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간둥이 《기집애》
이여천
썩 오래전 30대 젊은 시절의 이야기다.
《이 기집애야!》
나는 한사람을 이렇게 욕을 한적이 있다. 그것도 작가대표대회 참석자들이 많이 모여앉은 술상에서 나는 무엇이 마땅치 않았는지 아니면 가뜩이나 못하는 술을 억지로 몇잔 하고 얼근히 취했던지 그만 이렇게 욕을 내뱉었던것이다.
그 욕을 먹은 상대가 바로 항상 생글생글 웃으면서 재간둥이로 불리우는 우리 문단에서 한창 소설로 떠오르는 당당한 작가 리혜선씨였다.
사실 경상도 동네에서 줄곧 자라온 나는 이 《기집애》란 말을 다 욕으로만 리해한것은 아니다. 물론 칭찬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기집애》라고 할 때면 어딘가 가깝고 기특하다는 뜻도 들어있는것이다. 말하자면 허물없는 사이에는 이런 말이 오고가는 법이였다.
그런데 나는 그만 실수를 한것이다. 연변은 경상도 마을이 아니였다. 사람들은 나의 입에서 툭 튀여나온 이 《기집애》란 말을 그저 곱게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먼저 리혜선씨가 술상을 떠나버렸고 화기애애하던 술상 분위기도 팽팽해졌다. 당시 그렇게도 나하고 친하던 친구들이 나를 쳐다보는데 금방 달려와서 주먹이라도 하나 날릴듯했다.
나는 혜선씨가 그렇게 친구가 많은줄은 몰랐다. 그저 곱살하게 생긴데다가 재간까지 있고 하니 당연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것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그녀를 위해서 친구와 따질수 있는 친구들이 이렇게 많을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때는 우리 또래 문인들이 무슨 《동인회》란 조직을 내오고있었는데 산거지구에 살고있는 나한테도 부회장이란 이름을 달아주려고 했으므로 나는 스스로 인기가 꽤 좋았던것으로 생각했다. 또 소설을 쓰고 편집도 하니 나한테도 친구가 적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천만에…
술상이 이내 흐지부지 끝났고 나는 온역이라도 된듯 혼자만 텅빈 방에 박혀있어야 했다.
이튿날 회의가 끝났기에 거의 다 집으로 돌아가고 외지에 있는 우리 몇명만 려관에 남게 되였다. 아침밥을 먹고나서 방에서 짐을 챙기는데 옆칸에 있던 길림의 엄정자선생이 나를 부르는것이였다. 나는 무슨 짐을 들어달라고 부탁하는가부다고 생각하고 엄선생의 방에 들어서니 거기에 난데없이 혜선씨가 앉아있질 않은가!
《리선생님, 실은 저 여태까지 자라면서 아직 아버지한테도 그런 욕은 먹은적 없거든요…》
얼버무리면서 변명인지 아니면 아직 소화가 되지 않아서 걸고드는건지 아니면 어딘가 화해를 보려고 하는건지 혜선씨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욕이라고 생각되면 미안합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야…》
나는 그날 이런 말로 용서인지 변명인지 얼렁뚱땅 넘겨버렸고 그후로는 혜선씨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조심해졌다.
당시 나는 조그마한 일로 꽤나 시끌벅적하게 구는 혜선씨가 아니꼽게 생각되기도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혜선씨만은 그래도 남들보다 가깝고 그만한 《욕》은 받아줄것이라고 생각했던것이다.
왜냐 하면 처음으로 연변문단에서 친한 사람은 누구보다도 당시 길림신문에 있었던 리혜선씨였기때문이다. 산거지구의 조선족을 위해서 내왔다는 신문―길림신문의 문예부간에 있었던 리혜선씨가 이내 우리에게로 가깝게 다가왔던것이다.
김인선씨와 리혜선씨가 산거지구의 문학을 위해서 많은 힘을 쏟아왔기에 그래도 연변에서는 그들이 우리와 제일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1985년인가 그해 우리 《장백산》에서는 함수반을 모집했는데 그 일로 하여 나는 김수영선생과 함께 연길을 간적이 있다.
정말 태여나서 처음으로 가보는 연길이였다. 어려서부터 연변이란 말은 많이 들어왔지만 이렇게 가보기는 처음이였다.
산거지구에 살고있는 우리 민족치고 그 누구 하나 연변을 동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것이다. 연변은 우리 조선족의 수도이고 또한 우리 마음의 기둥이기도 하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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