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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시기 정치가, 사상가, 문학가 왕안석
2011-01-10 10:40:45 cri

왕안석(王安石)은 자는 개보, 호는 반산이다. 그가 형국공이 되었기 때문에 형공이라고도 불린다. 왕안석은 강서성 임천 출신으로 북송시기 걸출한 정치가, 사상가, 문학가이다.

왕안석은 중하층 봉건관료가정에서 태어났는데 22살에 진시에 급제하고 지현, 참지정사 등 벼슬을 하였다. 그는 일생동안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투쟁하였으며 적극적으로 신법을 실시했다.

인종 말년에 중앙으로 돌아와 1059년에10여 년의 경험을 정리한 "만언서"를 황제에게 제출하여 정치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나 인종과 대신들의 주목을 끌지 못하였다. 68년 신종이 즉위하자 황제의 정치고문인 한림학사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참지정사가 되어 자신의 포부를 실행할 수 있게 되었다.

왕안석은 먼저 황제직속의 심의기관인 제치삼사조례사를 설치하여 새로운 정책을 입안하게 하고 그것을 차례로 공포하였다. 그의 새로운 정책을 통 털어 "왕안석의 신법"이라고 하는데 "균수법"을 비롯하여 "청묘법", "농전수리법", "시역법", "모역법", "보갑제", "보마법" 등이 있는데 이런 법들은 북송 중기 이래의 재정적자를 해소하고 국력을 증강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신법은 부국강병만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궁극적으로는 사대부의 기풍을 일신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도 목적이었다. 그 방책으로서 관리에게 법율을 배우게 하고 학교교육을 중시하여 "삼사법"을 만들어 졸업자를 관리로 임명시켰다.

왕안석도 "당송고문8대가"의 한사람이다. 그는 정론적인 산문을 많이 썼다, 그는 산문에서 당대의 폐정을 지적하고 심각한 분석에 근거한 자신의 명확한 정치주장을 제출하였으므로 설득력이 매우 강하다. "사마간의에게 답서"에서 왕안석은 신법을 반대하는 사마광 훼방에 대해 반박하였다.

왕안석의 시도 높이 평가되었는데 종산에서 살 때 자연을 읊은 작품이 특히 우수하다. "하북인"과 같은 시들에서 왕안석은 백성에 대하여 동정하면서 사회의 전도를 우려하였으며 자신의 원대한 정치적 포부와 낙관적이고 적극적인 생활태도를 보여주었다. 이외에도 그가 쓴 사 "계지향 금릉에서 옛날을 그리며"는 비교적 유명한 작품이다.

이밖에도 왕안석은 "주례"에 주석을 단 "주관신의"를 지어 학교의 교과서로 사용하고 신법의 지침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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