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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에 깃든 이야기] –"좋은 종자 가려내세"
2013-06-17 19:11:29 cri

[노래에 깃든 이야기] – 네번째 곡 "좋은 종자 가려내세" – 14'50"

노래 "좋은 종자 가려내세" 1절 깔며~

사회자: 중국 조선어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농사군은 굶어죽어도 종자는 베고 죽는다". 이 말인 즉 농민들이 종자 즉 씨앗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깊고 짙은가 하는 말이 되겠습니다. 농민들의 이러한 즐거운 심정을 고스란히 담아낸 노래인데요. 오늘 그 노래를 준비했습니다.

석화 선생님 안녕하세요.

석화: 네. 안녕하세요.

사회자: 어떤 노래지요?

석화: "좋은 종자 가려내세"입니다.

사회자: 참 좋은 노래입니다. 농사군에게는 종자만큼 중요한 것이 더 있겠습니까? 생명과 다름없지요.

석화: 그렇습니다. 참 명랑한 노래입니다.

[노래 끝까지(1'57")]

사회자: 이 노래의 창작배경에 대해 소개해 주시죠.

석화: 이 노래는 김태희 작사, 박우 작곡으로 된 노래입니다. 1949년 초, 해방은 되었고…1945년 연변은 이미 해방되었잖아요. 건국 바로 전입니다. 연변에는 모든 질서가 다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연변 가무단이 화룡에 가서 생활체험을 하면서 농민들의 정서를 반영한 노래를 짓게 되었습니다.

사회자: 노래 창작하러 내려갔네요.

석화: 네. 바로 김태희 선생과 박우 선생도 그 팀과 함께 내려갔지요. 어느날 김태희 선생이 잠자리에 일어나 보니 시골 농가다보니 바람벽에 종자들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는 것이 눈이 띄였습니다. 바로 방금 말씀드린것처럼 농사군은 종자를 생명처럼 간주하잖아요. 종자가 얼른 눈에 들어왔습니다. 종자를 가지고 노래 한곡을 지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회자: 그 분(창작영감)이 오셨네요.

석화: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창작영감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바로 쓴 가사를 작곡가 박우 선생한테 보여주었습니다. 박우 선생은 그때 기타도 잘 치고 … 멋있는 작곡가입니다. 후에는 저명한 지휘가로도 소문난 분인데요. 이 노래 가사에 곡을 붙여 마을 아주머니들한테 불러주고 배워줬습니다. 너무 좋은 노래라고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종자 가려내세"가 만들어 졌습니다.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1952년 해방후 처음으로 중앙문화부에서 전국문학예술계 연합회 명의로 제1차 전국대중가요평의활동을 펼쳤습니다. 이 "건국 3년래 전국 대중가요심사표창"활동에 연변에서 몇편의 작품을 추천했는데 바로 이 가요가 2등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중국 조선족이) 이 땅에서 살면서 처음으로 중앙상을 받은 노래로 되었습니다.

사회자: 그럼 이 가요가 바로 중국조선족음악사상 제일 처음으로 국가급상을 받아안은 작품이네요?

석화: 그렇습니다. 그때 함께 상을 받은 노래가 "베짜기 노래"입니다. 그 당시 중국 조선족이 이렇게 노래를 잘 부른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사회자: 참 자랑스럽습니다.

석화: 1955년에 이르러 예술출판사에서 출판한 "수상가요집"에도 실렸습니다. 이렇게 "베짜기 노래"와 함께 "좋은 종자 가려내세"는 중국 조선족이 이 땅에서 행복한 삶을 시작한다는… 아까 말씀드린것처럼 1945년에 광복되고 1949년 10월 1일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면서 이 땅에서 주인으로 살아간다는 그런 기쁨이 표현된 노래입니다.

사회자: 참 대단한 노래입니다. 그럼 이 노래 잠간 들어보고 이야기 계속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종자 가려내세" 이 노래 보내드립니다.

[노래 – 좋은 종자 가려내세 1'57"]

사회자: 네 노래 "좋은 종자 가려내세" 듣고 돌아왔습니다. 중국 조선족 음악사상 제일 처음으로 국가급 상을 받아온 수상작품인데요.

