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0-09-02 18:35:33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0년 9월3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9월 첫째 주의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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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9월

갑:

9월 3일은 양력 1년의 246일 째 되는 날이며 1년이 끝나는 때까지 아직 119일 남아있습니다.

9월 3일 이날은 항일전쟁승리 기념일입니다. 8월 15일을 일본이 항복한 날이라고 하는 데요, 9월 3일을 항일전쟁의 승리의 날이라고 하는 데는 원인이 있습니다.

1945년 9월 2일, 일본과 작전했던 동맹국 대표가 일본 항복을 받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이 의식은 일본 도꾜만에 정박한 미군 군함 '미주리'호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일본대표가 무조건 항복서에 수표했고 중국과 미국, 영국, 소련 등 9개국 대표가 연이어 수표했습니다. 이로써 중국 항일전쟁이 승리적으로 결속되었고 세계반파시즘전쟁도 막을 내렸습니다.

1945년 9월 3일, 중국 국민정부는 령을 내리고 온 나라에서 경축했으며 기를 게양하고 하루를 휴가하게 했습니다. 이날은 전 세계 반파시즘전쟁에서 최종 승리를 거둔 날로, 중화민족의 근대사에 대서특필할 경사스런 날로 되었습니다. 1946년부터 9월 3일을 항전 승리의 기념일로 했습니다.

9월 3일 이날은 1952년 또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창립된 날로 되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설명을 드릴 부분이 있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1952년 9월 3일 창립되었는데, 그 전칭은 ‘연변조선민족자치구’였습니다. '연변조선민족자치구'는 1955년에 ‘연변조선족자치주’로 변경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중국 땅에 살고 있는 조선민족은 ‘조선민족’의 ‘민’자 생략된 ‘조선족’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9.3' 항일전쟁승리 기념일에 즈음하여 “심양의 옛 호수에 일어난 폭파사건” 이런 제목으로 중국에서 항일전쟁이 발발한 그날의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심양의 옛 호수에 일어난 폭파사건”

청나라 초기 이 지역에는 인가가 없었고 호수에는 이름마저 없었다고 한다. 호수에는 철이 되면 연꽃이 무더기로 피어나고 향기가 바람을 따라 멀리 날렸다. 구경꾼들은 나중에 버드나무의 가지처럼 가늘고 길게 생긴 이 호수를 그 모양대로 이름을 지어 “유조호(柳條湖)”라고 불렀다고 한다.

훗날 “화박관련(花泊觀蓮)” 즉 유조호의 연꽃은 지금의 심양인 성경(盛京) 팔경(八景)의 하나로 된다.

1877년, 청나라는 심양에서 수리작업을 시행했다. 심양 시내 북부에 도랑을 파고 강물을 끌어들여 농경지를 개간했다. 물이 흐르는 도랑이 생기자 물이 고인 호수가 소실되었다. 그러나 유조호라는 이름은 그냥 현지에 지명으로 남는다.

유조호라는 이 이름이 사람들의 시야에 다시 떠오르는 것은 그로부터 장장 반세기라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였다. 이때 옛 호수에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미스터리”의 폭파사건이 생겼던 것이다.

일본은 갑오(甲午)전쟁 후부터 동북을 점령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갑오전쟁은 19세기 말 일본이 중국과 조선을 침략한 전쟁으로, 전쟁이 일어난 1894년이 음력으로 갑오의 해이기 때문에 불리는 이름이다.

훗날 러시아가 북쪽으로 중국에 침입하여 동북을 그들의 세력범위로 만들자 일본은 러시아와 대전을 벌리며 러시아의 수중에서 동북의 많은 땅을 빼앗는다. 그러나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야심은 단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일찍 1930년 봄, 만주에 주둔한 일본 관동군은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년 후 일본 관동군 고급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 1885~1948) 등은 '유조호사건'을 조작할 구체적 계획을 제정한다. 유조호가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서 행동을 전개하기에 쉽고 또 동북군(东北军)의 주둔지 북대영(北大营)과 근접하기 때문에 쉽사리 동북군과 연관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와 함께 일본군의 진공에도 편리했다.

동북군은 그 전신이 봉계(奉系) 군벌 장작림이 통솔한 군대로 봉군(奉军)으로 불렸다. 봉계군벌은 북양군벌의 주요한 파벌로, 그 수령 장작림이 봉천(奉天, 심양의 옛 이름)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봉계라고 부른다. 봉군은 1928년 말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张学良)이 기치를 바꾼 후 중앙정부에 의해 국민혁명 동북변방군으로 개편, 약칭 '동북군'으로 불렸으며 병력 30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동북군은 민국(民国, 1912~1949) 시기 중국에서 유일하게 해, 육, 공 편제를 갖춘 군대였다.

