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장이 아니라 완전히 유흥업소구나.》
《그래, 유흥업소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 그런데 시내안의 그런 유흥업소와는 판판 달라.》
《첫 분위기부터 다른것 같은데.》
《분위기뿐이 아니지. 한번은 어머어마한 벼슬을 가진 사람을 여기에 모셨는데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뭔지 알아?》
《뭐라고 했기에?》
《여긴 인간이 허울을 벗는 곳이라고 했어.》
《허울?》
《인간이 살아가노라면 꼭 두개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남한테 보이는 모습, 다른 하나는 가지고 있는 본연의 모습이라나. 보이는 모습은 사회 제도적인 장치나 도덕적인 구속 등으로 어쩔수없이 허울을 쓴 모습이고 가지고 있는 모습은 가식이 없는 자연인의 모습 그대로라는 거야. 하여간 그 사람 며칠 여기서 보내면서 내가 듣기에도 모를 소리를 많이 지껄였어. 아무튼 이곳을 떠나면서 그 사람이 〈자연인이 되는 곳〉이라는 족자를 써주었어.》
《그 사람 누군데?》
《여기를 거쳐간 사람에 대해선 비밀에 부치는게 여기 계율이야.》
《비밀아지트에 온 기분이구나…》
《그래. 어찌보면 여긴 비밀아지트지. 역시 먹물 먹은 놈이 반응도 빠르고 표현력이 좋아.》
장덕만이 내 어깨를 치며 껄껄댔다.
《비밀아지트면 혹시 나 오늘 여길 들어왔다가 영영 나가지 못하게 되는게 아니야?》
《그럴수도 있지. 여기가 맘에 들면. 하긴 내 친구 한 녀석은 아예 여기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오늘 저녁엔 가까운 친구 몇을 청했는데 다 사업하는 친구들이야. 책만 뒤적이는 너하고는 공동언어가 없겠지만 술자리는 같이 할만한 친구들이야.》
그날 저녁 강덕만의 친구 넷이 각기 녀자 하나씩 데리고 산장에 왔다. 처음엔 부인을 데리고온 줄 알았는데 소개를 듣고 보니 그게 아니였다. 무역회사 사장이라는 강씨가 데리고 온 녀자는 한참 잘 나가는 시 예술단의 무용배우라고 했고 부동산회사 사장이라는 허씨가 데리고 온 녀자는 어느 학원의 부교수라고 했다. 특산물회사 사장이라는 방씨가 데리고 온 녀자는 시 대외무역국의 과장이라고 했고 제지업을 하는 최사장이 데리고 온 녀자는 가장 젊었는데 지금 한창 석사과정을 밟는 연구생이라고 했다.
강덕만이 나를 나를 간단히 소개하고는 오늘만은 나의 파트너로 되겠다고 하니 모두 버쩍 떠들어댔다.
《안돼, 동성련을 하려면 이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어.》
《강회장님, 오늘따라 웬일이세요? 동창생앞에서 점잔을 차리시려는 건가요? 어서 애인 부르시고 동창생에게도 파트너 하나 정해주세요.》
《이성 파트너가 없는 사람과 자리를 같이 하면 기분이 나빠. 미안합니다. 청도에서 오신 선생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데 언제 볼라니 이성파트터가 없는 사람은 술자리에서 남한테만 신경 쓰더군요.》
《강사장님이 동창생앞에서 애인 부르기 뭣하다면 제가 대신 전화걸가요?》
《이봐요 강회장, 난 그래도 강회장을 무슨 일이나 딱 소리나게 마무리짓는 사람으로 알았었는데 오늘 보니 그게 아니군그래. 오늘 이자리는 동창생을 위해 마련한 자리가 아니오. 분위기 깨지기전에 어서 지금이라도 조처를 하시오.》
《하는수 없군. 어때 괜찮겠지?》
강덕만이 나한테 물어왔다. 그 말이 녀자 파트너 불러와도 괜찮겠냐는 말인줄 번연히 알면서도 나는 짐짓 그 뜻을 리해못한듯이 나왔다.
《뭐가 괜찮아?》
《강회장, 그런 물음이 바로 부질없는 물음이라는거야. 이 세상에 녀자 마다할 남자 어디 있나. 중도 고기맛을, 허, 이건 적당한 비유가 아닌데. 실례했습니다.》
부동산회사 허사장이 나한테 고개를 굽석했다.
