를 통일할 만한 인물이라면 그를 보좌하되 그런 인물이 아니면 그대가 제위에 오르시오."

유비가 죽은 후 태자 유선이 제위에 올랐다.

유비의 능(陵)은 성도에 있는데 그 안에 있는 제갈량의 무후사(武侯祠)가 아주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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