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1-01-30 20:09:51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1년 1월 28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1월의 네 번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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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월

MC:

2. 지명과 연변

이 시간에는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이런 제목으로 지명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 연길시 서북쪽의 마을 석인구의 지명 이야기입니다.

돌사람이 나타난 석인구

“이것 보지, 오늘은 장을 여는 날이구나…”

엄마가 이렇게 중얼거릴 때면 이상근은 부득불 책가방을 구들에 내려놓아야 했다. 장마당에 다녀오려면 고개를 넘어 왕복 40리, 어림잡아도 반날은 족히 걸렸으니 학교로 가기는 열 번도 틀렸기 때문이다.

그때 재래 장을 열었던 팔도八道는 마을에서 제일 가까운 도회지였다. 팔도는 연길 서북쪽의 자그마한 향 소재지이다.

“먹고 입고 쓰는 게 다 있었지요. 연길 장마당보다 더 번화했습니다.”

혹간 간장이나 소금 한 되를 사기 위해 고개를 넘는 동네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정말이지 그 무슨 백 년 전의 야화를 듣는 것 같다.

연집하煙集河의 상류에 위치한 석인石人 동네는 그토록 한심한 산골이었다. 광서(光緖, 1875~1908) 말년 형성된 이 마을은 시초에는 제8소(所,경찰소)로 불렸다. 부근에서 석관을 발굴 할 때 돌사람이 나왔다고 석인동네로 개명했던 것이다.

이상근의 가족은 조부 때 함경도 길주에서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간도에 가면 도목倒木을 때고 이밥을 배 터지게 먹을 수 있다는 풍문에 귀가 솔깃했던 것. 그때는 그게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오매에도 그리던 신선 같은 생활이었다. 조부는 다짜고짜 봇짐을 싸들었으며 젖먹이를 광주리에 넣어 어깨에 둘러멨다.

환상의 타향으로 향한 천리 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털털이의 신세에 뭐가 있었겠어요? 그냥 빌어먹으면서 여기까지 걸어 나왔다고 합니다.”

조부 일행의 처량한 몰골이 눈에 지근지근 밟혀 올 때면 이상근은 비 오는 날처럼 어쩐지 마음이 울적한다. 고조高祖가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라는데 언제부터 그처럼 궁색한 처지에 빠졌는지 모른다.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옛날 오천호五千戶의 부호富豪였다고 합니다.” 이상근의 가족에 구전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에 따르면 이안사가 왕조의 터전을 잡았다는 “용비어천가”의 서술은 빈말이 아닌 듯하다. 가계家系의 족보에 따르면 이상근은 이안사의 26대손이다. 이 가계의 맨 위쪽에는 신라 때 사공司功 벼슬을 지낸 이한李翰이 있다. 이조李朝 7백년 역사를 열어놓은 이성계李成桂는 이한의 21대손이며 또 이안사의 고손자가 된다.

그런데 명문벌족의 이 가문은 결국 걸인 행색으로 이역 땅을 밟게 되었던 것. 이상근만 아닌 그의 온 가족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다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부가 이삿짐을 풀었던 1911년 석인구에는 벌써 인가가 적지 않았다. 20여리의 긴 골짜기에는 용산동龍山洞, 용흥동龍興洞, 신창동新倉洞 등 여러 동네가 들어서 있었다.

용산동은 마을 서쪽에 용 모양의 산이 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었으며 용흥동은 이 용산 기슭에 있는 이 마을이 장차 흥성하길 기원해서 지은 이름이었다. 신창동은 광서 초년에 형성, 석인구에서 제일 일찍 생긴 마을이었다고 한다. 땅이 기름져서 소출이 높았고 이에 따라 훗날 곡물생산구로 개간하면서 새로운 창고라는 의미의 신창이라고 이름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신창동은 곡물의 창고만 아니었다. 1930년대에는 또 항일 빨치산의 아지트로 되었다. 그때 빨치산은 이곳에서 약 1년 정도 밖에 활동하지 않았지만 현지에 신창 8구 소비에트정부 창설 장소, 삼산촌三山村 항일군민의 주택구, 일본기병대 매복습격 전적지 등 유적들을 남겼다.

이 무렵 삼산촌의 서북 골짜기에서는 또 일본군 토벌대가 항일군민 150여명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때 골이 너무 깊어서 일본군도 들어가지 못했던 동네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상근이 어릴 때 동네 노인들에게 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산골짜기에 깊숙이 숨어있던 이 복흥동福興洞 마을은 이름처럼 정말 행복이 넘쳤던 것 같다. 이 동네는 8.15 광복 후 소실되었으며 현재로선 석인구의 토박이가 아니면 그 이름도 알지 못한다.