《알았어.》
강덕만은 내 잔등을 한번 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술 두어순배 돌리면서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는데 강덕만이 아가씨 하나 데리고 들어왔다. 키가 늘씬한 미모의 아가씨였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모델같은 아가씨였다.
《여기 지배인이야.》
아가씨가 고개를 깊이 숙이며 나한테 인사했다.
《향단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허사장이 너스레를 떨었다.
《춘향전에서 나오는 향단이가 방자님을 모시려고 모처럼 오셨구만. 자 어서 오늘의 방자님곁에 앉으시오. 그런데 강회장은?》
《좀 있다 오니까 자 술이나 들지.》
술이 돌고 화제도 돌고 돌아 사업얘기로 부터 시작한 화제는 시공간 제약을 받지않고 세상만사를 모두 망라시켰다. 술좌석에서 세계를 일주한다는 말이 있다. 하문특대밀수사건, 클린톤대통령 추문, 조선반도 남북 정상 상봉 등 굵직굵직한 세계적인 사건들이 거론되다가도 어느 녀배우의 사생활이 내비치기도 하고 타이슨, 로나왈드, 쵸단 등 스포츠계의 명인들을 제 조카처럼 다루다가도 어디서 얻어들은 남녀간의 정사를 다룬 싸구려 유머를 되옮기면서 말초신경을 자극하기도 했다. 장만덕이 불러온 파트너는 시 검찰원에서 사업하는 30대 초반의 녀자였는데 말수가 적은 편이였다. 내 곁에 앉은 향단이는 화제에는 끼우지 않고 부지런히 나의 잔만 쳐주었다. 술이 좀 거나해지자 내 호칭도 《북경 선생》이던것이 《북경친구》가 돼버렸다.
《북경친구, 나 하나 물어볼것이 있는데 왕보삼이 진짜 자살한거요?》
제지업을 하는 최씨가 물어왔다.
《자살했다고 자니까 자살한거겠지.》
《그런데 풍문엔 다른 말이 돌더구만.》
《난 그런 뒷골목 소식엔 흥미가 없소.》
《왕보삼, 듣던 이름인데요. 티베트에서 현위서기를 했다는 그 사람인가요?》
무역회사 강사장의 파트너인 무용수가 물었다.
《이사람아, 자넨 춤만 추다나니까 세상 돌아가는덴 아주 까막눈이군그래. 티베트에서 현위서기를 했다는 사람은 인민의 충복으로 추대받는 공번삼이고 왕보삼은 북경시 부시장을 했던 탐관이야.》
강사장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름 마지막 자가 다 삼으로 끝나니 헷갈리네요.》
제지업을 하는 최사장의 파트너인 석사연구생이 화제에 끼여들었다.
《지금 항간에 도는 말이 하나 있는데 탐관들은 〈낮에는 공번삼을 따라 배우고 밤에는 왕보삼을 따라 배운다〉더군요.》
《이건 아주 탐관들에 대한 신랄한 풍잔데.》
《그럼 우리도 지금 이시각 왕보삼을 따라 배우는게 아닌가? 하하하…》
최사장이 파트너인 석사연구생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부동산 회사의 허사장이 그의 말에 쐐기를 박았다.
《이사람아, 우릴 왜 탐관들과 같은 위치에 놓는가 말이야. 왕보삼을 따라 배우는건 어디까지나 탐관들이고 우리는 말이야 열심히 벌어서 열심히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지.》
이렇게 화제가 탐관들에 대한 얘기로 옮겨졌다.
《지난해 회뢰죄로 감옥에 간 시 공상국 국장 있잖아. 그 녀석이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말을 내가 직접 들었는데 우리 사업가들한테서 발가낸 돈을 전부 로무비라고 하더군. 나 참, 한심해서. 우리 회사 청사 착공식에 온걸 내가 만원을 찔러줬는데 그 돈을 뭐라고 했는지 아나. 착공식 테프를 끊은 로무비라고 하더군.》
특산물회사 방사장의 말이였다. 제지업을 하는 최사장이 말을 받았다.