일본이 동북을 점령하는데서 동북군은 미상불 언제와 같은 큰 장애물이었다.

드디어 폭파사건은 달이 밝은 1931년 9월 18일 밤에 일어났다. 그때 가을바람에 실린 것은 유조호의 연꽃 향기가 아니라 밭의 수수가 잎사귀를 사락사락 흔드는 소리였다.

이날 밤, 일본 관동군 철도수비대의 행동소조가 야음을 타서 유조호 부근의 철길에 접근했다. 당시 이 철길은 '남만철도'로 불렸으며 일본인이 부설한 것이었다.

드디어 22시 20분 경, 북대영 부근의 철길에서 큰 폭파소리가 일어났다.

이곳은 봉천 도심의 북쪽으로 7.5㎞ 상거, 동북군이 숙영한 북대영과는 불과 8백m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관동군 행동소조는 즉각 북대영 방향으로 사격을 개시했다. 이와 함께 그들은 아닌 보살을 하고 상부에 "북대영의 중국군이 철도를 폭파, 훼손하였으며 현재 그들과 격전을 벌리고 있다"고 보고한다. 일본 관동군 사령부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각 부대에 즉각 명령을 하달하고 북대영과 봉천성을 진공한다.

기실 레일은 불과 1.5m 가량 휘였을 뿐이며 렬차가 여전히 운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실착'은 관동군이 폭파사건을 빌어 전쟁을 일으키는데 지장이 없었다.

이때 북대영에 있던 동북군 제7여단은 상부의 '저항 불허(不准抵抗)' 명령 때문에 부득불 철퇴해야 했다. 이 '저항 불허'의 명령을 두고 여러 가지 설이 대두하지만 동북군의 방침이 충돌을 피하는 것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관동군과의 접전은 작은 충돌일 뿐이며, 충돌을 하게 되면 자칫 전쟁으로 번질 수 있다는 오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북대영의 7천명 수비군은 약 3백명의 일본군에 패배하며 봉천성도 단 하루 밤 사이에 일본군에 점령된다.

당시 동북군은 총 한방 쏘지 않고 물러선 게 아니었다. 일부 장병들은 항명하면 군법에 의해 처결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항일의 첫 총소리를 울렸다

1931년 일본이 '9.18'사변을 위해 제작한 우편엽서에는 북대영에 세운 목제 위령비가 나타난다. 이에 따르면 육군 보병 오장 니이쿠 나무츠미이 9월 18일 저녁 북대영에서 전사했다. 또 최근에는 이날 저녁의 일본군 전몰자들을 위한 추모식 사진이 발견되는 등 9월 18일 일본군의 사상자가 상당수 출현된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일본의 우편엽서에 등장한 니이쿠 나무츠미는 북대영 전투의 첫 희생자였지만 마지막 희생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의 전면 공세 앞에서 너무 무기력했다. 일본군은 불과 반년도 안되는 사이 동북 100만㎢의 땅을 점령했다.

일본의 동북 3성에 대한 대규모적인 침략은 중국사회를 흔들었다. 심양의 옛 호수에 울린 폭파소리는 종국적으로 중국인민 항일전쟁의 시작점으로 되였으며 세계 반파시즘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1931년 12월말, 동북군이 요서(辽西)지역을 포기하고 관내로 철수한 후 동북 항일역사의 무거운 짐은 전부 동북의용군의 어깨에 떨어졌다. 동북의용군은 동북이 일본군에 점령된 초기 동북군의 옛 부대와 애국민중이 자발적으로 구성한 항일무장력량이다.

동북 의용군은 국민당정부의 무저항과 무원조의 어려운 환경 그리고 군사훈련과 무기장비의 열세에도 불구, 우후죽순처럼 발전하여 여러 지역에서 일본군에 침중한 타격을 안겼다. 의용군은 흥성 시기에 무려 30만 명에 달했으며 그 영향권은 거의 동북 전 지역을 망라했다.

그들은 동북에 설립된 일본 괴뢰정부인 '만주국(满洲国)'을 기치가 선명하게 반대하고 동북을 강점한 일본군에 무력으로 저항했다.

동북 의용군은 9.18사변의 현장인 요녕성에서 제일 먼저 흥기했다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주장이다.