기실 석인구라는 이 골짜기의 이름은 이런 마을들이 형성된 한참 후에 등장한다. 1930년대 용흥동의 서북쪽 골짜기에서 3기의 옛 무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서 2기의 무덤이 발굴되었는데 일명 석관이라고 하는 돌함石函이 나왔다는 것이다. 옛 무덤 앞에는 또 파수꾼 모양으로 돌사람이 둘 있었다. 그때 이 돌사람은 일본인에 의해 연길공원으로 운송되었으며 그 후 감쪽같이 유실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근이 전하는 이야기는 문물지文物志의 기록과 전혀 달랐다. “석관에 돌로 만든 사람 둘이 들어있었다고 하던데요…”

옛날 돌함은 통상 사리 등속을 넣었으며 골회를 안치했다. 아직까지 돌사람이 돌함에서 발견된 사례는 없다. 석인구의 돌사람은 석관과 함께 구전되면서 언제인가부터 더는 무덤 앞이 아닌 석관에 들어 있었던 것으로 와전된 것 같다.

아무튼 이 돌사람 때문에 석인구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 정작 돌사람의 이름을 딴 동네는 무덤 부근에 있는 용흥동이 아니다. 돌사람은 미리감치 작정이라도 한 듯 곧장 물길을 따라 골짜기 입구의 첫 마을에 내려가서 정착했던 것이다. 그 무슨 경찰부대처럼 제8소라고 불리던 이 마을은 이때부터 경찰제복을 벗어던지고 석인동네라고 개명을 했다.

석인구라는 지명의 시원을 열어놓은 고장 용흥동은 훗날 도리어 그 이름을 훔친 석인촌에 잠식, 옛 이름은 차츰 잊히고 석인촌 6대隊 마을로 불린다.

그럴지라도 마을 토박이인 이상근에게 용흥동은 아직도 6대가 아닌 옛날 이름이 더 친숙한 듯 했다.

“용흥동의 앞산을 용흥고개라고 불렀지요. 용흥고개를 넘어가면 팔도가 나섭니다.”

이상근은 1980년부터 석인촌의 촌장으로 있었다. 용흥동 등 옛 동네는 이때 석인촌에 귀속, 촌민소조의 이름으로 옛 이름을 대신하고 있었다.

석인동네의 본 부락은 8대隊로 불렸다고 한다. 이 동네는 골 입구에 있다 보니 저수지를 만들면서 1987년에 제일 먼저 철거된다. 동네 사람들은 각 지역으로 분산, 석인동네는 결국 닻을 잃은 배처럼 연집하에 실려 어디론가 흘러간 셈이다.

이 무렵 이상근이 마을에서 촌 기업으로 시작했던 회사는 나중에 석인구를 떠나 연변 나아가 길림성의 굴지의 농산물가공회사로 발돋움한다. 이씨 가문은 이민 3세대에 이르러 마침내 열망의 정점에 서게 된 것이다.

이상근은 그렇다고 마냥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 즐겁지는 않다고 한다. 그가 나서 자란 고향의 애틋한 추억이 인제 조약돌처럼 물밑에 갈아 앉고 있기 때문이다.

석인구에서 본 부락을 철거할 때부터 원주민들은 마치 땜에 고인 물이 빠지듯 대거 유출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현재 석인촌 1대부터 7대까지 100여 가구 되지만 원주민은 불과 서너 가구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이상근이 촌장으로 있을 때 인구의 80%가 원주민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일행 중 누군가 동네어구에서 만난 웬 사내에게 농담조로 말을 건넸다. “이보시오, 당신들이 여기 원주민들을 쫓아낸 게 아니오?”

그러자 대뜸 날아오는 대답이 어딘가 데퉁스럽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저들끼리 돈 벌러 간 거구 우리와는 상관이 없어.”

1960년 석인구에 저수지를 만들면서 타지의 이민이 진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외아들이 나중에 골을 메운다.”는 속설의 참뜻을 새삼스럽게 상기시키는 대목이었다. 어쨌거나 저수지에 그득하니 차오르는 물과 더불어 석인구에 남은 부락들도 미구에 수몰되게 된다.

그러나 해와 달이 바뀌어도 예나 제나 변함없는 게 있다. 석인구 어구의 동북쪽 산꼭대기에 홀로 서있는 바위이다. 장대기처럼 우뚝 솟은 이 바위 때문에 현지인들은 산 이름을 “뾰족산”이라고 부른다.

여름철의 이른 새벽이면 바위 위에는 늘 흰 구름이 감도는데 마치 밥 짓는 연기가 자옥하게 피어오르는 듯하다. 그래서 산은 또 연통 바위라는 의미의 연통라자煙筒砬子라고 불린다. 라자는 만족 말로 바위벼랑이라는 뜻. 일설에는 이 바위 때문에 연기가 모인다는 의미의 “연집煙集”이라는 이름이 생겨났으며 그게 산기슭을 흐르는 강 그리고 주변 마을들을 아우른 향의 이름으로 고착되었고 또 연길延吉이라는 이름의 시원으로 되었다고 한다.

뾰족산은 말 그대로 자연이 석인구 입구에 만든 도로 팻말이었다. 또 석인구의 생성과 연혁, 점멸漸滅을 쭉 지켜보고 있던 무언의 증인이었다. 차창 뒤로 점점 멀어지는 산은 어쩌면 하늘을 찌르고 서서 뭔가의 외침을 연기처럼 뭉게뭉게 뿜어내고 있는 듯 했다.

네,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 연길의 서북쪽 마을인 석인구의 지명 이야기었습니다.