《나 말이야. 지난주에 광주에 갔다왔는데 지금도 거기 탐관들은 우리 사업가들을 노복으로 보고 있더구만. 광주 무역국의 과장깨나 한다는 녀석이 날 접대했는데 그 녀석과 같이 온 두 사람이 각기 〈007가방〉을 들고 서있더군. 첨엔 비서아니면 수하 직원이겠거니했는데 그게 아니더군. 알고보니 둘 다 우리같은 사영업자였어. 그날 연회비용이 5만원 나왔더군. 별로 먹은것이 없었는데. 2차로 룸살롱 같은데 갔는데 아가씨 열두명을 불러들여서 라체쇼를 벌이게 하더군. 상상 해봐. 실 한 오리 걸치지 않은 아가씨들이 알몸으로 쇼를 벌이고 술 권하고 춤추는 그 광경을 말이야.》
《군을 뗐겠군 그래.》
《군을 뗐다는게 뭐야. 난 아주 기가 질려버렸어. 그날 팁만해도 2만원 가량 나왔는데 그날 돈을 누가 물었는지 알겠나. 〈007 가방〉을 들고 대기하던 사영업자들이 물었지. 이튿날 사업관계로 두 사영업자를 만났는데 거기선 그게 류행이래. 공직에 있는 자가 공금으로 유흥비를 물면 인차 탄로가 나기 때문에 깨끗하게 사영업자들의 등을 처먹는다는거야. 그것도 현금으로 깨끗이 결산을 끝낸다는거야. 그 녀석들의 말로는 공직에 있는 자들이 사영업자들을 좋아하는것은 사영업자들이 현금 동원력이 있어서 그런다는거야. 하긴 개체경제의 중요 특징이 현찰이니까.》
무역회사 강사장이 어이없는 웃음을 입가에 떠올리면서 말했다.
《거긴 아직도 초급단계군그래. 지금 어느 때라고 사업가들을 노복으로 부려먹어. 지금은 말이야. 우리가 상전이 된 시대야.》
부동산회사 허사장이 그 말을 받았다.
《맞아. 우리도 한때는 그런 처지에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지. 시 공안국 국장있잖아. 지금은 사석에서는 날 형님이라고 한다니까.》
그말에 강덕만이 어깨를 추스르며 한마디 껴들었다.
《부시장도 지금은 사석에서 날 형님이라고 한다니까.》
이 말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부시장인 나의 동창생 한철을 형님이라고 하더니 하루 사이에 그가 동생이 됐다.
《강회장, 그런데 왜 강회장은 공석에서는 부시장을 형님이라고 하나?》
허사장이 바투 들이댔다.
《그거야 체면을 살려주는거지. 진짜야. 사석에서는 날 형님이라고 한다니까. 워낙 내 나이가 두살우이니까. 지금이라도 내가 오라고 하면 30분내로 온다니까. 지금 불러볼까?》
이말에 내가 강덕만의 귓전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한철이는 회의하러 성에 갔다고 하던데.》
강덕만이 내 어깨를 툭 쳤다.
《이 고지식한 사람아. 한씨는 회의간게 아니라 너들 동창생들을 피한거다. 왜 피했는지 알아? 동창생들이 모이면 술을 마셔야겠고 노래방 가야겠고 하니 우정 피한거다. 이 쪼고만 시내에서 부시장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니. 한씨는 공개 영업을 하는 식당이나 노래방은 죽어도 안가. 뭐 말마따나 형상유지라나.》
제지업을 하는 최사장이 강덕만을 꼬드겼다.
《강회장, 그럼 부시장을 한번 불러보라니까. 진짜 30분내에 오는가보자구. 우리도 강사장의 동원력을 한번 확인하고 싶어.》
《오면 어쩌겠나?》
《오늘 드는 비용 내가 전담하지.》
《오케!》
강덕만은 그 자리에서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쳤다.
전화는 곧바로 이어졌다.
《나 덕만인데 여길 오라구. 알만한 친구들이지. 그래, 인차 와.》
나는 쇼를 보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강덕만이 좌중에 한마디 주의를 주었다.
《여럿이 모인 자리니 한씨가 오면 깍듯이 대해주길 바라네. 나도 그렇게 하겠지만.》
이 말에 사장들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진짜 30분만에 한철이가 왔다. 그는 나를 보더니 저으기 놀라는 눈치였다. 어떻게되여 이런 자리에 참석했느냐는 눈빛이였다. 그 눈빛을 읽고 강덕만이 나를 가리키며 한철에게 말했다.
《형님, 수길인 나와 소학교때 동창생이요.》
강덕만의 말에 나는 또 한번 내 귀를 의심했다. 방금전까지만해도 동생이 됐던 사람이 또다시 형님으로 둔갑한것이다.