 

  실제로 '9.18' 사변에 앞서 항일무장부대는 이미 요녕성 지역에 나타나고 있었다. 1929년 조직된 조선혁명군은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남만주 일대에서 항일독립활동을 벌인 군대이다. 조선혁명군은 이어 1930년대 동북지역의 각종 반만항일의 세력과 련합하여 활발한 반일항쟁을 전개하였다. '9.18'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동북 항일의용군 14명 장령의 사진에서 첫 사람은 바로 조선혁명군 사령관 량세봉(梁世奉, 1896~1934)이다. 조선혁명군은 민족과 국경을 초월하여 중국의 항일무장투쟁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것이다.

"일어나라! 노예로 되길 원치 않는 사람들이여!

우리의 혈육으로 새로운 만리장성을 쌓자!

중화민족이 제일 위급한 시각에 이르렀을 때

억압을 받는 사람마다 마지막 함성을 외친다…"

동북의용군의 이 함성은 중국인민의 민족적 기개와 애국정신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었다. 의용군의 노래 '반만항일 의용군행진곡'은 나중에 '의용군행진곡'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국가로 지정된다.

동북의 여러 항일무장은 수십만에 달하는 일본군과 괴뢰군 정규군을 견제했고 전국의 항일전쟁을 힘 있게 지원했다.

그러나 의용군은 대오의 성분이 복잡하고 또 제각기 싸우는 상태였으며 유효한 협동작전을 벌일 수 없었다. 또 통일적인 지도와 지휘가 없었으며 전투 소모도 제때에 유효한 보충을 받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37년 노구교(卢沟桥)사변이 일어난 후 일본군과 괴뢰군의 대거 진공으로 각개 격파되고 련이어 와해되어 대부분 실패로 종지부를 찍는다.

동북의 의용군이 저조기에 처할 무렵인 1936년 2월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동북항일연군이 설립된다. 동북항일연군은 동북항일의용군의 잔존한 부대와 동북반일유격대, 동북인민혁명군 등 항일무장으로 구성되며 동북의 항일전쟁 역사에서 새로운 고조를 형성한다.

심양 '9.18' 역사박물관 입구에 거대한 일력 형상물이 있다. 일력에는 1931년 9월 18일 밤 10시경이라는 시간이 그 자리에 멈춰서있다. 탄흔처럼 형상물에 파여지고 숭숭 뚫린 구멍은 그렇게 중국 14년 항전의 시작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네, “심양의 옛 호수에 일어난 폭파사건” 이런 제목으로 중국에서 항일전쟁이 발발한 그날의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청취자의 벗 편지 사연/고정간주]

갑: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소개해드리는 ‘편지가 왔어요’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는 먼저 길림성 연길시 노인뢰봉반의 소식을 전해온 박철원 청취자의 편지 사연을 만나 보겠습니다. 이 편지에 따르면 중국 항전승리 75주년과 연변조선족자치주 설립 69주년을 기념하여 연길노인뢰봉반에서 행사를 조직했다고 합니다.

“올해의 9월 3일은 중국 항전승리 75주년 기념일이며 연변조선족자치주 설립 69주년 기념일이다. 이날을 기리기 위해 8월 26일 연길노인뢰봉반에서는 홍색관광을 조직하였다.

길림성 연길시 소영진 오봉촌(小营镇五凤村)이 첫 코스였다. 소문 높은 빈곤촌이여서 텅 비다시피 되였던 오봉촌이 정부의 부민정책에 힘입어 지금은 남부럽지 않은 새농촌마을로 되였다. 옛날 금광을 끼고있어 일본 침략자들의 약탈기지이던 이곳에는 지금도 1930년대의 일본군 포태4개, 물감옥이 달린 병원 등이 있으며 금광석을 밀어내던 광산골마들도 남아있다. “금광마을 노동촌 참안”이며 항일지사들의 피어린 현장이 있어 애국주의 교양기지로 선정된 이 마을에서는 홍색관광과 민속체험을 결합시켜 촌민들을 부유에로 이끌어가고 있다.

삼도만진 동구촌(三道湾镇东沟村)에는 상해지식청년집체호 건물이 잘 보존되고 있어 그 년대 그 시절의 기물들과 이야기들이 잘 전수되고 있다. 노인들은 집체호의 구들에 앉아도 보고 당시 상해지식청년들이 쓰던 물건도 다루어보면서 자기들의 젊은 시절 추억을 다시 더듬기도 했다.

항일연군 문화관전시관에서 노인뢰봉들은 삼도만 항일유격근거지 군민들의 영웅사적과 해방 후 토비숙청에서 쌓은 업적들을 기리며 생동한 애국주의 교양을 받았다.