광서 연간, 마을이 생기던 그 오래 전에 벌써 돌사람을 만든 또 다른 원주민이 이곳에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마을의 주인은 우리가 시작이 아니고 또 마지막이 아닙니다.

[청취자 내신 코너]

한국 경기도 수원 권대근 청취자가 25일 수신보고서와 함께 인사 글을 보내왔습니다.

그럼 편지 내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2021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중국국제방송의 수신 상태가 너무나 좋아서 편안하게 청취가 가능함을 알려드립니다. 박은옥 선생님께서 진행하시는 [청취자의 벗] 프로그램에서는 연변 지역의 지명에 대한 유래를 알려주셔서 재미있게 듣고 있고, 임봉해 아나운서님께서 진행하시는 [라디오가 좋아] 프로그램도 즐겨 듣고 있습니다.

오래간만에 수신보고서와 함께 연락을 드립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상황으로 많은 어려움에 봉착한 지난 1년이었습니다. 중국국제방송의 모든 선생님들께서는 건강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저도 여전히 무사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제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되었으니, 조만간 감염병도 우리의 곁을 떠나고 다시 일상을 찾을 때가 오겠지요. [함께 듣는 멜로디] 프로그램에서 들려주시는 다양한 음악을 들으면서 희망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한국과 중국 간의 인적교류가 많이 줄어든 요즘이지만 연결고리인 중국국제방송 덕분에 중국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갈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단 없이 계속 방송업무에 매진하신 여러 스텝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홈페이지에 등재되어 있는 편성표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지지 않아 불편합니다. 빠른 시일 내에 프로그램 편성표와 방송 주파수 등에 대한 변경 내용을 업데이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한국 권대근"

네, 권대근 청취자는 우리 방송의 오랜 청취자인데요, 코로나 사태가 일어난 이 비상시기에 소식을 편지로 접해서 반갑고 고맙습니다.

권대근 청취자가 올 새해도 부디 만사 순조롭고, 항상 건강하길 바랍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네, 이달에도 지명과 관련한 퀴즈를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인 연길시의 북쪽 청차관(淸茶館)은 광서(光緖, 1875~1908) 초년에 형성되었다고 하는데요, 산동(山東)에서 이주한 중국인들이 최초로 부락을 이뤘던 오랜 마을입니다. 이름을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맑은 찻물을 상기하게 되는데요, 과연 지명 청차관의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연길 북쪽의 지명 청차관은 그 뜻이 무엇이었을까요. ?

길림성 장춘시에서 살고 있는 정수이 청취자가 24일에 답안을 보내오셨는데요, 편지에 청차관 이야기를 이렇게 적어주셨습니다.

"글자 그대로 청차관의 뜻은 맑은차 (연한 차,싱거운 차)만 마시는 차집입니다, 맛이 진한 커피나 진한 차보다 담백 하고  연하고 싱거운 맑은차를 마시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 마을 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청차관의 마을은 작은 산과 작은 언덕과 푸른 초장으로 된 마을 입니다, 하루의 고된 농사일을 마친 동네 사람들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마당이나 가정에서나 차 상을 놓고 삼삼 오오로 모여 차 맛을 즐기면서 각 가지 한담을 웃으면서 나눈다고 합니다 전통 적인 고향 이야기와 더불어 농사이야기, 천문지리 날씨에 대한 문화 이야기, 인생사 회로애락 이야기를 나누며 차를 마셨 습니다.

차를 마시는 사람들의 공동적인 식사 문화의 특징은 여기사람들이 먹는 음식도 역시 담백하고 싱겁고 연하게 먹을뿐더러 차 역시 진한 차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맑은차, 즉 청차 싱 겁고 연한 차를 마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인생사도 청차관처럼 한 마을이 오손도손 하나가 되여 살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삶이 진하고 화려한 인생살이가 아니여도 자기의 농토를 지키면서 어긋나지 않게 있는 그대로 정결하게 살아가는 인생살이 이야기 입니다, 그들이 가진 것은 적어도 온 동네가 서로 나누 며 서로 감사하며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생활 이야기, 이것이 바로 청차관의 맑고 연한 차 맛이 우리 인생 가치관에 주는 지혜의 삶으로 연계할 수 있습니다. 청차관을 들리지 않고 음미하지 않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이 청차관, 청차를 마시는 생활 철학이 문명 정결의 차 이자 감사의 차를 서로 마시는 인생살이에 미움과 질투와 시기가 없는 담백하고 순수한 맑은 차 맛과 같은 최대의 행복을 누리는 연길시 청차관의  이야기 입니다.

     정수이 리월남 림기인 곽만술 황광주 이만호 김숙자

     라정자 최동중 오인숙 리해숙 김종운 김옥선 리재영

     강옥화 장혜숙 조명기 등 17명 올림."

네, 정수이 청취자 등 17명은 지명 '청차관'을 글자 의미 그대로 차와연관이 있는 걸로 해석하셨는데요,  지명 청차관의 뜻 의미를 내달의 첫 목요일 방송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분이 '퀴즈 한 마당'에 열심히 동참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박은옥(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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