한철이가 술 한잔 나에게 권하며 말했다.
《동창모임에 참가못해서 미안하네. 자 술 한잔 받게.》
나는 술잔을 받으며 물었다.
《언제 왔나?》
《오늘 저녁차로 도착했네.》
그 말에 강덕만은 나한테 눈을 찡긋해 보였다.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뜻인것 같다. 한철이가 오자 술판 분위기가 아주 따분하게 바뀌였다. 한철이가 사장들에게 사업이 잘 되느냐, 무슨 애로사항이 있느냐, 앞으로의 타산은 어떤것이냐 하는 식으로 물으면 사장들은 아주 경직된 자세로 일일이 대답을 올리는것이였다. 술판이 아니라 사업회보를 받는 장소같았다. 한철이가 오기전만해도 《지금은 우리가 상전이 된 시대》라고 목에 핏줄을 세우던 무역회사 강사장은 한철이를 개여올렸다.
《저는 중국 전역을 거의 돌아다닌 사람인데 한부시장처럼 우리같은 사영업자들과 무랍없이 어울리는 령도는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사영업자들을 이붓애비 자식처럼 생각하는 령도들이 많고도 많습니다. 그런 령도들은 시장경제 안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영경제도 사회주의경제의 중요한 구성부분이 아닙니까.》
한철이도 듣기가 난감했는지 화제를 바꾸자고 했다. 그러나 술판은 한철이가 오기전처럼 떠들썩하지 못했다. 강덕만은 2층에 있는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한철은 급히 쓸 자료가 있다고 핑계를 대고는 산장을 떠났다. 한철은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곱씹으면서 떠나기전에 함께 식사라도 나누게 시간을 내달라고 했다. 나는 건성으로 시간을 내보겠다고 했다.
한철이가 떠나가자 그자리에 있던 사장들과 함께 온 녀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앓던 이를 뺀것 같다고 했다.
《내가 왜 자리를 옮기자고 했는지 아나? 한씨는 노래방이라면 영 질색이야. 목을 매여 끌어도 안 가는 사람이거든.》
강덕만의 말이였다.
《음치겠군.》
《아니야. 노래를 얼마나 잘한다구. 그러나 딴 사람이 있으면 절대 노래방에 안가.》
《그럼 그것도 형상유지를 위한것이겠군.》
《그렇다고 봐야지. 그러니까 2차로 자리를 옮깁시다 하는건 한씨한테는 일종의 축객령이지. 자 분위기를 다시 살려 보자구.》
《분위긴 한번 깨지면 끝이야. 다른 분위기를 잡아봐야지.》
무역회사 강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그렇게 시간이 갔나?》
강덕만이 시계를 들여다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다른 분위기 잡을 시간이 됐구만. 그럼 각자가 알아서 분위기들 잡아보라구.》
사장들과 그들과 함께 온 녀자들은 나하고 작별인사를 나누고는 끼리끼리 나가버렸다. 강덕만이 자기 파트너한테 귀속말로 뭐라고 몇 마디 하니 강덕만의 파트너는 나의 파트너와 함께 나가버렸다. 그들이 나가자 강덕만이 술을 부으며 말했다.
《술 한잔 더 하지.》
《인젠 그만 하자. 머리가 다 어질어질해난다.》
《그럼 그만하지. 》
《좀 있다 향단이가 널 객실로 데려갈게다.》
《나 절로 가겠으니 방 번호만 알려달라.》
《너 혼자 못가. 길을 모르니까.》
《길을 모른다는건 무슨 뜻이야?》
《이 본채에는 객실이 없어. 손님방은 이 주변에 널려있는데 첨 오는 사람은 절로 찾아가기 힘들어. 더군다나 밤에.》
잠시후 향단이가 왔다. 나는 향단을 따라 산장을 나왔다. 향단을 따라 숲속에 난 길을 따라 5분가량 걸으니 아담한 초가집 한 채가 나타났다. 한국 민속촌에서 보았던 그런 전통적인 민가였다.
《겉모양은 전통적인 민가로 꾸렸지만 안은 호텔방과 다름이 없어요.》
향단은 나를 방으로 안내했다. 응접실에 침실이 달린 방이였다. 실내장식은 북경의 호텔수준에 준하면 3성급 호텔의 손님방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응접실 한구석에는 자그마한 찬장이 있었는데 거기엔 각가지 모양의 술병이 얹혀있었다. 대부분 양주병이였는데 값비싼것이였다.