이날 노인들은 오봉촌 오도촌과 팔도촌을 참관하면서 천지개벽의 변화를 목격하고 민족정책 부민정책의 성과를 또 한 번 체험하였다. 예전에 팔도촌에서 살았던 박계옥 박인순로인은 그 옛날 장화 없이는 못 산다던 곳이 지금은 옛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전혀 다른 곳이 되였다며 감탄을 금지 못했다.“

네, 소식에서 나오는 뢰봉은 생전에 중국인민해방군 심양부대의 운수중대 분대장이었는데요, 1962년 공무를 수행하다가 22살의 나이로 순직했습니다.

뢰봉은 짧은 22년의 생애에서 하늘과 땅을 울리는 그런 장거는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는 나라와 인민에게 이로운 작은 일들을 수없이 하면서 실제행동으로 무한한 인민봉사에 유한한 생명을 다했습니다. 평범한 가운데 위대함을 썼습니다.

뢰봉은 그의 사적으로 여러 세대의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며 영원한 도덕 모범으로 되었습니다. “뢰봉을 따라 배우고 좋은 일을 하자”는 것은 여러 세대 중국인이 기억하고 있는 격언으로 되었습니다.

그동안 뢰봉반, 뢰봉소조 등 단체 그리고 '살아있는 뢰봉'으로 불리는 개인들이 중국에 우후죽순처럼 등장했습니다. 박철원 청취자가 언급한 '노인뢰봉반‘은 바로 이런 의미의 단체입니다.

 

네, 박철원 청취자가 전한 연길노인뢰봉반의 행사 소식이었습니다.

이번에는 길림성 장춘시의 김수금 청취자가 보내온 편지 사연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 프로에서 청취자들을 위하여 우리들의 편지를 편집하고 방송하느라고 수고가 많습니다.

귀 방송국에서는 7월 29일 월요일부터 방송프로가 새롭게 편성되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아침 5시부터 7시까지 아침방송을 청취합니다.

새로 안내된 프로 ‘라디오가 좋아요’, 이선옥 선생님이 편집하고 이준, 임봉해 선생님이 방송하고 내용은 중국의 명산-설산, 히말리아산, 태산 등을 소개하는 것이었는데요. 잘 청취했습니다.

또 새로 안내된 프로는 ‘중국은 지금’이 목요일과 금요일 아침시간에 방송되었습니다. 박은옥 선생님이 방송하시는데, ‘역사인물’ 내용으로 엮었습니다. 여기에서 중국 역사상 이름난 의사 화타를 소개했습니다.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오피니언에서 한창송 선생님은 또 낭비를 제지하고 근검절약을 할 중요성을 피력하고 ‘빈 그릇 캠페인’을 제창했는데 감명이 깊었습니다.

선인들의 지혜가 느껴졌고 눈앞에 그들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예전에 일요일과 월요일에 방송되던 ‘주간화제’는 오피니언으로 한창송 선생님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또 고사성어는 예전에는 한 주일에 한번 방송했는데 지금은 매일 고사성어 하나를 방송합니다. 고사성어는 중국의 역사와 문화, 사회, 생활의 지혜가 녹아있습니다. 고사성어를 알면 중국의 어제와 오늘이 보인다는 반복적인 방송에서 고사성어의 의와 중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매일 하나의 고사성어를 알게 되면서 성취감을 느끼는 기쁨에서 재미있게 청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청취자의 벗’ 시간에는 연변 조선족의 이민사와 지명에 담긴 역사를 방송하고 있는데요, 역사지식을 늘려가게 되니 기쁘고, 또 조선족으로서 이민사를 알게 되니 매우 기쁩니다. 저는 네살 때 어머니의 품에 안겨 간도 땅에 왔습니다.

‘편지 왔어요’ 시간은 우리 청취자들이 제일 듣고 싶고 손꼽아 기다리는 프로그램입니다. 이전에는 청취자들의 편지를 전부 읽어 방송하였는데 (적지 않은 편지는) 지금은 편집해서 주요 내용만 방송하는 것 같습니다.

퀴즈문제 답안을 보낸 분들에게 이름은 다 방송으로 밝히는데, 정답을 함께 알려주지 않아서 조금 궁금합니다. 정답을 함께 알려주고, (우리가 보낸 답안이 이 정답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새로 편성된 프로그램에는 예전의 ‘경제 전망대’가 없어졌습니다. 저는 이전에는 이 프로를 매우 즐겨 청취했습니다. ‘경제퀴즈’ 문제를 풀면서 흥미가 짙었습니다. 경제퀴즈 문제는 매달 하나였는데, 속담풀이였습니다. 조선말 속담은 짧은 문구이지만 의미가 깊고 감동과 교훈, 충고가 스며있습니다. 은유적으로 표현한 금 같은 말입니다. 산재지구에서 살고 있는 저는 조선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이지만, 한 달에 조선말 속담 한 개씩 알게 되면서 많은 계발을 받게 되어 성취감을 느끼고 기쁨을 느꼈습니다. 또 경제퀴즈 왕으로도 선정되어 프로그램에 더 흥미를 느꼈습니다. 이런 프로가 없어져 매우 유감스럽고 아쉽습니다만, 이는 저 개인의 흥미일수 있습니다.