석화: 그렇습니다. "좋은 종자 가려내세"입니다.

사회자: 이 노래 가사를 김태희 선생님이 쓰셨지요?

석화: 그렇습니다. 김태희 선생님은 해방후 중국 조선족 예술 첫페이지를 엮은 분이라고 얘기할수 있습니다. 김태희 선생님은 1918년 제주도 제주읍에서 태어났습니다.

사회자: 한국에서 태어나셨네요.

석화: 그렇습니다. 1941년 일본 중앙대학 전문부 법학과를 졸업하고 1942년부터 흑룡강성 밀산현 은행직원, 목단강조선족중학교 교원, 목단강 신보사 직원, 할빈 민주일보사 직원, 동북인민정부 민족사무처문공단 대리단장, 연변가무단 단장, 연변연극단 단장, 연변예술학교 교장을 역임하셨습니다.

사회자: 와~ 대단하십니다.

석화: 그러니까 중국 조선족 예술의 첫 페이지를 열어준 분이라고 명실상부하지요. 그분은 창작자로서도 많은 작품을 썼습니다.

사회자: 어떤 작품들을 창작하셨습니까?

석화: 연극으로 "우리네 조장동무", 합창 "건설자의 노래", "벼바심", 가야금병창"풍년가", 여성중창"처녀들의 노래", "우리 수도 북경", "분배받은 햇쌀 이고 샘터로 가세", 독창 "어랑타령", "모아산고개", "목도공의 노래", "내 조국 어디나 아름답고 살기 좋네" 등 헤아릴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이렇게 물론 예술지도사업도 많이 하셨지만 이런 창작성과도 많이 이룩한 분이십니다. 이 노래 곡을 지은 박우 선생은 1926년 길림성 용정시에서 태어났습니다. 박우 선생은 음악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사회자: 부모님 모두 음악을 즐기셨나요?

석화: 그렇지요. 그때 당시 집에 축음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레코드판이지요. 음악적 분위기가 다분했지요. 형제들도 음악재능이 남달랐는데 둘째형은 당시 서울의 "ok"라는 성악콩클에서 1등상을 받은적도 있고 여동생은 그후 조선인민군협주단에서 이름난 가수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사회자: 가족 모두가 음악적 첨부를 타고 나셨네요.

석화: 그렇지요. 박우 선생은 이렇게 어린 시절 용정에서 보냈고 당시 용정에서는 저명한 작곡가 윤극영 선생한테서 음악을 배웠고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조선 청진에서 철도학교를 다니고 다시 용정에 돌아와 용정에서 생활하기도 했습니다. 1945년 광복을 맞은후 11월 용정연예대에 들어가서 활동하다가 1946년에 참군해 길동보안군 정치부 문공단에서 배우로 있었습니다. 1948년에는 연변문공단의 전신인 연변전원공서문공단에 들어갔습니다. 1952년에는 심양 로신문예학원에서 작곡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1954년에는 쏘련의 저명한 합창지휘가 두마쏘브에게서 합창지휘를 배웠습니다.

사회자: 합창 지휘까지 배우셨네요.

석화: 그렇지요. 박우 선생 하면 가장 특기할 것은 그분이 연변가무단에 와서 합창지휘를 하면서 연변의 가장 유명한 합창곡이지요. 정진옥 선생이 작곡한 대합창 "장백의 노래"를 베이징에서 성공적으로 지휘하였고 이 대합창이 후에 쏘련 모스크바 청년 연환절에서 또 상을 받게 됩니다. 여성 표현창 "처녀의 노래"와 함께 대합창 "장백의 노래"가 쏘련에서 청년 예술절 은질상을 받게 됩니다. 박우 선생은 1986년 12월 연변에 와서 정률성음악회에 참가해 대합창 "동해어부"등 주요작품들의 지휘를 맡았습니다. 이렇게 김태희, 박우 선생에 의해 건국초기 좋은 노래들이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사회자: 네. 농민들의 즐거운 심정을 고스란히 담아낸 노래인데요. "좋은 종자 가려내세" 다시 한번 보내드립니다. 함께 감상하시지요.

[노래 "좋은 종자 가려내세"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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