《불편한 점이 있으면 전화하세요. 그럼 좋은 밤이 되십시오.》
향단이는 곱게 인사하고는 자리를 떴다. 술이 과했는지 머리가 욱신욱신했다. 목욕하려고 화장실 문을 열던 나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번 했다. 화장실에는 금방 샤워를 마친 미모의 아가씨가 타월만 걸친채 거울앞에 서있었던 것이다.
놀란김에 그 자리에 얼어붙은 나에게 미모의 아가씨는 미소를 날려왔다.
《아가씨는…》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허둥댔다.
《연이라 해요. 강회장님이 저보고 선생님을 모시라고 했어요. 어서 목욕하세요. 제가 등을 밀어드릴게요.》
얼결에 나는 화장실 문을 닫아버렸다. 소파에 앉아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타월만 걸친 아가씨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술 한잔하시겠어요?》
말이 나가지 않았다.
…아가씨가 포도주 한 병과 술잔 두 개를 들고 다가온다.
아가씨가 술잔을 입에 가져가는 순간 몸에 걸친 타월이 몸에서 미끄러져 내린다. 튕기면 소리라도 날 듯이 탄력있는 피부가 눈이 시도록 희다. 아가씨가 마이다 남은 포도주를 자기 가슴에 천천히 붓는다. 우뚝 솟은 내두산 사이로 깊게 패인 골짜기를 따라 분홍빛 물이 흘러내려 은밀한 숲속으로 숨어든다…
어느 영화에서 나오는 장면이 환각으로 잠깐 펼쳐졌다가 사라졌다. 아가씨는 잔에 포도주를 따르고 있었다.
나무 잎새로 하늘의 별이 보였다. 나는 어떻게 방을 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참만에야 비로소 날숨이 시원하게 나왔다. 문득 강덕만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여긴 인간이 허울을 벗는 곳이라고 했어》
이제야 그의 말뜻을 알만했다. 그리고 여기를 다녀갔다는 어마어마한 벼슬을 가진 분이 족자에 남겼다는 《자연인이 되는 곳》이란 글의 함의도 알 것 같았다. 강덕만의 말대로 여기가 인간이 허울을 벗는 곳이라면 나는 허울을 벗지 못한 사람이다. 아니, 아예 그 허울을 벗으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자연인》이 되기를 거부해서일가, 아니면 내가…
《북경에서 산다는 녀석이 촌놈들보다 더 촌스럽구나. 이제보니 넌 사내가 아니야.》
방에 있던 아가씨가 전화로 알렸는지 강덕만이 와서 나한테 던진 첫마디였다.
《여길 거쳐간 사람들은 다 그런 서비스를 받니?》
《나름에 따라.》
《여긴 산장이 아니라 사창굴이구나.》
《그런 단어는 함부로 쓰는게 아니야. 말도 〈아〉하기 다르고 〈어〉하기 다르잖아. 례들면〈자연인이 되는 곳〉, 얼마나 듣기 좋은 말이니.》
《여긴 〈자연인이 되는 곳〉인게 아니라 〈타락의 함정〉이라고 하는게 더 적합할 것 같은데.》
《지금은 타락이라는 말을 안 써. 인간답게 산다고 해. 더 유식한 말을 쓰면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는다고 해.》
《그건 언어도단이야.》
《그만두자. 쟁론해 봤댔자 먹물이 안든 내가 너의 상대도 안되니까. 그건 그렇고 넌 생리적으로 문제가 있는게 아니야? 말하자면 고자? 하하하…》
《웃기지 마. 부부금슬 좋기로 북경판에서 소문이 짜해.》
《소박맞아 쫓겨난 아낙네처럼 밖에서 어정거리지 말고 들어가서 술이나 먹자. 색은 싫어도 술은 마다하지 않겠지?》
《방에 아가씨가 있으면 안 들어가.》
《너 혹시 녀자공포증이라도 있는게 아니니? 아까 그 아가씨가 그러던데 너같은 손님은 처음 본다더라. 혹시 우주인이 아닌가 하더라. 하하하…》
방에 들어가니 아가씨는 어느새 자리를 피했는지 없었다. 우리 둘은 양주 한 병을 따서 마시면서 밤을 밝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내가 강덕만에게 부시장인 한철이와의 이상한 관계에 대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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