방송하는 여러 분 부디 건강하세요.”

이상 새로 편성된 방송을 들은 소감을 적었습니다.“

 

네, 장춘 애독애청자클럽 제일자동차그룹분회의 김수금 청취자가 보내온 편지사연이었습니다.

우리 방송을 열심히 청취하고, 소감을 일일이 적어 보낸 김수금 청취자에게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김수금 청취자는 이번에 8월의 퀴즈답안을 보내오셨는데요, 우선 정답임을 알려드립니다. 이 정답을 김수금 청취자와 함께 보내온 청취자의 이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라명희, 주송숙, 주혜숙, 박숙녀, 량두봉, 오애화, 김희숙, 한단희, 정기순, 이명희, 윤명성, 정성갑, 박룡익, 박영희, 방태식, 박옥순, 김수금 등 17명이 정답을 보내왔습니다.

김수금 청취자는 지난 달 방송에서 퀴즈 정답을 말씀드리지 않아서 못내 유감스럽다고 하셨는데요, 7월부터 새로 [청취자의 벗]을 인계 받은 편성자의 차실이었습니다.

김수금 청취자의 지적에 감사하구요, 앞으로도 조언과 지적 부탁 드립니다.

[청취자의 벗]은 현재 내외로부터 청취자들의 편지를 받고 있으며, 편지와 더불어 많은 문의를 받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를 빌어서 일부 문의에 약간의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지난 7월부터 방송을 개편하면서 일부 프로그램이 취소되었거나 일부 수정이 있게 되었습니다.

[청취자의 벗] 프로그램도 약간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중국국제방송국은 이름처럼 주로 조선과 한국을 상대로 하는 대외방송입니다.

중국 현지의 소식과 청취자의 사연을 전하는 차원에서 중국 현지 청취자들의 편지들도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편지도 거의 전부를 방송 사이트에 실으며 적지 않은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과 경우에 따라 방송에는 다소 줄여서 쓰게 됩니다. 일례로 특정된 시기의 내용을 반영한 동일 주제의 편지는 줄여서 사용하게 됩니다.

청취자님의 소감이나 수필 형식이 아니고 기자신분의 보도원고일 경우 더구나 그러합니다.

이런 점을 이해하시고 많은 양해를 바랍니다.

앞으로도 조선과 한국 청취자들도 모두 관심하는 중국 현지의 소식과 감상문, 수필 그리고 방송 내용에 대한 감수 등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계속 부탁드리겠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갑: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립니다.

지난 8월에는 중국 연변의 국경도시 도문의 옛날 이름을 퀴즈로 내어드렸는데요, 정답인 ‘회막골’입니다. 옛날 누군가 마을 북쪽 골짜기의 막바지에 가마를 앉히고 석회를 구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골짜기에는 늘 회색의 장막이 안개처럼 드리웠다고 하네요. 일명 회막동이라고 하는 회막골은 그래서 생긴 이름이라고 합니다.

네, 답안을 보내온 청취자 여러 분은 모두 정답 ‘회막골’을 맞추셨습니다. 오동연 청취자는 현 도문시의 연혁까지 자세히 적어주셨고, 정수이 청취자는 도문의 이름을 만든 두만강의 오랜 유래도 적어주셨습니다. 보도 원고를 쓰시는 박철원 청취자는 도문에 중조 친선의 이야기도 있다고 좋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구원모 청취자는 고향인 대구에도 연변의 지명과 같은 지명이 있다고 놀라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우리 방송을 열심히 청취하고 이런 좋은 소식들을 보낸 청취자분들에게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네, 9월 이달에도 지명과 관련한 퀴즈를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연변의 지명 ‘조양천’에 냇물 천(川)자가 들어있는데요,

  여기서 ‘조양천’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지명일까요?

  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지명 ‘조양천’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요?

 

  지난 8월 방송된 [청취자의 벗]에 이 퀴즈의 답안이 들어 있습니다.

  네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갑: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갑: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프로편성에 진행에 박은옥(갑),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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