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소개
게시판
조선어부 소개
 
cri korean.cri.cn/
삼국시대 촉나라 장군 관우
2010-07-12 16:59:39 cri

관우는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장군이다. 관우는 하동 해현 사람인데 이름은 우(羽)이고 자는 운장(雲長)이며 시호는 충의후이다.

관우의 모습을 전해 내려오는 책을 토대로 살펴보면 관우는 키가 구척장신에 수염의 길이가 두 자로서 삼각수(三角鬚)이며 입술은 연지를 칠한 듯하며 눈은 봉의 눈이며 누에눈썹이 짙고 위풍이 늠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수염이 길고 아름다워 미염공(美髥公)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청소년시절 관우는 폭군을 제거하고 백성을 보호하겠다는 뜻을 세우고 무예를 열심히 익혔다. 20살 나던 해 관우는 백성을 못살게 구는 해주성의 한 악패 관원을 죽인 후 관가의 추격을 피해 사처로 떠돌아다니던 중 유비와 장비를 만나 도원에서 의형제를 맺고 평생 의(義)를 지켰다. 황건 봉기가 일어나자 관우는 장비와 함께 유비를 보좌해 황건봉기 평정에 나섰다.

한헌제 건안 5년(200년) 조조가 군사를 일으켜 서주를 바라고 진격해 왔다. 당시 관우는 하비성을 책임지며 유비의 두 부인과 어린 아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전황이 불리해 유비는 원소에게 몸을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하비성이 조조 군사들에게 함락되고 유비 가족의 생사를 모르게 되자 관우는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하려고 하였다. 이 때 조조의 막하 장군으로 평소 관우를 존경해오던 장료의 "자결 삼불가설(三不可說)"을 듣고 관우는 자살을 포기하고 조조에게 항복을 하게 되었다.

장료가 말한 "자결 삼불가설"은 첫째, 한날한시에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죽을 때는 한날한시에 죽자는 도원결의(桃園結義)에 위배되는 것이며 둘째, 주군(主君)인 유비의 처자는 누가 돌볼 것이며 셋째, 한실(漢室)을 받든다는 대망을 버린다는 것이었다. 이에 관운장은 항복의 조건으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그 내용은 첫째, 한실에는 항복하나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은 아니다. 둘째, 유비의 두 부인인 감부인과 미부인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의 생명과 생활을 보장할 것, 셋째, 주군인 유비의 생사를 알 때는 천리만리라 해도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관우의 마음을 돌려 자기 휘하에 두려고 작심한 조조는 관우를 환대하면서 그를 한수정후(漢壽亭侯)로 봉했으나 유비에게 충성하는 관우의 마음을 돌려 세울 수 없었다.

여기에 이런 일화가 있다. 어느 하루 조조는 관우가 입고 있는 옷이 너무 남루한 것을 보고 새 금포(錦袍)를 내주며 입으라 하였다. 며칠이 지난 후 조조가 관우를 보니 아직도 남루한 옷을 입고 있어 그 영문을 물으니 관우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옷은 유황숙이 주신 은의(恩衣)입니다. 아무리 누더기가 되더라도 조석으로 이것을 입고 벗을 때마다 황숙과 친히 만나는 것 같아 즐거운 기쁨을 느낍니다. 공께서 주신 비단옷은 이 옷 속에 입었습니다."

조조가 이 말을 듣고 "관우야말로 의로운 사람이다. 이토록 충절한 장부도 있단 말인가" 하고 탄복했다. 관운장은 조조의 포로로 있는 동안 원소의 부하 안량과 문추를 베어 은혜에 보답한 다음 두 형수를 데리고 단신의 몸으로 다시 유비에게로 돌아갔다.

208년 적벽대전에서 관우는 화용도에서 조조를 생포할 수 있었음에도 조조에게 입은 후의를 생각하여 그를 놓아 줌으로써 그 은혜를 갚았다.

적벽대전후 관우는 장비, 조운과 함께 출정하여 무능(武陵), 장사(長沙), 계양(桂陽), 영능(零陵) 등 네 개 군을 공략하여 유비가 재기할 근거지를 마련했다.

한헌제 건안 17년(212년) 관우는 형주(荊州) 사무를 일괄 책임진 태수로 있다가 건안 24년(219년) 유비가 한중왕(漢中王)된 후 전장군(前將軍)으로 봉임받았다. 그 후 관우는 조조와 손권과의 싸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천하에 이름을 널리 떨쳤다.

219년 12월 관우는 오나라와의 싸움에서 대패해 퇴각하던 도중 매복에 걸려 오나라 장군 번장(藩璋)의 수하 군졸들에게 생포되는 비운을 맞는다. 번장은 관우와 관우의 양자인 관평(關平)을 여몽(呂蒙)한테 압송해 갔는데 여몽이 관우에게 항복할 것을 권했지만 관우는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여몽은 관우를 손권한테로 압송해 가려고 하려다가 도중에 변이 생길 가 염려되어 관우와 그의 양자를 살해했다.

천고의 명장으로 일편단심 충신으로 칭송받은 관우는 송(宋)나라 이후 관우를 모신 관왕묘(關王廟)가 도처에 세워졌다. 조대가 바뀔 때마다 관우는 더 큰 칭송을 받았다. 청나라에 와서는 관우는 그 어느 조대의 황제보다 더 추앙을 받는 관대제(關大帝)로 칭송받았다. 민간에서 관우는 전신(戰神), 재신(財神), 농신(農神) 복록장수신(福祿長壽神) 등 전방위적인 만능신(萬能神)으로 추앙받아 왔다. 하여 곳곳에 관우를 기리는 사당인 관제묘(關帝廟)와 관왕묘(關王廟)가 세워졌다. 관우는 조대를 내려오면서 이미 일종의 문화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관련기사
  리플달기
   Webradio
선택하세요
cri korean.cri.cn
  추천기사

[차이나는 중국] 바오쯔

꿈의 마을 조원

새해가 왔어요~

영상으로 보는 제2회 중한성장지사회의

제2회 중한성장지사회의 베이징에서 개최
중국각지우편번호중국각지전화코드편의전화번호호텔
China Radio International.CRI. All Rights Reserved.
16A Shijingshan Road, Beijing, Chi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